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상.

2011년 12월 23일

똑똑. 네. 쌤. 네. 한방과 진료실 쌤, 여친이 와서 가야 된대. 오후 진료를 대신 봐줘야 겠는데. 별일 없죠?

흙.. 끅. 근원을 알 수 없는 호흡의 용솟음에 목이 메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거 알아? 지난 저녁에 밥 대신 막걸리 한 병을 마시고 잤어. 아침에 일어나니 속이 아프더군. 그래서 생수 500ml를 철분-비타민제와 함께 흡입했지. 내 몸은 소중하니까. 출근하자마자 대천리 마을회관에 출장 가서 한시간반 타임어택으로 20명한테 침을 놔줬어. 힘들더라. 점심은 보다시피 커피 한 잔과 바게트 빵 몇조각이지. 좀 있다 조퇴를 할 거야. 300km를 3시간 안에 밟아서. 하늘이 두 쪽 나도, 김정은이 축포를 날려도 난 저녁 7시에 집에서 엄마가 해준 따뜻한 밥을 먹을거야. 5일만의 따뜻한 밥. 처음엔 위장이 꼬인 듯 거부하다 싸르르 행복감이 몰려오지. 맥주 한 캔 까고 오리역에 가서 심야영화 한 편보고 추위에 떨며 집까지 걸어올거야. 크리스마스이브 아침 9시에 일어나 인천연안여객터미널로 가서 쾌속선을 타고 연평도로 갈거야. 그래. 연평도. 24시간동안 숨쉬듯이 술을 마실거야. 25일엔 나도 모르게 집에 와있겠지. 26일엔 휴가를 내서 혼자. 영화 두 편과 연극 한 편을 보고 밤새 졸음에 쩔어 영양으로 돌아오겠지.

불과 9초 남짓한 침묵이었지만 여사님은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내 눈과 표정을 숨길 수 없었기에. 순간 가족들의 충고가 내 귀를 스쳐갔다. ‘형탁아, 넌 가끔 눈빛에 살기가 끼더라. – 아빠’ ‘오빠, 왜 아까 당장 꺼지란 눈빛을 하고 있었어? – 동생’, ‘야, 딴데봐. – 엄마’

아아. 갓 중3되는 아들을 둔 평범한 아줌마한테 무슨 짓인가. 궁상과 회한의 눈물이 나와 얼른 돌아서서 입술을 깨물며 속삭였다. 조퇴할거라서요. 힘들 것같아요. 커피 뭐 드시겠어요? 라떼? 아메리카노? 드립?..

가장 편한 걸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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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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