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2016년 9월 29일

침 놓다 보면 한의원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이 자꾸 거슬렸다. 장르가 뒤섞인 거야 어쩔 수 없어도 차분해야 할 분위기를 흩트리는 음악들이 연달아 나오니 어질어질했다. 나도 재즈나 탱고를 좋아하고 자주 듣긴 하지만 환자들이 누워서 안정을 취해야 할 의원에서 꼭 듣고 싶진 않다. 플레이리스트를 보니 이것저것 섞여 있어 어수선했다. 뉴에이지에 탱고 그리고 사람 죽었을 때 트는 레퀴엠까지 망라되어 있더라. 전에 일하시던 간호조무사가 자기가 듣던 걸 추가했나?

음악에 신경 쓰는 사람이 나 밖에 없어서 바꿔야 하나 망설여졌다. 환자들이야 자기 아픈데 한의원 음악 듣고 있을 여유가 없고 간호조무사들은 배경 음악 말고도 신경 쓸 게 많으니까. 이거 나만 불편한 건가? 나만 민감한 건가? 그래도 내가 일할 때 편하면 좋으니까 음악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장르는 클래식, 단일 악기이고 소리가 너무 날카롭지 말아야 하며 음량이나 감정의 진폭이 지나치지 않은 게 뭐가 있을까? 곡의 수나 길이가 길면 더 좋지. 여기서 일단 화려한 관현악이나 날카로운 음색의 바이올린을 제외했다. 피아노 독주곡을 트는 게 무난할 텐데 여기서도 엄청나게 다양한 분야가 있어서 고민을 좀더 해봤다. 일단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는 제외. 중기의 소나타 시리즈엔 매우 유명한 곡들이 많지만 한의원에서 틀기엔 너무 시끄럽지.

계속 이 곡 저 곡 제외하다 보니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가 제일 무난하더라. 하이든의 소나타는 형식적인 혁신이 가미되어 있음에도 자연스러우며 유머가 넘친다. 게다가 지나치게 격렬하지 않은 음의 진폭 안에 다양한 감정들이 담겨져 있다. 마시면 처음엔 삼삼하지만 은은한 뒷 맛이 남는 차에 비유할 수 있겠다. 예뇌 얀도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앨범을 틀어 놓으니 딱 좋더라. 여건이 된다면 예브게니 코롤료프, 알랭 플라네, 알프레드 브렌델의 연주도 틀어 놔야겠다. 글렌 굴드의 연주도 좋아하나 좀 정신 사나우니까 제외.

침 놓으면서 하이든 소나타를 들으니 즐겁더라. 그래 이거지. 한두 달 계속 듣다 물리면 바흐의 건반 음악도 다른 연주자 별로 조합해서 틀어야지.

안녕하세요, 한의원 DJ입니다.

심야의 국밥

내가 내 자신을 과소평가했나 보다. 임페리얼 스타우트 두 잔 마시고 좀 알딸딸해져서 잠자리에 엎드려 가장 지루한 책을 펼쳤다. 그런데 읽다가 술이 깨고 정신이 또렷해졌다. 이럴수가. 그렇다고 50도 넘는 소주를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누워서 잠이 오길 기다렸다.

순간 배가 고파졌다. 지금 밥통에 밥은 얼마나 남아있으려나? 이 시간에 밥을 퍼서 뭔가를 만들어 먹기엔 자고 있는 동생에게 있는 대로 민폐를 끼칠 판이다. 포기하고 대충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와 가까운 돼지국밥집으로 슬슬 걸어갔다.

거리엔 수많은 택시, 대리 운전기사들이 스마트폰을 보며 서 있었다. 버스 정류장엔 N버스가 섰다. 이 시간에 버스라니! 대리 운전기사로 보이는 분들이 우르르 탔다. 사실 이 새벽에 버스를 탈 일이 없으니 신기해 버였다. 어디서 콜을 받아 저렇게 달려 가시나.

돈수백에 가서 돼지 국밥을 주문했다. 역시 주위 테이블엔 취객으로 넘쳐났다. 국밥 하나 먹으면서 저렇게 할 말이 많은가? 입에다 술과 밥을 밀어 넣으며 뭔가를 열심히 아야기하고 있었다. 어느 남자들은 밥 먹다 담배 피다 연신 왔다 갔다 했다.

내일 아니 오늘이 두려워졌다.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애간 진료해야 하는데 어쩌야 하나? 지금 당장은 말똥말똥하지만 낼 정오 쯤엔 꽤나 피곤할 게 뻔하다. 허나 몇 시간 후 일은 그 때 걱정해야지.

집으로 걸어 가면서 보니 중국집과 김밥 천국, 할리스 커피 그리고 우동을 파는 트럭은 아직도 영업을 하고 있다. 세상에. 역시 서울엔 밤이 없구나.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자기 위해 술을 마시는 건 피해야지. 뭔가 다음 술잔을 위해 디딤발을 하는 느낌이니까.

혼돈

2016년 9월 22일

강의 듣고나서 어쩌다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내가 부천에서 합정 가는 막차 타야 된다 해서 고맙게도 그 분이 호의를 베푸신 건데, 차를 타자마자 대뜸 학번과 출신학교 그리고 고향을 물어본 다음. 결혼은 하셨어요? 500m 차 태워주며 너무나 많은 질문을 하셔서 인터넷 쇼핑몰에서 날리는 쿠폰을 얻을 때 동의해야 하는 약관들이 퍼뜩 생각났다. 구질구질하게 몇 천 원 남짓한 쿠폰을 얻으려 할 때 컴퓨터가 나에게 말로 동의를 구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난 그냥 웃어 넘기고 고맙다며 역 앞에서 내렸다.

7호선을 타고 가는 중에 전철이 온수역에 닿은 다음 떠날 생각을 하지 않더라. 어디선가 고함 소리가 들려오고 승무원이 애절한 목소리로 문을 닫을테니 어서 문에서 비켜달라고 역내 방송을 하였다. 화난 취객을 욕설을 퍼부으며 이 새끼야 어서 나오라고 소리를 쳤다. 굉장히 울분에 찬 표정이었다. 대체 누가 그를 그렇게 화나게 했는다? 그냥 지나가다 부딪힌 사람? 아님 짜증나는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봤다고? 모르는 일이지. 어떤 어려 보이는 학생이 시바 세계를 중얼거리며 지하철을 나갔고 지하철은 다시 운행을 시작했다.

대림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는 중에 어떤 이는 토하고 있었고 또다른 누군가는 의자를 부여 잡은 채 잠들어 있었다. 어떤 또다른 누군가는 화난 채 전화로 상대방에게 어디냐고 화를 내고 있었다. 여자 친구인가? 난장판이 될 무렵의 2호선은 역겨우면서도 흥미로웠다. 지하철에 타니 옆 좌석의 남자 두 명은 진한 고기와 술냄새를 풍기며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욕하고 있더라.

다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면 내가 이상한 건가? 문득 술 한잔하고 싶었다. 허나 이 시간의 음주는 몇 시간 후에 반복될 일상에 지장을 줄 것 같아서 참았다. 빨래하고 어서 자야지.

이토록 멋진 마을

2016년 9월 18일


모리 시장은 시청에서 ‘시민의 목소리를 들으라’는 격려문을 자주 돌린다. 이 정도는 흔히 듣는 이야기다. 하지만 모리 시장이 여기에 덧붙이는 단서가 있다.

“지금 시민의 목소리를 듣고 정책에 반영하는 것은 인기영합주의다. 30년 후의 시민 목소리를 의식하라.”

가로축인 현재의 시민 목소리가 아니라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세로축의 목소리를 들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미래의 시나리오를 그리는 토대가 된다. 그 토대 위에서 현재와는 다른 새로운 번영의 모습을 그린 뒤 시민이 돈을 갹출해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이토록 멋진 마을>, 후지요시 마사하루.

시간이 필요하다.

2016년 9월 12일

원장님의 특수한 사정 때문에 평일 진료를 맡아 보고 있다. 진료하는 사람이 바뀌어서 그런가 환자 수가 줄었다. 예상한 결과이지만 괜히 자존심이 상하더라. 나도 잘해줄 수 있고 열심히 할 수 있는데 말이야. 어느덧 주말이 되고 밤에 술 한 잔 하러 연남동 칵테일바 포콕으로 갔다.

지인과 함께 간 거긴 하지만 가기가 꺼려졌다. 자주 보던 바텐더들이 그만 둔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내가 자주 마시던 걸 마실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 다행히 바텐더 한 분이 남아 계셨고 다음 달에 근처 바로 이직한다고 하셨다. 버번 위스키 1792를 넣은 Moody Child 한 잔 주세요. 그거 또 드세요? 만들어 드릴게요.

칵테일을 마시면서 퍼뜩 생각나는 게 있었다. 내가 일하는 한의원에 오다가 만 환자들도 비슷한 입장 아니었을까? 술 마시면서, 그리고 아는 바텐더 찾아가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좀 이상하지만 사람 둘이 서로 얼굴 보고 뭔가를 거래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지. 그리고 그 거래 속에선 비용과 편익이라는 무미건조한 조건을 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특정 장소와 특정 인물을 찾는 거고.

결국엔 내 노력뿐 아니라 시간을 들여 신뢰를 구축하는 과정이 필요함을 새삼 깨달았다. 새로 오는 환자들에게 정성을 다하고 그 사이 비는 시간엔 공부나 해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