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퀴엠.

2013년 6월 19일

화요일에 영화 보러 부산에 갔다가 어떤 포스터에 끌렸다. <베르디 레퀴엠 연주회> 목적지를 바로 부산문화회관으로 바꿨다. 이 칙칙한 날에 왜 레퀴엠을 듣고 싶었는지. 가사만 놓고 읊으면 분노와 후회, 절대자에 대한 공포, 뒤늦은 반성 등 마음 심란케 하는 것으로 가득하다. <Dies irae, dies illa, solvet saeclum in favilla> 진노와 심판의 날 하늘과 땅이 모두 재가 되리라. 더욱이 베르디의 화려한 작법으로 온갖 감정이 증폭된다. 아이쿠 비까지 쏟아지네. 하지만 나는 무신론자다. 내세를 믿지 않지. 뭐랄까, 최후를 맞기 직전의 사람들의 집단 심리극 혹은 음악극을 보는 느낌으로 레퀴엠을 듣는다. 그럼에도 침잠되는 건 피할 수 없다. 곡이 끝나고 마지막 음이 사라지기 전에 박수가 터져 나온다. 졸지 않았음을, 이 곡의 끝을 알고 있음을 자랑스러워 하는 ‘안다’ 박수. 이 열광에 도저히 동참할 수 없어 소음을 뒤로 하고 지하철역으로 빠르게 걸어 간다. 어두운 잔상을 떨치고 싶어. <Libera me> 나를 자유롭게 하소서. 매 화요일마다 하는 것처럼 동백역에서 내려 해운대로 걸어 간다. 폭우가 한바탕 헤집고 지나간 바닷가의 신선한 내음이 다가온다. 바다가 보인다. 사람이 레퀴엠을 부르든 블루스를 부르든 여기엔 파도가 치겠지. 바다에 바람에 갈매기에 위안을 받는다. 다행이야. 이런 걸 느낄 수 있다니. 밤기차 타기 전에 맥주 한잔 하자. 같이 할 벗이 있음 더 좋겠지만. 뭐 어때. 화요일 저녁에 부산에서 음악듣고 바다 보면서 맥주 마시잖아. 인정해. 넌 행복한 거야. 음. 레퀴엠 듣고 삶에 대한 찬양이라니. 마지못한 태도로 인정한다. 그래. 이게 행복이라면 행복이겠지.

#듣기 #잡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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