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된 거다.

2014년 9월 28일

어떤 이에게서 내가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 새로운 곳에 입사한지 한 달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내 취미생활 다해가며 여행까지 다녀서 그런가? 사실, 웬만하면 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아니 다시 말해 어떤 대상에 대한 기대치가 없다시피 한 편이다. 누구든 ‘그래 이만큼은 되어야 하지 않겠어?’ 이런 기준이 있겠다만, 난 매우 낮다.

어떤 상대라도 쓰여진 계약서를 지키면 좋아하고 아니면 집어치우고 나온다. 좋은 차를 가져야겠다거나 비싼 옷을 입어야겠다는 둥 물질에 대한 선망은 없다. 술이 무엇이든 취하면 좋고 지금 읽는 책이 재미있으면 그 또한 좋다. 아무 약속 없는 주말을 다시 맞이해도 어차피 난 혼자였기에 아쉬워할 일도 없고, 게다가 난 혼자 잘 놀기 때문에 시간을 즐겁게 보내면 된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 한잔 마시면서 책을 읽고, 출근하고 침놓고, 퇴근해서 공연을 보거나 펍에 가서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떤다. 자취하니 아무도 나에게 뭐라 할 사람도 없다. 대체 스트레스를 왜 받지? 아, 물론 다른 이에게 나를 비추어 뭔가 결핍된 것을 찾아내어, 나 또한 매우 부족하니 그런 것을 채워야겠어, 이런 자각 비슷한 걸 할 수 있겠지.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걸 고개 한 번 까딱하고 넘어간다. 맞아요, 당신은 뭔가 잘해요, 여친이 예쁘군요, 혹은 돈이 많아요, 차가 멋져요, 좋겠군요. 그런데 저랑 무슨 상관이죠?

미래에 희망을 걸지 않고, 과거에 집착을 버리고, 이 순간이 좋으면 좋은 거다. 그리고 난 이 순간이 좋으니까, 그럼 된 거다.

진료하다가..

2014년 9월 9일

오늘 진료하다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간 글귀들.

그 두 사람에게선 불행한 사람들의 에고이즘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불행한 사람들이란 이기적이고, 심술궂으며, 불공평하고, 잔인한데다가, 어리석은 사람들보다도 서로를 이해할 줄 모르는 법이다. 불행은 사람들을 화해시키지 않고 떼어놓으며, 사람들이 동일한 슬픔으로 결속되어야만 할 것처럼 여겨지는 부분에서도, 비교적 행복하고 만족한 사람들에게서보다 훨씬 더 많은 불공평함과 잔인함을 낳는다. – <적>, 안톤 체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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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토대는 사유가 아니라 고통, 즉 감정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감정인 것이다. 고통을 당할 때는 고양이조차도 상호 교환이 불가능한 자신의 유일한 자아를 의심할 수 없다.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세상은 흔적 없이 사라지며, 우리들 각자는 자기 자신과 홀로 남는다. 고통이야말로 자기중심주의의 위대한 학교인 것이다. – <불멸>, 밀란 쿤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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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이들이란 지나간 시절의 고통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또 그 고통으로 하나의 박물관을 만들어 사람들을 초대해 대는 습관을 통해 식별된다. (아! 하지만 그 슬픈 박물관엔 방문객들이 거의 없다.) – <이별의 왈츠>, 밀란 쿤데라

과잉의 멋

2014년 9월 2일

분당 집에 들어간 지 벌써 한 달 정도 되었다. 다시 말해, 가족들 얼굴을 본지 한 달 정도 되었다. 매일 식사할 때쯤 어머니에게서 카톡이나 전화가 온다. 방금 집에서 이런 요리를 했단다, 밥은 챙겨 먹었니? 물론. 아뇨, 오늘 한 끼도 제대로 못 먹었어요. 좀 있다 순대국이나 먹으려고요. 아이고, 그런 거 먹으면 안 돼. 그 때마다 어머니가 만든 요리들 사진이 날라온다. 군침 도네.

어머니의 요리에는 과잉의 멋이 있다. 무슨 말인고 하면, 같은 조리법이라도 재료를 무한 투하하여 균형이 깨지긴 했는데 그 특유의 맛이 매력적이다. 홍합 파스타를 예로 들어보자. 파스타이니 면이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홍합이 너무 많아 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 그게 바로 과잉의 멋이다. 연어 샐러드? 연어 살 사이에 껴 있는 양상추를 집어먹는 재미가 만만치 않지. 다른 이라면 먹다 배불러 할 텐데 나는 그 모든 걸 맛나게 먹고 어머니는 내 모습 보는 재미에 또 해주셨다. 내가 아주 뚱뚱했을 때, 어머니께선 그러셨지. 너의 그 두터운 살은 비싸게 찌운 살이란다.

분당 집에 들어간 지 벌써 한 달 정도 되었다. 다시 말해, 집 밥을 먹어 본지 한 달 정도 되었다. 먼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들어갈 기회가 없는 건지. 토요일 퇴근해서 놀다 자다 정신차리면 자취방이고, 집 가기엔 시간이 애매하고. 방금 어머니에게서 카톡이 왔다. 오징어 순대를 했단다. 오징어가 터질 정도로 속을 채운 모습. 역시 이게 집 밥이지. 추석 연휴엔 꼭 집에 들어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