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터

2015년 1월 7일

셀프 침. 어제부터 속이 메슥거려 일하다 급히 스스로 침을 놓는다. 좀 진정되네.

예전에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 침과 간단한 약, 키네시오 테이프, 소독용(?) 술을 꼭 챙기곤 했다. 하도 많이 걸어다니는 터라 간혹 종아리 경련이나 발목 삐는 거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어쩌다 발목을 삐어 길거리에 앉아 스스로 침 놓고 테이핑을 하고 있노라면 영화 “프레데터”를 떠올렸다.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이 부상을 입어 스스로 치료하는 장면을 머릿속에서 재생하며 혼자 낄낄댔다. 영화에서야 살인 기계로 그려진다만 꽤 불쌍하지 않은가? 우주선만 고장나지 않았다면 자기 갈 길 갔을 텐데, 대체 지구에서 뭐하고 있는 거람? 그리고 나는 목적도 없이 돌아다니다 타지에서 자신에게 침을 놓고 있는 꼴이란.

물론 나에겐 몸을 숨기는 초능력과 날렵함은 없지. 우주선도 없고.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직장인 중 하나일 뿐.

침 놓다 웬 자유연상이지?

일이나 하자.

나이답지 않게 젊게..?

2015년 1월 6일

어제 경리단의 어느 펍에 놀러 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나이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난 서른이다 이랬는데 왜들 놀라는 건지. 훨씬 많아 보인다나.

그런데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조금은 착잡하다. 예를 들어 나보다 세네 살 많은 누나가 동년배 아니면 더 많은 줄 알았다 해서 날 당황하게 했다.

물론 내가 꾸미지도 않고 엉망으로 해놓고 다니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예상치 않은 놀람들은 나를 시무룩하게 만든다. 말투, 행동들 때문에 그런가?

오늘 우연히 친구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털어놨더니 이러더라. 너의 지금 덕력은 도저히 너의 나이에 도달할 수 없는 거여서 나이 많게 느껴져. 다방면에 걸쳐 덕질을 하잖아. 뭐랄까, 나이에 비해 꽤 젊게 사는 사람이 떠오르지. 다들 그렇게 느끼는 아닐까?

결론은 내 덕력이었나. 그럼 조용히 담소를 나누며 덕스러움을 감추면 젊어 보일 수 있나? 허나 거울을 보면서도 평소 내 행동 경향을 되새기면서도 느끼는 거지만, 난 안 될 거야 아마.

깍쟁이들

어느덧 서울 생활 5개월 째, 진료하면서 별의별 사람을 보게 된다. 아직 경험이 일천한 탓이겠다만 경상도 4년 가까이 일하고 올라오니 사람이나 분위기 차이가 크게 느껴진다. 물론, 4년 전 군복무 때문에 경상북도의 산골로 들어 갔을 때의 문화 충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삶의 환경이 통째로 바뀐 거고 생애 첫 자취였으니까 그렇다고 퉁치고 넘어간다만.

서울 올라와서 처음 느낀 건 ‘이렇게 서울 사람이 까다로웠나?’였다. 요구하는 것도 많고 침이 아프다고 나중에 붙들고 불만 불평을 털어놓는다. 침이 원래 좀 아플 수도 있을 텐데 싶다가도 그저 웃으며 다음엔 더 살살 놔드리겠다고 돌려 보낸다. 이 정도야 약과이고 크게 애를 먹는 상황도 접한다. 지방에서 일할 때 사람들이 나보고 서울 사람 맞냐고, 전혀 서울 깍쟁이가 아니라고, 구수하다고 하던 게 갑작스레 이해가 되더라.

흠, 나도 서울 사람인데 같은 서울 사람이 싫어질 줄이야. 그런데 생각해보니 ‘서울 깍쟁이’라고 하기엔 약간의 어폐가 있다. 지금 내가 일하는 곳은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서울 양천구 그것도 목동이다. 여기저기서 모여든 사람들을 만나는 셈이고 어디서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은 있는 법이니, 다만 여긴 표본 수가 아주 커서 비교적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거 아닐까?

어쩌다 보니 푸념 비슷한 잡설이 되어 버렸다만. 여기서 계속 일하다 보면 어디서 일을 하든 당황하지 않고 잘 대처해낼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생일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좀 있음 생일인데 뭐 해줄까? 아무것도 해주지 마세요. 가족끼리 밥도 안 먹고? 그 날 일하는 날이고 평일이잖아요. 우리가 갈게. 제발 오지 마세요. 왜? 그 날 공연 보겠죠 아마.

지지난 주 아버지 생신으로 오랜만에 가족끼리 모여 식사를 했다. 나야 3개월만에 만난 거니 할 말도 없고 뭔가 어색하더라. 밥만 먹고 한 시간 안에 모든 게 마무리되었다. 그러니 내 생일에 다시 본다고 할 이야기가 많아질까?

게다가 나는 지난 3년 동안 혼자 생일을 보내다 보니 이게 특별한 날인지도 잘 모르겠더라. 3년 전에 내 생일은 평일이었고 산골에서 혼자 보냈다. 2년 전 내 생일은 토요일이었고 나는 충동적으로 부산으로 내려가 혼자 돌아 다녔다. 1년 전 생일엔 연극 보고 음악 좀 듣다 사계에서 맥주를 마셨다.

이번 생일도 혼자 음악 듣다 맥주 좀 마시고 자겠지. 형식적으로 케이크 자르는 것도 보기 싫고 가족 회식 동안 공허한 적막은 더더욱 싫다. 고독이란 건 남들과 함께 있을 때 더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거니까.

어머니께서 전화로 계속 말씀하셨다. 그럼 설 연휴엔 와? 아니오, 여행갈 거에요. 어디로? 일본 삿포로로 갈 거에요. 친척들 다 모일 건데? 거기서 제가 뭐 해야 하는 게 있나요? 그렇다기 보단 명절이잖아. 비행기 표는 이미 예매해놔서 취소도 안 되요.

뭐랄까, 불효자가 된 것 같은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그런데 뭐 어쩌랴?

이미 늦었어. 이러는 게 더 편하니까.

저는 애호가입니다.

2015년 1월 5일

전 맥주 잘 몰라요. 술에 대해 아는 게 없어요. 그저 애호가에 불과합니다. 내가 이러면 사람들은 무슨 헛소리를 들은 것마냥 타박을 해댄다. 허나 난 꽤 진지하게 이야기한 거다. 고작 이 정도로 오덕후라는 소리를 듣긴 어렵고, 부끄럽기까지 하니까.

언제부터인지 오덕후 그러니까 오타쿠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느낌이 많이 희석된 채, 자신이 어떤 한 분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가리키는 말이 된 것 같다. 예전부터 무엇 하나에 빠지면 끝을 보는 스타일이고 모든 사회관계를 무시한 채 매몰되는 경향이 큰 나로선, 다행인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다.

내 첫 덕질은 추리소설 탐독이었다. 어머니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그런가, 한글을 코난 도일의 소설로 익혔고 유년 시절 동안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을 사 모았다. 남들은 동화로 동심의 나라를 여행하고 있을 때 나는 살인, 불륜, 질투, 범죄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지금도 사람들이 아주 특이하다고 지적하는 내 사고 방식이 그렇게 형성되었나 보다. 여튼 요즘에도 애거서 크리스티의 미발표작 혹은 그녀가 다른 필명으로 쓴 스릴러가 출간되었다 하면 곧장 읽어 보곤 한다. 햇수를 헤아리면 무려 25년 동안의 덕질인 셈이다.

두 번째 덕질은 음악이었다. 중학교 다닐 때 친척 집에서 가져온 CD에 빠져 클래식 음반을 모았고 악보까지 샀다. 그런게 덕통사고라는 건가? 거기에다 재즈, 월드 뮤직 등등 점차 범위를 넓혀 갔다. 고등학생이 음반 몇 천장을 모았다면 믿겠는가? 실제로 그랬다. SP 초기 시절의 쇳소리 가득한 음원부터 2000년대 녹음까지 거의 백 년을 아우르는 아카이브를 구축했다. 재즈나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쉬지 않고 밤새서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나의 열정은 여전하다.(1)

그 다음의 덕질은 내 흑역사와도 관련이 깊다. 이번엔 게임으로 세계2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Day of Defeat라는 FPS게임에 빠져 들었다. 남들은 그저 게임을 사서 즐기는 것에 그쳤으나 나는 급기야 서버를 운영하고 게임 관련 커뮤니티 사이트를 개설했으며 클랜까지 만들어 클랜전 대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로 판을 크게 만들었냐면, 그 게임을 한국 사람들이랑 하기 위해선 내 서버에 접속을 해야 했고 거기서 시비가 붙으면 내가 중재를 해야 했다. 그 와중에 나는 리눅스로 서버를 운영하기 위해 스크립트를 짜는데 몰두했으며 후원을 받아 인터넷데이터센터에 서버를 입주시키기도 했다. 결국 난 대학 1년 유급을 당하고 사람들 뒤치닥거리를 하는 것에 지쳐 게임을 그만 두었다.

그럼 맥주는 어떤가? 앞서 열거한 예에는 아직 한참 부족하다. 그냥 내 입장에서 애호가 수준에 불과하다. 매우 흥미로워서, 슬슬 돈 지출을 늘려나가는 과도기적인 단계랄까? 누군가 나에게 왜 그렇게 피곤하게 어느 한 가지를 파냐 질문한다면, 글쎄다. 아무런 목적이나 지향점 없이 ‘삽질’을 하는 게 내 삶의 방식이고 그 지향점 없는 삽질 덕분에 부가적인 지식을 얻는 희열이 만만치 않다. 추리 소설 읽다 보니 다른 책도 많이 읽고, 음악 듣다 보니 거의 전 분야의 음악을 들어보게 되고, 게임 서버 운영하다 보니 컴퓨터의 온갖 잔 고장을 고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여 다른 사람들 컴퓨터 구입할 때마다 도움을 주곤 한다.

그러니 더욱더 정진하겠어! 이런 출사표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내 기준에서의 덕질은 무엇이고 과거의 덕질이 어땠는지 글을 끼적이다 좀 길어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전 맥주 덕후가 아니고 애호가에 불과합니다. 헤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