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 is Time is…

2014년 11월 19일

옛 서울역에서 본 무용 공연.

타조소년들

2014년 11월 18일

“로스는 로스로 가야지” 농담처럼 연극이 시작된다. 사고로 죽은 친구 로스를 같은 이름의 도시로 한 번 데려가야 하지 않겠냐며 세 명의 친구가 유골함을 가지고 여행을 시작한다.

어리다. 나이에 대한 지칭 혹은 미성숙한 상태를 은연중에 낮춰 부르는 단어, 단순하게 한 가지만 생각하며 무작정 행동으로 옮겨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면책권, 자신이 뭔가를 모르고 있음을 모르는 상태, 나중에 나이가 들어 ‘순수했었지’라고 회상할 수 있는 시절, 하지만 그 순수함이라는 게 거칠고 폭력적인 혼란에 불과했음을 간단하게 은폐하는 형용사.

세 명의 친구들은 어렸다. 하지만 친구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하나씩 알아 가며 자신들이 타조소년들이었음을 깨닫는다. 덤불 속에 머리를 박고 있으면 모든 게 멀어지고 안전한 줄 아는 그 타조 말이다.

결국 ‘어리다’를 뒤흔드는 건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게 되는 것’ 아닐까? 그 앎에 맞닥뜨리고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 다음과 같은 말을 쓸 수 있을 듯 하다. 나이가 들다, 노회하다, 늙다, 성숙하다, 그리고 여전히 어리다.

극은 왁자지껄하고 분주하게 막을 내리지만 뭔가 텁텁한 게 남더라. 극장을 나오면서 자문한다.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게 될 때, 난 여전히 어린가?

<타조 소년들>, 국립극단
소극장 판 (2014.11.15~11.30)
칼 밀러 극본, 토니 그래함 연출

산타는 너의 창문을 두드리지 않을 거야.


뭐하세요? 크리스마스에 대학로를 방황하는 동안 연락이 왔다. 연극 보려구요. 혼자요? 당연하죠, 지금 연극 반값 할인 하고 있어서 한 장 값으로 두 편을 볼 수 있어요 하하, 그나저나 뭐하세요? 집이에요. 흠, 저녁에 음악이나 들으러 갈까요? 뭔데요? 교회 다니세요? 옛날에 다녔어요. 지금은요? 지금은 안 다닙니다. 그럼, 신성 모독으로 가득 찬 노래를 들으러 갑시다, 빌어먹을 크리스마스.

상수동의 제비다방의 좁디 좁은 자리에 앉아 김태춘의 캐롤을 들었다. 그 분이 캐롤을 부르시다니 의외였다만, 역시 그만의 색채가 가득한 캐롤이었다. 노래가 끊어질 때마다 정호승 시인의 “서울의 예수” 시집 낭독이 이어지고, 여튼 내가 보낸 크리스마스 중에 가장 어둡고도 특이한 날이었다.

1년 전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그 때 들은 노래들이 앨범으로 나온다고 해서, 그리고 몇 번의 공연을 한다고 해서 가볼 생각이다. 11월 28일에 문래동에서, 12월 24일에 홍대에서. 하, 이브에 음악 듣고 맥주 한 잔 하러 가면 되겠네.

오늘밤 산타는 너의 유리창을 두드리지 않을 거야. 지금은 국도 위에 취한 루돌프와 함께 마주 오는 화물차에 깔려 버렸으니, 술 취한 산타는 너의 유리창을 두드리지 않을 거야. 오늘밤 예수는 너의 헛된 기도를 들어주지 않을 거야. 싸구려 가방에 성경과 CCM을 넣고 꼬인 혀를 감고 출장을 떠나 버렸으니.. – <산타는 너의 창문을 두드리지 않을 거야>, 김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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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것들.

2014년 11월 17일

그래도 그 사람이 지금 뭘 할까, 어디에 있을까 그런 궁금증이 있진 않아요? 연락도 해보고 싶고.

글쎄요. 제가 무엇을 생각하든 그것은 망상일 겁니다. 제 망상 속에서 그 사람이 살아 숨쉰다 할지라도 현실과 거리가 먼 소설이죠. 게다가 재미도 감동도 없는 속만 긁어대는 소설이죠. 해결책은 꽤나 간단합니다. 소설은 책으로 읽으면 족하고, 제가 알 수 없는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게 다에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들.

2014년 11월 16일

니체가 이런 말을 했단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모든 것들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 골골댔던 니체가 저런 당당한 말을 했는지 의심스럽다만, 처음에 들었을 땐 멋있다 했었지. 그런데 이런저런 환자들을 보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모든 것들이 나를 약하게 만든다고. 예기치 못한 통증, 관절염, 소화불량 등등 앞에서 의연히 대처할 사람이 있을까? 고약한 치통으로 날밤을 샌 사람이 침착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나조차도 나이가 들면서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약한 모습을 보일까? 궁금하다.

사계 1주년

2014년 11월 14일

일하다 보면 콕 내 이름을 대고 진찰받으려는 분들이 있다. 왜 그럴까, 그럴 리 없는데 하며 진료실에 들어가면 역시 내가 아는 사람들이다. 거의 다 사계에서 만난 이들로, 같이 일하시는 분들이 묻는다. 친구 분이시냐고. 술 마시다 우연히 마주쳤어요 답하기도 어렵고 어제 같이 한잔했죠 라고 말하기도 그렇다. 바에서 실없는 농담을 늘어 놓은 게 불과 몇 시간, 며칠 전인데 여기선 굉장히 진지한 표정으로 어디가 불편하냐 묻다니 어색하기도 하고.

1년 전 우연히 들른 펍을 이렇게 드나들 줄은 몰랐다. 늘 하던 대로 이태원의 펍에서 맥주 마시고 집에 가는 길에, 불 꺼진 간판을 본 게 시작이었다. “사계”. 호기심이 생겨 구글링을 하고 11월 15일에 문 연다길래 뭐 파나 싶어 함 가본 건데 말이야. 분위기가 꽤 근사했다. 매 주말의 시작과 끝을 사계에서 보냈다. 사람들은 신기하게 쳐다봤지. 경주, 포항에서 근무한다는 사람이 매 주말마다 올라와서 마감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가질 않나, 밤을 샌 적도 꽤 많았지.

사장님께서 종종 말씀하셨지. 창업해서 미안하다. 남의 귀한 아들 버려놨구나. 내가 대답했다. 아니에요, 술이 아니면 다른 걸 파고 있었겠죠, 이번 생은 실패에요. 술 마시다 넋두리를 한 적도 있었다. 사계가 저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다른 이가 대답했다. 아니야, 당신이 사계를 이렇게 만들었어. 연극 보고 한잔, 음악 듣고 두잔. 편안했다. 자주 마주치는 이들을 SNS찬구 추가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50명 넘게 등록이 되어었고 어떤 이들은 가족들보다 더 자주 본 적도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이태원에 가냐, 이렇게 묻는다면. 글쎄 술도 있고 사람도 있잖아. 삶의 백스테이지라고 해야 하나. 직장이라는 무대에서 가면 쓰고 있다가 그냥 여행가는 느낌으로 이태원 들르는 거지. 내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할 사람도 없고 그냥 아무 말이나 던지고 듣고, 거기다 맛난 맥주도 마실 수 있으니까.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사계에선 1주년 행사를 하고 있고, 나는 어김없이 여기서 맥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있다. 내가 언제까지 술을 마실지, 이태원을 드나들지는 모르겠다만 이 곳이 오래 가길 바랄 뿐이다.

술이나 마시자. 건배.

우리는 영원한 챔피언

2014년 11월 12일

밀란 쿤데라의 말마따나 오래된 친구는 과거 우리의 거울이자 기억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만나 근황을 털어놓다 이내 옛날 일을 회상하며 웃고 떠들고. 결국 옛친구를 만나는 건 예전 나를 비추던 거울을 이따금 윤을 내고 관리하는 거 아닐까?(1)

며칠 전 연극 “우리는 영원한 챔피언”을 보고 든 생각들이라. 극에선 중년의 옛 고등학교 농구부 친구들이 모여 찬란했던 과거를 회상한다. 우승컵 앞에서 그들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이야기를 되풀이한다. 서로를 이용하기 위해 정치적인 음모가 난무하는 가운데 그들을 묶어주는 건 우승컵이라는 과거의 유산이었다.

우승컵이 상징하는 것은 과거 뿐만이 아니라 극의 인물들이 여태 살아오면서 가져왔던 가치관이다. 이기고 얻으면 모든 게 좋다는, 승리 제일주의의 기념품. 노인이 된 농구 코치는 그들이 분열될 때마다 우승컵을 가리키며 우리는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며 연설을 늘어놓는다. 사람들은 마법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을 괴롭히는 것은 높디 높은 목표를 추앙하는 가치관과 현실과의 간극이다. 자신들에게 맞지 않는 외피를 품고 살아 오다 아직 살 날도 많이 남은 40대에서야, 지금까지의 삶이 허구였으며 무너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다시 시작할 계기도 의지도 없다.(2)

왜 그럴까? 극은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등장인물들의 어린 시절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모두 아버지의 부재를 암시한다. 부모와 적절한 관계를 맺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은 농구 코치를 ‘대리’ 아버지로 삼는다.(3) 코치는 ‘대리’ 아버지로서 그들에게 외형에만 집착하는 성공제일주의를 주입하고 조정한다. 그럼 코치는 본받을 만한 인물인가? 아니다. 그 또한 대공황에 쓰러져 버린 아버지 대신 루즈벨트 전 대통령을 영웅시하고 반 유대주의 매카시즘 등 여러 편견에 찌든 사람이었다. 자신의 편견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투영하고 제자들은 그 가치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셈이다.(4)

어떤 가치관이 체화된 이후 처절한 자기 반성 혹은 방황의 시기를 겪지 않고 묻어 두다가 큰 위기가 닥쳤을 때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할까? 극의 내용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을 향해 달려 가는 것이 우선이고 거기서 낙오된 이들은 바로 죽음까지 내몰린다. 성공한 이들도 편한가? 아니다, 낙오되지 않도록 계속 노력해야 하고 채찍질을 해야 한다.(5) ‘프로’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모두가 피곤하고 지치며 삶의 의미는 사라진다.

연극 “우리는 영원한 챔피언”은 그저 무너져가는 자아를 대충 봉합하고 지나치는 사람들을 예리하게 그려낼 뿐이다. 작가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주입되어 왔던 세상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자신을 감싸고 있던 알을 깨고 나와 정체성을 형성하라.

(1) <정체성>, 밀란 쿤데라
(2)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저)에서 자기밀도, 역할밀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살아오는 동안 성찰이 부족한 상태에서(자기밀도 저하)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하다(역할밀도) 위기가 오면 그만큼 극복하기 힘들다.
(3)(4)<남자의 탄생>, <애완의 시대>에서 일부 내용 인용
(5)<거대한 사기극> (이원석 저)에 의하면 이런 자기 계발의 풍조는 윤리적 패러다임으로 분류할 수 있다.

브람스, 굴드 그리고 산책

2014년 11월 10일

가을에 어울리는 음악이라면 으레 브람스를 꼽곤 한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그의 비교적 후기작에서 볼 수 있는, 텁텁하면서도 쓸쓸한 느낌이 가을에 맞아서 그런 거 아닐까?

점심마다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다녀온다. 원래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걸 좋아하진 않다만, 갑자기 브람스가 듣고 싶어져 이번 산책엔 굴드의 연주로 브람스의 간주곡을 들어본다. 가을이니까.

굴드의 연주에선 앞서 말한 그 텁텁하면서도 쓸쓸함을 느끼기가 힘들다. 아주 여리고 툭 건들면 깨질 것 같은 유리 세공품을 연상케 한다. 약간은 신경질적인 우울함도 들리네.

이게 언제 녹음이었더라? 1961년, 그러니까 그가 한국 나이로 서른 줄에 들 때 이 곡을 녹음했다. 60에 가까운 브람스가 쓴 작품을 서른 살 피아니스트가 연주한다.. 어색하면서도 어울리네.

말이 안 되는 소리인 듯하나, 브람스와 굴드의 삶은 꽤 닮았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음악 활동을 했으니까. 그들의 삶을 거칠게나마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고독했지만 자유로웠다”

내가 한 말은 아니고, 브람스의 작품 중 바이올린 소나타의 제목이 저거다. “Frei aber einsam” 자유롭게 그러나 고독하게. 그래도 난 이렇게 바꿔 말한다. 근사하거든. 고독하지만 자유로웠다.

묘했다. 굴드가 지금의 나랑 같은 나이 때 연주한 브람스의 곡을 들으면서 걷다니. 시공간을 넘어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 같더라. 나의 착각이겠지만 말이야.

궁금했다. 굴드가 죽기 직전에 브람스 녹음에 매달렸다 하는데 어떤 음악이었을까? 몇몇 단절된 녹음 테이프 자료가 남아 있지만 그가 끝내 가공해서 만든 소리는 아니었을 테니 알 수가 없다.

뭐, 음악이나 듣자.. 이러며 걷다 보니 어느새 산책은 끝나가고, 굴드의 연주도 끝난다.

브람스, Intermezzo in E-flat minor, Op. 118, No. 6 – 글렌 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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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나였어..

2014년 11월 5일

사계에서..(2)

최근에 펍들을 소개하는 책이 하나 나왔더라. 거기엔 재미있는 사진이 실려 있지. 이태원의 어느 펍을 찍은 사진 말이야. 바의 구석 자리를 보면 익숙한 실루엣이 있어. 혹시 다른 사람이 아닐까 싶었지만, 다음 사진엔 그 사람의 가방이 의자 위에 올려져 있는 거야. 확인 사살이지. 허참, 책에 그렇게 실리다니 웃기지 않아? 한적한 펍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다 들킨데다 사진까지 찍히다니. 주말 낮부터 무슨 일이 있어 술을 마시고 있었을까? 그나저나 무서운 사실 하나 알려줄까?

그게 나였어..

사계에서

2014년 11월 3일

사계에서..

바에 앉아 병맥주를 주문했다. 잔과 병을 받고 멀뚱히 있다가 병따개 좀 달라고 했다.
에이, 이 자리에 앉는 분들은 주머니에서 자기 병따개를 꺼내 따야죠!
난 그런가?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주머니에서 내 병따개를 꺼내 뚜껑을 땄다.
이제 되었습니까?
음, 그냥 농담이었는데요..
분위기가 약간 어색해졌다.
전 개그를 다큐로 받는 단점이 있답니다..

해녀


바다에 가 보면 어떨까, 싶을 때가 있다. 자유와 일탈을 꿈꾸며 기분 전환이랄까 작은 도피처라도 되는 마냥, 바다를 보며 바람을 맞으며 외친다. 시원하다.

바다가 터전인 사람들이 바다를 파도를 볼 때 어케 생각할까. 지겨울까, 아님 세월호처럼 인명을 꿀떡 삼키는 바다를 보면서 절망할까. 문득. 서늘하다.

“해녀”에는 바다, 그 곳에서 살고 있는 해녀들의 소리가 담겨있다. 귀를 먹먹히 때리는 바람소리, 비애를 퉁치며 넘어가는 민요 ‘이어도사나’. 그리고 해녀들이 바다에 깊숙히 들어갔다 가쁘게 내쉬는 ‘숨비소리’. 이 모든 게 어우러져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물흐물해진다. 화면이지만, 바다를 보다 익숙치 않은 느낌이 든다. 오싹하다.

미카일 카리키스의 <해녀>를 보고.

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4
<귀신, 간첩, 할머니> (2014.9.2~11.23)
서울시립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