모두 거짓말을 한다

2018년 6월 28일

페이스북은 친구들에게 내가 얼마나 괜찮게 사는지 자랑하는 ‘디지털 허풍약’이다. 페이스북 세상에서 보통의 성인들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카리브해로 휴가를 가고, 《애틀랜틱》을 정독한다. 실제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화가 잔뜩 난 채 슈퍼마켓 계산 줄에 서 있고, 《내셔널인콰이어러》를 몰래 보고, 수년간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은 배우자의 전화를 무시한다. 페이스북 세상에서는 가정생활이 완벽하다. 실제 가정생활은 엉망이다. 얼마나 엉망인지 아이 가진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페이스북 세상에서는 토요일 밤이면 모든 젊은이들이 근사한 파티에 간다. 실제로는 대부분이 집에서 혼자 넷플릭스Netflix 드라마를 몰아서 본다. 페이스북 세상에서 여자친구는 남자친구와 다녀온 행복한 휴가 사진을 26장 올린다. 실제 세상에서는 이런 사진을 올린 직후, 구글에 ‘남자친구가 나와 성관계를 갖지 않으려 해요’라는 질문을 올린다. 이때 그 남자친구는 〈최고의 몸매, 최고의 섹스, 최고의 구강성교〉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알라딘 eBook <모두 거짓말을 한다>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 지음, 이영래 옮김) 중에서

칠레의 밤

2018년 6월 22일

삶은 계속되고 계속되고 계속되었다. 마치 알갱이마다 미세하게 풍경을 그려 넣은 쌀알 목걸이 같은 삶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런 목걸이를 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목걸이를 벗어 눈에 가까이 대고 알갱이마다 담겨 있는 풍경을 해독할 충분한 인내심이나 용의가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쌀알 미니어처가 살쾡이나 독수리의 눈을 요하는 측면도 있고, 그 풍경들이 관(棺), 공동묘지 조감도, 인적 없는 도시, 심연과 정상(頂上), 존재의 하찮음과 그 존재의 우스꽝스러운 의지,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 축구 시합을 하는 사람들, 칠레의 상상력을 순회 항해하는 거대한 항공모함을 방불케 하는 권태 등의 불쾌한 놀라움을 안겨 주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우리는 권태에 찌들어 있었다. 우리는 책을 읽었고, 권태를 느꼈다.

-알라딘 eBook <칠레의 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 그림) 중에서

투쟁 영역의 확장

2018년 6월 20일

나는 초원의 태양 아래 드러눕는다. 초원의 너무도 다정하고 안정되고 온화한 풍경 한가운데에 누워 있는 나는 지금 몸이 아프다. 참여, 기쁨, 감각의 조화 따위의 원천이 될 수도 있었을 모든 것이 이제는 고통과 불행의 원천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아주 격렬하게 기쁨의 가능성을 다시 맛본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이론적인 파라다이스에서 세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고 있는, 나를 닮은 유령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오래전부터 나는 그를 만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여겨 왔다. 그런데 이제 끝났다.

-알라딘 eBook <투쟁 영역의 확장> (미셸 우엘벡 지음, 용경식 옮김) 중에서

야밤의 츠키지

2018년 6월 12일


야밤의 츠키치에서 참치.

긴자에서 츠키치까지 슬슬 걷다보니 새벽의 명동과 을지로 사이를 걷는 느낌이 나더라. 간간히 비틀거리는 취객과 빽빽한 택시 행렬 빼곤 너무 조용한 분위기였다. 오늘도 또 스시잔마이 츠키치 본점을 오긴 했지만 이 시간대에 오니 뭐랄까, 망원동 강화통통생고기 느낌이 났다. 물론 망원동에선 고기를 굽고 여기선 스시를 먹는 게 다르지. 안주를 입에다 넣고 술먹는 분위기는 비슷하네.

모리바


공항에서 기분이 상했지만 호텔이 생각보다 매우 훌륭했고 모리바 와서 마티니 한 잔 마시니 유쾌해졌다. 바에 가서 마티니를 주문할 때마다 농담처럼 “슈퍼 드라이 마티니”로 만들어달라고 한다. 혀를 벨 듯한 날카로운 드라이함이 마티니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마티니는 다르네. 여태 마시던 거랑 대척점에 있는 마티니이다. 일단 서빙 온도가 생각보다 높아서 그런지 향이 굉장히 풍부하다. 그래서 천천히 마실 수 밖에 없네.

다음에 뭘 주문하지? 스터 기반 칵테일을 주문하는 게 좋다던데 생각나는 게 맨하탄 정도 밖에 없다. 라프로익 프로젝트 같은 괴랄한 거 만들어달라고 하면 어떨까? 그냥 올드패션드를 만들어 달라고 할까? 술병들을 보니 메이커스 마크 빼곤 딱히 눈에 띄는 버번이 없네..

전화가 오지 않는다

2018년 6월 9일

나를 적극적으로 찾아야할 사람들한테서 연락이 없다.

한 명은 이번에 바뀐 집주인으로 월세를 부쳐야할 계좌번호를 알려주지도 않고 무소식이다. 전에 이사간다고 연락까지 했더만 전화도 잘 받지 않아서 결국 부동산 대리인이랑 연락이 될 정도였으니. 어차피 8월에 계약만료이니 가만히 있어볼까? 대리인한테까지 전화하기 귀찮다.

또다른 한 명은 합정동 예비군 중대장이다. 일이 바빠서 2년 정도 예비군을 가지 못해서 3월까지 참석 독촉전화에 경고장까지 보내다가 그 이후로 무소식이다. 중대장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아니면 드디어 국가가 나를 포기한 건가? 제발 포기좀 해줬으면 좋겠다..

아싸

2018년 6월 1일

병원 대표 원장님 두 분 중 한 분께서 오전에 나오지 않으셔서 뭔 일인지 궁금했다. 감기 기운이 심해지셨나,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어제 병원 회식이 있어서 좀 늦게 나오셨단다. 그랬군요. 저도 나름 부원장 직함을 달고 있는데 왜 모를까요? 하하.

직장에 들어와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개인적인 교류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출근할 때 인사, 회진돌 때 인사, 퇴근할 때 인사 그리고 진료할 때 뭐 필요한 거 있음 말하는 정도다. 환자를 상대할 때는 달리 직장 동료들과는 하루에 열 마디도 하지 않는 것 같다.

대표 원장님이 나보고 말수가 너무 적으니 이런 저런 교류를 해보자고 하셨지만 일단 병원일도 많이 바쁘다보니 없던 일이 되었다. 무표정에다가 원체 말이 없어서 그런가, 같이 일하는 간호사들도 대체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

돈 받은 만큼 내 일을 열심히 하면 되었지 직장 안에서 친목질을 할 필요는 없잖아. 어제 뭐하고 쉬셨어요? 질문에 솔직하게, 도쿄에서 술먹다 왔습니다. 어제는 전주에서 술먹었습니다. 그리고 공연 보러 갔죠. 올해 4일 정도 빼고 계속 술먹었습니다. 어제도 맥주를 만들었습니다. 아주 비극적인 내용의 연극을 봤죠. 그리고 술마셨습니다. 이럴 필요는 없잖아.

이 곳에 취직해서 4개월 넘게 모든 말엔 단답형으로 대답하고 점심식사는 사람들이 적은 시간에 5분 만에 해치우니 존재감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다. 이런 걸 아웃사이더, 아싸라고 하지. 드디어 어제 회식이 있는지도 모르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을 정도의 경지라니. 정말 뿌듯하다. 더 정진해야지.

퇴직할 때까지 아싸로 살아가야지.

바이~ 앵그리버드

3개월 넘게 열심히 해오던 게임 “앵그리 버드2”를 지웠다. 처음에는 새 종류 모으고 렙업하는 재미가 있었지만 반복되는 레벨 디자인과 현질 유도에 점점 질리더라. 게임이 업데이트되면서 새로 들어온 ‘아기새’라는 시스템은 대놓고 현질 아니면 노가다를 요구하더라. 아기새의 레벨을 유지하려면 먹이로 줄 사과을 계속 모아야 하는데 하루종일 게임을 붙잡을 거 아니면 결국 현질을 해야하는 구조였다.

나는 FPS를 비롯하여 단판에 끝나는 게임을 좋아해서 이렇게 질척거리는 게임은 질색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도 RPG장르를 피하고 남들 다하는 WoW도 무시했다. 이런 나에게 고작 모바일 게임이 노가다를 요구하다니, 미련 없이 지웠다.

20대에 게임 때문에 인생을 조졌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게임을 멀리 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앵그리버드2는 오래 하긴 했다.

책이나 읽어야지.

어찌해야하나.

2018년 5월 31일

여태 6, 7월 근무 일정표가 나오질 않아 아침부터 원무과에 가서 빨리 보여달라고 재촉했다. 일정표를 보니 띠용. 6월 6일에 쉴 줄 알고 도쿄행 항공권까지 끊어놨더만 6일은 내가 근무하는 날이었다. 수수료 4만원 날리고 항공권을 취소했다. 괜찮다. 빨간 날에 일하면 수당 주니까 돈이나 벌자.

오전 회진을 마치고 생각난 게 오늘이 바로 종합소득세 신고 기간중 마지막 날이었다. 작년에 전 직장 급여 연체 때문에 대진 알바를 몇 군데 뛰었었지. 비정규직으로 4개월 정도 주말 근무 해주고 받은 급여를 따로 신고해야 했는데 절차가 생각보다 복잡하더라. 지인에게 도움을 받은 끝에 겨우 처리했다. 갑자기 전 한의원 원장 욕이 나왔다. 개새끼. 제 때 월급 줬으면 알바 안 뛰어도 되고 지금 와서 귀찮게 세금 신고할 필요도 없잖아.

오후 회진 돌고 외래 보고 세금 신고하니 벌써 퇴근시간이었다. 문자를 확인하니 월급이 들어왔다. 어차피 통장을 스쳐지나갈 돈이지만 기분이 조금 나아졌네. 크원 가서 기름진 로디드 프라이즈를 먹어줘야겠다.

그나저나 도쿄 갈 때 쓸 유심을 사놨는데 어쩌지? 6월 중으로 다른 날 항공권을 알아볼까?..

세이지 오자와

2018년 5월 18일

일괄적으로 싸잡아 말하면 안 되겠지만, 일본 음악가는 뛰어난 기술은 갖췄어도, 기법에 파탄이 없는, 평균점이 높은 연주가 가능해도, 명확한 세계관이 전달되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이룩해서 그걸 있는 그대로, 날것으로 다른 사람한테 전하고 싶다는 의식이 다소 약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오자와 그런 게 음악에서 제일 안 좋은 경우죠. 그러기 시작하면 음악 자체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정말로 잘못하면 엘리베이터 음악이 돼요. 엘리베이터를 타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 내 생각엔 그런 게 제일 무서운 종류의 음악이에요.

-알라딘 eBook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오자와 세이지 지음, 권영주 옮김) 중에서

택시 중독

2018년 5월 17일

택시가 잡히지 않아 오랜만에 대중교통을 타고 출근했다. 택시를 타면 집 앞에서 직장까지 15분 만에 갈 수 있으련만 오늘은 왜이리 택시가 없을까?

9호선 급행을 타고 그래 세계에서 이만한 대중 교통수단은 없지 하며 애써서 위안삼고 있었지만 마을 버스를 타니 모든 게 깨져버렸다. 급정거에 문도 닫히지 않았는데 출발하고 에어컨도 켜지 않아 왜이지 눅눅한지.

출근하면서 진이 빠져버리더라. 내일은 조금 더 일찍 일어나서 꼭 택시타고 출근해야지..

2018년 5월 5일

그러니까 우리에게 말이란 모든 문제의 원인임과 동시에 해법이었고, 우리 관계에 있어 시작과 끝이었고, 사실상 모든 것이었고, 그것이 사라진다면 그녀와 나 둘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우리라는 공동체의 의의를 잃는 방식으로 공존하느냐, 우리의 구성 요소를 유지하면서 이 공동체가 회복 불가능한 형태로 부서져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었던 셈이다

-알라딘 eBook (박민정 외 지음) 중에서

뭐 듣지?

2018년 5월 4일

이제 뭐 마시지? 냉장고에 있는 페트병을 하나 골라서 마셨다.

돈 좀 들여서 공방의 발효조를 10개 교체하고나니 나오는 맥주들이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다. 공방 멤버들이 우스갯소리로 ‘공방내’, ‘군내’로 통칭하는 구수한 곡물향이 확실히 줄긴 줄었다.

오늘도 동생이 외박을 하나 보다. 그래서 거실에 음악을 크게 틀고 냉장고에 있는 술을 천천히 마시고 있다. 꼬냑 한 잔 남은 거 비우고 캔 한 잔 마시고 내가 만든 맥주들을 조금씩 맛보고 있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을 크게 틀어놨다. 뭔가 우울한 음악을 듣고 싶어 고른 건데 예전 병이 도졌다. 스베틀라노프/국립러시아교향악단을 듣다보니 자꾸 므라빈스키/레닌그라드필하모닉이 생각났다.

차이코프스키를 처음 들은 건 중3이 막 끝나던 겨울방학이었다. 야탑역 근처 쇼핑몰에서 우연히 산 라이센스 음반이었다. 므라빈스키/레닌그라드필하모닉 1960년대 차이코프스키 마지막 세 교향곡 녹음이었다.

그 음반을 수십 번 듣고나서 중3병인가, 심히 우울해졌다. 옆에서 엄마가 우스갯소리로 뭐 안 좋은 일 있냐 물어서 별 거 아니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웃기긴 하다만 꽤 심각한 감정이었다.

아직 동생이 들어오지 않았다. 내일 출근해야 할 텐데. 뭐, 알아서 하겠지. 기억을 더듬어 나름 우울한 스트리밍 목록을 만들어 듣다가 놀랐다. 예전에 들었던 음악을 찾아 들어도 이젠 그 느낌이 아니구나.

옛날 듣던 음악들이 그저 어떤 기록으로만 느껴졌다. 그래, 이런 건 이럴 때 들었지만 지금 별로군. 우울하기 보단 신나잖아? 옆 방에서 고양이들이 우당탕탕 뛰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서 배나 긁어줄까? 맥주를 한 병 더 깠다.

돈 좀 들여서 공방의 발효조를 10개 교체하고나니 나오는 맥주들이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네. 공방 멤버들이 우스갯소리로 ‘공방내’, ‘군내’로 통칭하는 구수한 곡물향이 확실히 줄긴 줄었다.

이제 뭐 듣지?

군상

2016년 10월 28일

진료를 하다 보면 참 다양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 동네마다 분위기도 굉장히 다르고 경제력 차이도 있으니 한의원 풍경도 사뭇 다른 건 당연하지만 몇몇 대하기 힘든 환자들의 유형은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제일 무서운 사람은 침 한 번 맞고 그 자리에서 나았다고 격하게 기뻐하시는 분들이다. 몇 년 동안 고생하던 게 치유되었다며 칭찬을 계속 늘어놓지만 그럴 땐 난 오히려 불안해진다. 그런 사람일수록 감정의 진폭이 큰, 그러니까 극렬한 기분파에 가깝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왜 다시 아프다며 물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통증은 같이 했던 시간 만큼이나 낫는 것도 오래 걸린다는 걸 알려 드리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무섭고도 어려운 유형은 또 있다. 여기저기 의료 쇼핑을 다니는 분들이다. 어디가 다쳐서 저기 병원에서 이틀 치료받았는데 차도가 없더라, 그래서 여길 왔다. 여기까지 듣고나면 불안해진다. 어딜 다쳤다 그러니까 염좌만 하더라도 최소한 열흘 정도는 잡는다. 여기저기 이틀씩 다녀보고 여길 오셨다 하면 여기도 이틀 다녀보고 딴 데 가실 확률이 높다. 욕심내서 뭔가를 해주기 보단 지속적으로 설득하여 꾸준하게 치료받길 권유하나 이또한 쉽지 않다.

경제적으로 민감한 경우도 있다. 처음 오는 분들에게는 비교적 최근부터 불편하고 뭔가 뚜렷한 증상이 있으면 봉침을 권하는데 그 때부터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다. 뭔가 쓸데 없고 비싼 걸 요구하는구나, 라는 이런 시선을 느낄 때 나는 한숨을 쉰다. 내가 그 만큼 신뢰를 주지 못한 게 아쉽고 몇 천원 더 내는 거 가지고 날 저렇게 바라보시니 섭섭하니까.

실망

2016년 10월 26일

뜬금 없이 지난 일요일 새벽에 사람들과 하던 이야기를 퇴근할 무렵부터 되새김질하였다. 사람한테 실망한다? 실망한다는 건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건데 나는 별로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 기대는 자신이 어떤 이의 삶이나 가치관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자 환상에서 비롯되었겠지?

허나 나에겐 누군가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기대를 하지도 않고 따라서 실망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 들으면 자기합리화라고 피식하겠지만 엄연히 다른 일에 속한다. 나에게 중요한 건 누군가가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을 했을 때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 혹은 없느냐이다. 받아들일 수 없다면 다시 만나지 않으면 된다. 그게 힘든 상황이라면 감정적인 교류를 차단해버린다. 뭐하러 화를 내겠는가? 화를 내면 상대방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큰 부담이 되니까.

어떤 이의 모든 면을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고, 예상치 못한 면모를 발견했을 때 놀라움과 당혹감을 갈음하면서 실망이라는 단어를 쓰겠지.

 

10월에 볼 공연들

2016년 10월 7일

10월달 볼 공연들.
원래 달마다 두세 편씩 공연을 챙겨 보는데 이번 달엔 여러 페스티벌이 겹쳐서 몰아 보게 되었다. 부산국제영화제랑 광주비엔날레를 포기하고 남은 돈으로 공연이나 보자.

썬샤인의 전사들 –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김은성 작가의 신작.

산허구리 – 백성희장민호극장
국립극단의 고전극 공연으로 고선웅 연출이라 일단 예매했다.

타이거 릴리스 & 리퍼블리크 씨어터〈햄릿〉 – LG아트센터
오래 전부터 타이거 릴리스의 음악이 궁금했는데 마침 음악극으로 내한해서 예매.

더 파워 – 명동예술극장
국립극단의 공연으로 작년엔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올해 보면 좀더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 재관람을 시도해본다. 거기다 정승길 씨가 나오니 봐야지.

SPAF 복화술사의 학교 –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SPAF 여보세요 –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판소리만들기 자의 신작.

SPAF “Speak Low if You Speak Love” –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MOT – 군포시문화예술회관 철쭉홀
일단 예매는 해뒀지만 공연보고나서 어딜 가지 못하는 군포시라, 고민 중. 역시 이태원이나 홍대 그리고 대학로에서 공연을 봐야해.

비포 & 애프터 –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크리에이티브 바키의 재공연.

낙소스뮤직라이브러리

2016년 10월 4일

아주 좋은 걸 알았다. 정독도서관 ( http://jdlib.sen.go.kr/ ) 홈피에 접속한 다음 “클래식 음악 서비스” 배너를 클릭하면 낙소스 뮤직 라이브러리를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낙소스 뮤직 라이브러리는 세계 최대의 클래식 음악 아카이브를 스트리밍으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개인 계정으로 가입하려면 1년에 210불을 내야 하니 정독도서관을 열심히 써줘야겠다.

음질은 아주 좋은 편(Standard음질)은 아니고 컴 스피커로 그럭저럭 들을 만한 수준이다.

인터뷰

2016년 10월 3일

비어 포스트에서 맥덕 인터뷰 한다고 나에게 메시지가 왔다. 업계 탐방 한 바퀴 돌고 이제 업계인이 아닌 맥덕 탐방인가?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그러자고 했다. 뭐 입고 가야지? 유벤투스 유니폼? 네덜란드 유니폼?

뭘 물어볼지도 궁금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두렵거고 낯설거나 훈계질하고픈 삶을 살고 있어서. 물론 나에겐 낮의 삶과 저녁의 삶을 철저히 분리시키려고 해서, 저녁의 삶에 대해 뭐라고 하면 할 말은 없구나.

DJ

2016년 9월 29일

침 놓다 보면 한의원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이 자꾸 거슬렸다. 장르가 뒤섞인 거야 어쩔 수 없어도 차분해야 할 분위기를 흩트리는 음악들이 연달아 나오니 어질어질했다. 나도 재즈나 탱고를 좋아하고 자주 듣긴 하지만 환자들이 누워서 안정을 취해야 할 의원에서 꼭 듣고 싶진 않다. 플레이리스트를 보니 이것저것 섞여 있어 어수선했다. 뉴에이지에 탱고 그리고 사람 죽었을 때 트는 레퀴엠까지 망라되어 있더라. 전에 일하시던 간호조무사가 자기가 듣던 걸 추가했나?

음악에 신경 쓰는 사람이 나 밖에 없어서 바꿔야 하나 망설여졌다. 환자들이야 자기 아픈데 한의원 음악 듣고 있을 여유가 없고 간호조무사들은 배경 음악 말고도 신경 쓸 게 많으니까. 이거 나만 불편한 건가? 나만 민감한 건가? 그래도 내가 일할 때 편하면 좋으니까 음악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장르는 클래식, 단일 악기이고 소리가 너무 날카롭지 말아야 하며 음량이나 감정의 진폭이 지나치지 않은 게 뭐가 있을까? 곡의 수나 길이가 길면 더 좋지. 여기서 일단 화려한 관현악이나 날카로운 음색의 바이올린을 제외했다. 피아노 독주곡을 트는 게 무난할 텐데 여기서도 엄청나게 다양한 분야가 있어서 고민을 좀더 해봤다. 일단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는 제외. 중기의 소나타 시리즈엔 매우 유명한 곡들이 많지만 한의원에서 틀기엔 너무 시끄럽지.

계속 이 곡 저 곡 제외하다 보니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가 제일 무난하더라. 하이든의 소나타는 형식적인 혁신이 가미되어 있음에도 자연스러우며 유머가 넘친다. 게다가 지나치게 격렬하지 않은 음의 진폭 안에 다양한 감정들이 담겨져 있다. 마시면 처음엔 삼삼하지만 은은한 뒷 맛이 남는 차에 비유할 수 있겠다. 예뇌 얀도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앨범을 틀어 놓으니 딱 좋더라. 여건이 된다면 예브게니 코롤료프, 알랭 플라네, 알프레드 브렌델의 연주도 틀어 놔야겠다. 글렌 굴드의 연주도 좋아하나 좀 정신 사나우니까 제외.

침 놓으면서 하이든 소나타를 들으니 즐겁더라. 그래 이거지. 한두 달 계속 듣다 물리면 바흐의 건반 음악도 다른 연주자 별로 조합해서 틀어야지.

안녕하세요, 한의원 DJ입니다.

심야의 국밥

내가 내 자신을 과소평가했나 보다. 임페리얼 스타우트 두 잔 마시고 좀 알딸딸해져서 잠자리에 엎드려 가장 지루한 책을 펼쳤다. 그런데 읽다가 술이 깨고 정신이 또렷해졌다. 이럴수가. 그렇다고 50도 넘는 소주를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누워서 잠이 오길 기다렸다.

순간 배가 고파졌다. 지금 밥통에 밥은 얼마나 남아있으려나? 이 시간에 밥을 퍼서 뭔가를 만들어 먹기엔 자고 있는 동생에게 있는 대로 민폐를 끼칠 판이다. 포기하고 대충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와 가까운 돼지국밥집으로 슬슬 걸어갔다.

거리엔 수많은 택시, 대리 운전기사들이 스마트폰을 보며 서 있었다. 버스 정류장엔 N버스가 섰다. 이 시간에 버스라니! 대리 운전기사로 보이는 분들이 우르르 탔다. 사실 이 새벽에 버스를 탈 일이 없으니 신기해 버였다. 어디서 콜을 받아 저렇게 달려 가시나.

돈수백에 가서 돼지 국밥을 주문했다. 역시 주위 테이블엔 취객으로 넘쳐났다. 국밥 하나 먹으면서 저렇게 할 말이 많은가? 입에다 술과 밥을 밀어 넣으며 뭔가를 열심히 아야기하고 있었다. 어느 남자들은 밥 먹다 담배 피다 연신 왔다 갔다 했다.

내일 아니 오늘이 두려워졌다.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애간 진료해야 하는데 어쩌야 하나? 지금 당장은 말똥말똥하지만 낼 정오 쯤엔 꽤나 피곤할 게 뻔하다. 허나 몇 시간 후 일은 그 때 걱정해야지.

집으로 걸어 가면서 보니 중국집과 김밥 천국, 할리스 커피 그리고 우동을 파는 트럭은 아직도 영업을 하고 있다. 세상에. 역시 서울엔 밤이 없구나.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자기 위해 술을 마시는 건 피해야지. 뭔가 다음 술잔을 위해 디딤발을 하는 느낌이니까.

← Previous Page
Next Pag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