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2014년 7월 31일

그 순간 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맺고 있는 우정의 유일한 의미를 깨달았어. 우정이란 기억력의 원활한 작용을 위해 인간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이야. 과거을 기억하고 그것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마도 흔히 말하듯 자아의 총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거야. 자아가 위축되지 않고 그 부피를 간직하기 위해서는 화분에 물을 주듯 추억에도 물을 주어야만 하며 이 물주가가 과거의 증인, 말하자면 친구들과 규칙적인 접촉을 요구하는 거야. 그들은 우리의 거울이야. 우리의 기억인 셈이지. 우리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란 우리가 자아를 비춰볼 수 있도록 그들이 이따금 거울의 윤을 내주는 것일 뿐이야.
………
만약 당신이 증오의 대상이 되고 누명을 쓰고 사람들의 먹이가 된다면 당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두 가지 반응을 기대할 수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당신을 뜯어먹으려는 부류에 합류하러 갈 것이고 다른 쪽은 점잖게 못 들은 척할 거에요. 물론 당신은 그들과 만나 대화할 수 있을 거에요. 점잖고 조심스러운 이러한 두 번째 범주가 당신의 친구에요. 현대적 의미에서의 친구죠.

-, 밀란 쿤데라

책정리하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들쳐봤다. 몇년 전에 접고 밑줄친 흔적들. 음, 지금 읽어도 공감가는 게 왜 이렇게 많을까?

밤중에 우엘벡

2014년 7월 28일

사랑이 끝나는 것은 싫증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싫증은 안달에서, 자신이 언젠가는 죽으리라는 것을 아는, 그래서 살길 원하는, 그들에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시간 속에서 조금의 운도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는, 어떠한 가능성도 달아나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는, 한정되고, 쇠퇴해 가고, 보잘것없는 그 삶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하는, 그리고 다른 모든 삶이 한정되고, 쇠퇴해가고, 보잘것없다는 것을 알기에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몸들의 안달에서 생겨난다.

-<어느 섬의 가능성>, 미셸 우엘벡

잠자는 남자

그러니까, 네 어린 시절의 요강에서 네 노년의 휠체어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자들이 여기 있는 것이며, 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네 모험들은 너무나도 잘 서술되어, 가장 과격한 반란조차 그 누구의 눈썹도 찌푸리게 만들지 않는다. 너는 거리로 내려가 사람들의 모자를 덥석 뺏어들어 내동댕이치기도 할 것이고, 오물로 네 머리를 뒤집어쓰기도 할 것이고, 어떤 찬탈자는 지나는 길가에 대고 맘껏 총질도 해보겠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네 침대는 사회 보호소의 공동숙소에 벌써 마련되어 있고, 네 식기는 저주받은 시인들의 식탁 위에 놓여 있다.
..
도로 내려와야만 할 진대, 네가 왜 가장 높은 저 언덕의 정상에 기어오르려 할 것이며, 일단 내려온 후, 어떻게 거기를 오리기 시작했는지를 주절거리며 네 인생을 보내지 않으려면 너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왜 너는 사는 척을 하는 것인가? 왜 너는 무언가를 계속하려는 것인가? 네게 일어날 모든 일들을 너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잠자는 남자>, 조르주 페렉

술 먹다 농담 삼아 내 자신을 ‘활동적인 비관주의자’라는, 어긋난 말로 소개하곤 하는데 아마 그 배경의 상당한 지분은 조르주 페렉이 가지고 있을 거다.

경상도 생활을 접다.

2014년 7월 27일

요 몇 년간 하도 이사를 많이 다니다 보니 이제 서울로 올라오려는 채비를 하는 것도 전혀 힘들지 않다. 이젠 그만 떠돌고 정착 좀 해야 할 텐데. 포항에 몇 개월 있었지만 쌓인 책들도 만만치 않네. 일단 택배로 짐을 부쳐야 할 것 같다. 마지막 남은 관문은 이제 고물차 레조를 몰고 집으로 가는 건데, 따지고 보면 레조가 3년 만에 경상도를 떠나는 셈이다. 1999년 식으로 이런저런 잔고장 때문에 속을 많이 썩였지. 집에 가져가면 어찌할지도 고민 중이다. 폐차 시킬까? 레조와 동고동락을, 심지어 생사를 같이 할 뻔한 일들이 아직도 생생하구나.

서울 자취방은 일단 합정 근처에서 잡기로 했다. 이태원과 직장과의 정확히 중간 거리라, 하하. 합정과 상수역 사이의 한적한 주택가들을 막 뒤져보고 있다. 두 군데 미리 연락을 넣어뒀다. 다른 한 곳은 홍대 입구 쪽인데 그 시끄러운 거리에서 무려 1층이라 별 기대는 안하고 있다. 월세가 가장 싸긴 한데, 주말에 방을 볼 때 만약 괜찮다면 고민을 해봐야겠다. 치안이나 이런 건 상관없고, 내 짧은 취침시간만 방해받지 않으면 된다. 내 생활 패턴을 따져보면 어차피 방에서 잠만 잘테니 굳이 비싼 방은 없어도 될 듯한데. 매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사니 자취방이 지저분한 창고밖에 더 되겠나. 사람 사는 방으로 꾸며 보고픈 욕망도 있다.

사계 사장님이 이러다 알콜 의존증이 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시던데, 사실 나도 걱정이다. 지금껏 저지른 일만 봐도 충분히 알콜 중독이니 말야. 한 번에 마시는 맥주 주량을 줄이고 마시는 속도도 늦춰야 할 것 같고. 자취방을 이태원과의 거리에 가늠해서 결정한다는 것도 비정상이잖아. 뭐, 머리로만 알고 몸이 따라주질 않아서 문제다만. 이 문제는 주말에 맥주를 마시면서 고민해봐야지. 난 안 될 거야, 아마.

정식 출근 전에 여행을 좀 다녀오고 싶다. 그렇게 돌아다녔음에도 또 여행가고 싶네. 이번에도 통영을 갔다 올 것 같다. 예전에 예매해둔 이자람 창작 판소리는 취직 때문에 못 볼 거고, 그 전 주말에 하는 고상지 밴드의 탱고나 들을까? 탱고 들으러 400km 이동하는 것도 이상하다만, 여태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참 신기해. 군 제대하고 한두 달 놀 거라 각오했는데 바로 취직되고, 일 그만 두고 한두 달 놀 거라 예상했는데 금방 일자리를 구하고. 어서 서울로 올라가서 지하철 타고 출퇴근하는 삶을 살고프다. 기차 타고 방랑은 이제 끝이겠지?

Face to Face

2014년 7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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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씩 방 안에 앉아 질문을 받는다. 질문이 끝나면 이 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인적사항, 시민단체 가입 여부 등등을 묻고 마지막에는 촬영에 대한 동의를 구한다. 나는 거절했다. 이제 일어나 돌아다니면 된다. 아까 자유롭게 돌아다니라 했잖아. 묘하다. 옛 서울역의 문은 닫혀있고 창문 바깥에선 누군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문화역서울284에서의 공연”공간을 깨우다- Face to Face”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20세기 초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을 이 공간의 속성만 따지고 보자면 개방 그 자체라 할 수 있겠다만, 공연은 폐쇄를 지향한다. 사방이 막혀 있는 옛 서울역이라.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1층, 2층을 돌아다니는 것뿐이다. 여기저기 CCTV와 감시요원이 우리를 지켜본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를 외치며 여행을 다니고 그 순간을 찍어 SNS에 올리지만, 자유는 본질적으로 불안하다. 무정부 상태의 자유, 우범 지대에서의 자유는 어떤가? 차라리 CCTV가 설치된 밤거리를 ‘자유’롭게 걷는 게 훨씬 편안하지 않은가? 어쩌면 나에게 허용된 자유는 단 하나, 지갑을 꺼낼 자유일지도 모르겠어. 노래를 흥얼거리며 옛 서울역을 둘러본다.

대한민국은 자유국가 / 민주국가 평등국가라고 말하지만 / 우리는 맘대로 웃고 / 행동하며 소리칠 수도 없는걸 / 자신은 자유롭다 생각하겠지만 / 아빠의 허락 속의 자유일 껄 / 권력자는 제도를 조종하고 / 그 제도는 우릴 억압하지 – <좆 같은 세상 갈아 엎어요>, 김태춘

서울역 앞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정치적인 거리이다. 누군가 자신의 뜻을 피력하기 위해 피켓을 들고 집회를 연다. 경찰들은 감시 혹은 보호를 하기 위해 그 주위를 둘러싼다. 그런 유구한 역사를 반영한 걸까, 2층에 닫힌 방 안에선 으스스한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맞고 문을 두드린다. 여기서 가까운 남영동 대공분실을 재현한 건가?

2층의 홀에는 아까 우리를 감시하던 보안 요원들이 조각상처럼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감시의 주체가 감시의 대상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시간이 지나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들 제자리로 돌아간다. 1층의 복도로 들어갈 때 놀랐다. 내가 조각상 포즈를 취한 요원들을 보는 게 찍힌 장면이 재생되고 있는 거 아닌가? 내가 엿보고 있다고 생각할 때조차 누군가 나를 엿보고 있었다.

공연에 앞서 질문을 받았던 방 안에 들어가고선 기절초풍했다. 촬영에 대한 동의를 구할 때 거절했건만 내 모습이 노트북에서 떠있었다. 내가 거절이라는 선택의 자유를 누린다 느낄 때도, 김태춘의 노랫말처럼 ‘아빠의 허락 속의 자유’였다.

‘장소 특정적 공연’이란 걸 처음 접해봤는데 이런저런 생각 거리를 던져 주었다. 연출가 트리스탄 샵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형태의 공연이란다. 개방적 공간인 서울역을 폐쇄된 정보 기관으로 바꿔버린 그의 발상은 꽤 참신했다. 수많은 창을 가진 건물을 닫아버리니 열린 것 같으면서도 내가 숨을 곳은 없는, 불안을 주는 공간으로 재탄생한 옛 서울역. 완성된 형태의 공연은 어떨까 궁금하다.

아트플랫폼2 – 공간을 깨우다  <Face to Face>
문화역서울 284, 트리스탄 샵스 연출 (2014.7.19)

백수가 되다.

2014년 7월 21일

엄마, 조만간 백수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왜? 여기 그만 두고 집으로 올라가려고요. 다음 직장은? 이력서는 몇 군데 넣을까 생각 중이에요. 안 되면? 그럼 놀아야죠 뭐.

내가 너무 태평하게 말했나 보다. 그래도 마음 먹고 있던 거였고, 어차피 일어날 일이면 미리 부모님한테 알리는 게 좋을 듯해서. 물론 일방적인 통지지, 의논을 할 생각은 없었다. 부모님은 그냥 다니라 하실 거니까. 내 월급을 다른 이들과 비교하며 좋아라 하시다, 덜컥 그만두고 집으로 올라간다고 하니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는가?

허나 이 시기에 주중 5일을 포항에서 보내는 건 인생의 낭비이다. 하고 싶은 삽질과 잡다한 공부의 기회가 서울에 쌓여 있는 터라, 평일 저녁에 그냥 책만 읽으며 지내려니 좀이 쑤신다. 지금 사직서를 쓰고 나오면 남는 건 여전히 몇 줄에 불과한 이력서이겠다만, 그깟 종이 쪼가리의 공백을 두려워한다면 뭘 할 수 있겠는가?

아마 부모님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지. 나와 부모님의 가치관이 다름을 알고 서로를 존중하며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게 필요하겠다만, 같은 집안에서 산다면 그런 것도 어려울 것 같다. 이제 자취하는 것도 익숙해졌으니 서울 안에 자취방을 구해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 공덕 정도면 괜찮을 듯한데 말이야.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딱 하나가 있다. 서울로 올라온다면 내 레조를 끌고 와야 하는데 다 부숴져 가는 고물차가 장거리 운전을 버틸 수 있을까? 하하.

이태원, 공덕 쪽 원룸 시세 아시는 분 정보 좀 부탁 드립니다. 몸만 누일 수 있는 공간이면 괜찮습니다.

빨래

2014년 7월 20일

어제 본 바리abandoned 공연이 아직도 머리에서 맴돈다. 판소리가 이렇게 단가의 형식으로 위로의 메시지를 건넬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언제나 라이브가 낫다, 매번 하는 말이다만 어제는 정말 대단했지. 전반부는 다소 무겁고 침잠하는 분위기였다면 후반부는 “빨래”로 시작하여 아주 신명 나는 무대였다. 뭐, “빨래”를 찬찬히 뜯어 보자면 그리 유쾌한 내용은 아니다. 얼룩덜룩 때가 묻은 이들을 따뜻하게 감싸는 노래랄까? 나름 판소리 무대를 찾아본다 자부하는 편이나 어제 무대는 진정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공연이었다.

빨래 – 바리abandoned (한승석&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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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느라 부대껴 갖은 때에 절어
사느라 자욱이 온갖 냄새 절어
거리로 나서는 그대
집으로 돌아오는 그대
그대가 벗어놓은 한 겹의 허물
그대가 묻혀오는 뜬 세상 먼지
얼룩덜룩, 구질구질, 시큼시큼
꾸덕꾸덕, 때에 절고
냄새 배어 남루해도
아이야 괜찮다, 괜찮고 말고
먼지 자욱한 뜬 세상
허물 없는 목숨이 어디 있으랴

사는 일 구질구질 냄새 나고 더럽다고
울지 마라 아이야, 괜찮다.
살다 보면 얼룩덜룩 때도 묻는 것
살아있으니 이럭저럭 때도 타는 것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 미네티

바람아 불어라, 너의 뺨이 터지도록! 세차게 불어라!
-<리어왕> 중 3막 2장, W.셰익스피어

어느 호텔에 도착한 노인. 자신을 배우라 소개하며 그 도시의 시립극단 관계자를 기다리겠다고 한다. 마지막 공연으로 “리어왕”에 출연하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극단 관계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노인은 주위 사람들의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기다린다.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 미네티”의 시작이다. 오지 않는 이를 기다리는 고독함, 그리고 옛 전성기의 흔적조차 찾기 힘든 초라한 행색. 실제로 주인공 미네티는 리어 왕의 처지와 비슷한 셈이다. 그래도 그는 물러서지 않는다. 폭풍우가 불 때마다 그는 리어왕의 대사를 읊조린다. “바람아 불어라, 너의 뺨이 터지도록! 세차게 불어라!”

저 대사는 운명과의 전쟁에 앞서 내놓는 당당한 출사표일 수도 있고, 아니면 혹독하게 무너지는 자아의 마지막 외침일 수도 있다. 글쎄다, 미네티가 저 대사를 말할 때 무슨 심정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둘 다 아닐까? 그리고 주목할 점은 바로 가면의 존재이다. 화가 앙소르가 만들어줬다던 리어왕 가면을 가방에 넣어두고 항상 곁에 놔두긴 하지만 꺼내진 않는다.

극에서 주위 사람들은 자유자재로 가면을 벗었다 쓰면서 미네티를 놀린다. 왜 그도 남들처럼 가면을 쓰고 행렬에 동참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본 모습을 끝까지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니었을까? 그는 미네티이면서도 곧 리어 왕이었다. 아마 미네티의 마지막 목표는 “리어왕” 출연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다른 이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올곧게 진심을 다해 살아내기’이었을지도.

사실 이 공연은 특별했다. 여든의 노배우 오순택님이 미네티를 연기하고 그의 제자들이 교대로 출연하는 ‘헌정 공연’이었다. 근사했다. 연극의 등장인물과 실제 인물이 이리도 비슷하다니.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 미네티”의 결말은 비참했지만, 막이 내리고 나서 돌아온 현실은 훈훈했다. 공연 자체도 훌륭했지만 이렇게 외적인 요소로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은 드물 듯하다.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 미네티>, 충무아트홀 블랙
토마스 베른하르트 작, 이윤택 연출, 연희단거리패 제작
(2014.7.12~19)

나, 나 그리고 나.

2014년 7월 17일

당직이 있는 밤은 언제나 독서 잠재력과 온갖 망상이 폭발하는 시간이다. 여러 권의 책을 병렬 독서하며 동시에 페이스북을 들여다 본다. 그러다 잠시 눈이 머무르는 책이 있다. 아는 교수님이 쓰신 “살 빠지는 사람은 따로 있다” 책 내용은 주로 다이어트를 다루고 있고 특별한 건 없다만 내 예전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글을 끼적인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가족 식비의 대다수를 점유하는 먹보였다. 엄마는 언제나 내가 먹는 양을 염두에 두고 푸짐하게 음식을 마련하셨고 나는 그걸 또 먹어 치웠다. 5살 때까지는 참 귀여웠다는 전설이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통통하다를 넘어 뚱뚱하다라는 소리를 많이 듣게 되었다. 초중고등학교까지 체중은 완만한 상향 곡선을 그리다가 대학교 때 급가속도가 붙었다.

남들은 대학 들어가서 치장을 하고 살도 뺀다는데 나는 그 모든 것에 무관심하였다. 끼니 때 피자 패밀리 사이즈 한 판을 뚝딱 먹어 치우는 건 예사요, 방 안에 틀어 박혀 음악을 들으며 컴퓨터를 만지작거렸다. 게임을 하다 급기야 게임 서버를 운영하고 하드웨어 벤치마킹하고, 웬만하면 장시간 앉아 자꾸 뭔가를 건드렸다.

부모님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대체 쟤는 뭐가 되려고 저러나. 체중은 130kg를 찍었지만 여전히 생활 패턴은 변하지 않았다. 아, 이제 기억난다. 본과 3학년 때 앞서 언급한 책을 쓰신 교수님이 나를 호되게 나무라셨다. 네가 의사가 될 수 있겠냐고. 그래도 난 초지일관이었다. 어느덧 본과 4학년, 졸업반이 되고 나서 아는 동기 형이 살 좀 빼보라고 약을 건네 주셨다.

약만 먹었는데 체중이 4kg정도 빠진 거라. 신기했다. 물론 지금 냉철하게 판단해보면 수분량이 빠진 것이지만 그 땐 멋도 모르고 약만 먹었다. 역시 한계는 금방 왔다. 변화는 없었고 나는 결단을 내렸다. 빼는 김에 확실하게 빼보자. 예전의 내 모습을 알던 사람들은 아직도 자꾸 묻는다. 어떤 계기로 살을 뺐냐고. 혹시 여자? 난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런 거 없고 그냥 빼고 싶었어요.

하루 세끼 내내 닭가슴살 100g, 고구마 80g, 양배추와 방울 토마토를 먹었다. 하루 섭취 총 칼로리량이 600칼로리 남짓한 초저열량 식단인 셈이었다. 말이 600이지 그냥 굶는 거지. 그 때 마침 2010 남아공 월드컵이라 밤마다 사람들은 맥주와 치킨을 먹는데 나는 옆에서 파프리카를 씹고 있었다. 게다가 국가고시를 준비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느라 남들은 먹는 양이 는다는데 나는 굶고 있었다.

여튼 그렇게 3개월 정도 지나니 온 몸이 말라가는 게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다. 도 닦는 게 이런 느낌이랄까, 안 먹으니 몸과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결국 60kg까지 찍었다. 바지 사이즈가 44에서 30으로 줄었고 주위 사람들은 나를 걱정스레 쳐다봤다. 혹시 어디 아프냐고. 체지방 검사를 해보니 아주 다행히도 근육량엔 변화가 없고 지방만 60kg이상 빠졌더라. 지방 60kg. 좀 뚱뚱한 중학교 여자아이 만한 지방덩어리가 내 몸에서 나간 거야, 글쎄.

살 빼고 나서 생활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옛날엔 계단 조금만 올라가도 죽겠더만 이젠 하늘을 날라 다니고 있었다. 그렇다. 그 가벼운 몸을 가지고 전국 유랑을 시작한 게 살 빼고 나서였다. 대체 쟤는 뭐가 되려고 저러냐 걱정하시던 부모님은 이제 집에 좀 들어와서 밥 좀 챙겨 먹으라고 붙잡으신다. 묘하다. 이런 극단의 경험을 하기 쉽지 않을 텐데.

살 빼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살이 더 찔까 안주를 먹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20대 후반에 음주를 배우다니. 뭐, 요즘엔 술 살도 붙고 가슴도 나오고, 몸무게는 85kg 정도이지만 개의치 않는다. 그런데 요즘 주위 사람들이 살 빼야 하는 거 아니냐고 조금씩 야그를 한다. 바지 사이즈 32입어서 참 좋구만. 그 지긋지긋한 걸 또 해야 하나 싶고, 살 빼봤자 안 생기고 ASKY, 술 안 마시면 무슨 낙으로 사나?

말이 길어졌네. 옛 사진 모음집을 첨부한다. 우측 상단이 내가 가장 탐스럽게 피어 올랐을 때이고, 우측 중간은 60kg아래로 떨어졌을 때이다. 좌측 상단은 옛날 나라고 하는데 뉘신지? 아래로 갈수록 살찌는 게 눈에 보이네. 책 읽다 웬 다이어트 수기를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흑역사라고 불러도 좋다. 예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 똑같지는 않지만 많은 것을 공유하는, 연속된 자아이다. 따라서 나는 예전 터질 것 같은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저 사진의 뚱한 인물 또한 나 자신이니까.

결혼으로 보는 불확실한 세상에서의 의사 결정

2014년 7월 16일

요즘 주위 사람들이 나를 보면 꼭 한 마디씩 하고 싶어한다. 거의 아버지 뻘 되는 신경외과 과장님께서 말씀을 시작하신다. 이제 짝을 찾아야지. 그럼 다른 분들도 이야기에 뛰어들고 어느새 주제는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 할 것인가로 고정된다. 유부남이든 총각이든 할 말이 많은 주제인가 보다. 수많은 개인적 경험담을 듣고 있다가 내가 질문을 툭 던졌다. 확률 통계로 풀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최근에 읽은 게르트 기거렌처의 “지금 생각이 답이다”이 문득 떠오르더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인생의 중차대한 문제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책에서는 다윈의 이야기를 예로 꺼내 든다. 다윈은 ‘결혼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하여 고민하다 종이에 세로선을 긋고 결혼해야 할 이유와 결혼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나열하기 시작했단다.

결국 다윈은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아마 그는 ‘극대화’를 사용했을 것이다. 결혼의 장단점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효용) 추정하고, 각각의 일이 실제로 벌어질 확률을 계산한 다음, 결혼해야 할 이유별 확률에 효용을 곱해 값을 구한다. 마찬가지 절차를 ‘결혼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도 실시하여 기대 효용이 높게 나온 것을 선택한다. 이것은 주관적 기대 효용 이론으로, 기본적으로 우리가 위험을 알거나 추정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벤저민 프랭클린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결혼으로 고민하는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 안에서 이런 방법을 제시했단다. 종이를 나눠 양쪽에 결혼의 장단점을 나열하고 장단점의 이유나 동기에 1,2,3점 등으로 가중치를 매기고 양쪽의 가중치가 같은 것을 지우기 시작한다. 그 중 남는 점수가 높은 쪽을 선택한다. 프랭클린의 대차대조표 또한 앞서 언급한 다윈의 방식과 비슷하다. 이 방식도 알려진 위험에 맞게 설계된 것으로 수학으로 풀어나가는 과정은 근사하나 불확실성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지금 생각이 답이다”에선 또 다른 예를 제시한다. 옛날 옛적 술탄 살라딘은 지략가를 찾던 중에 한 후보를 테스트했단다. 아름다운 여인 100명 중 왕국에서 가장 많은 지참금을 가져올 여인을 골라낼 수 있다면 그녀를 아내로 주겠다고 제안했단다. 여인들이 무작위 순서대로 방에 들어오고 남자는 그 자리에서 결정해야 한다. 남자는 지참금의 범위도 모르고 거절한 여인은 다시 부를 수 없다. 확률은 100분의 1에 불과하다. 저자는 ‘37퍼센트의 규칙’을 제안한다. 초반 37명을 내보내고, 현재까지 가장 높은 지참금 액수를 기억하여 그 다음에 나타나는 그보다 높은 지참금을 선택하기.

이 규칙은 승률을 100분의 1에서 3분의 1로 높인다. 확실하진 않아도, 남자가 아내도 얻고 관직을 얻을 확률이 훨씬 높아진다. 지나쳐 보내는 옵션의 수가 e분의 N으로 여기에서 N은 대안의 수(여기선 100)이고 e(근사치 2.718)는 자연로그의 밑이다. 그렇지만 이 방법도 허점이 있다. 내가 만날 이성의 숫자도 얼마가 될지 모르고, 사람들에게 ‘짝이 될 가치’를 물어볼 수는 없다. 그래도 이런저런 힌트를 던져준다. 전체의 10퍼센트는 부족하고, ‘최적의’ 37퍼센트를 따져라. 무슨 소리냐고? 여기서 ‘적정 만족 추구’라는 개념이 나온다.

불확실한 세상을 돌파하는 금언은 ‘적을수록 좋다’이다. 일단 열망 수준(aspiration level)을 설정한다. 열망 수준이란 만족과 불만족을 구분하는 주관적인 심리적 경계로, 열망 수준을 충족하는 첫 번째 대안을 선택하고, 더 찾아 헤매지 마라. 결론은 이거다. 최고를 찾는 대신, 적당한 선에서 만족하는 적정 만족 추구를 하라.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최고를 찾는 건 불가능하니까. 우연히 찾았다고 해도 그것이 파랑새인지 모른 채 지나칠 수도 있다.

직관의 힘을 이용하라는 건데, 언뜻 보면 직관을 믿지 말라는 다니엘 카네만의 주장과 대립되어 보인다. 그러나 위험과 불확실성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알려진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최선의 결정은 논리와 통계적 사고가 있으면 가능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위험’ 즉 불확실성이 있는 상황이라면 최선의 결정은 직관과 현명한 어림셈법까지 있어야 가능하다.

다시 다윈과 프랭클린으로 돌아가보자. 그들 모두 대차대조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바탕에는 어림셈법이 깔려 있었다. 어림셈법중 최선 유일의 규칙이 있다. 가장 중요한 근거(이유)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무시하라. 결국 다윈도 영원한 반려자를 원한다는 결정적 근거 하나만 고려했을 거다. 프랭클랜도 마찬가지 일거고.

이제 내 자신으로 돌아와서. 책 내용을 되새기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른 분들의 이야기 홍수 속에 침잠하고 있었다. 아버지 뻘 되는 신경외과 과장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제 짝을 찾아야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저는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하.

다닐 샤프란, 그리고 내 야그.

2014년 7월 15일

고등학교 시절, 야간자율학습을 째고 남들보다 학교를 좀 일찍 나와서 가는 곳은 항상 음반 가게 “라르고”였다. 라르고에는 작은 면적 안에 온갖 음악이 있었다. 그 구하기 어렵다던 빌 에반스의 마지막 녹음들, 마일즈 데이비스 전집, 절판된 히스토리컬 녹음 등등 음반을 구경하는 재미가 대단했다. 결국 요즘 내가 사계를 가는 것처럼 라르고를 갔다. 두 시간 정도 음반 구경하다 하나 집어 들고, 천천히 집으로 들어가 “오늘도 공부를 열심히 했구나!” 라는 부모님의 칭찬을 들었지.

라르고 사장님은 나를 미친 놈이라고 불렀다. 하긴 그럴 법도 하다. 누가 교복을 입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채로 거의 매일 음반 매장을 가겠는가?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나는 무슨 음반이 들어오는지 카탈로그로 파악하고 선주문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너 들었어? 예당에서 러시아 음악가들의 잊혀진 녹음을 발매한다네. 네, 그럼 주문 좀 해주세요. 웬만한 러시아 연주자들을 알았기에 뭔 녹음이 있나 카탈로그를 확인하다 한 이름에서 눈이 멈췄다. Daniil Shafran. 다닐 샤프란? 처음 보는 이름이네. 호기심이 동해 주문을 했다. 그 때 처음 접한 녹음이 바로 라흐마니노프의 첼로 소나타였다.

라흐마니노프 첼로 소나타 중 2악장 (피아니스트: 야코프 플라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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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까진 감정이 철철 흘러 넘쳐 오버하는 듯한 요요마의 연주를 최고로 쳤다만, 이건 완전히 정반대였다. 첼로 소리이긴 한데 뭔가 머뭇거리며 말을 한다 해야 하나, 그런데 듣다 보면 특유의 화법으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느낌이었다. 같은 러시아의 거장이었던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의 화려함과 개성과도 동떨어졌으나 계속 듣고 싶었다.

R. 슈만 어린이 정경 중 “트로이메라이(꿈)” (피아니스트: 안톤 긴즈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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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닐 샤프란은 망명이라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평생 러시아 국적을 유지하며 살았다. 그래서인가, 다른 러시아 연주자보다 지명도도 떨어졌고 나도 늦게 접한 것이었다. 이후에 구입한 소품집은 더욱 대단했다. 자신이 직접 편곡한 소품에 정성스레 숨을 불어넣는 연주는 듣는 이로 하여금 숨을 멈추게 했다. 다닐 샤프란 만의 소리. 딱 한 트랙을 꼽으라 하면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와 앞선 라흐마니노프 소나타를 두고 고민할 것 같다.

J.S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 (1971년 라이브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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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첼로 본연의 소리를 듣는다면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녹음을 고르겠다. 오케스트라나 피아노의 반주가 없더라고 뜨거워질 수 있고, 나중엔 훨훨 날아 오르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 녹음 마이크가 첼로에 다소 가까이 잡혀 거친 소리까지 기록되었다만 이런 것도 소중한 기록 아닐까 싶다. 아울러 멜로디야 레이블을 복각한 베토벤, 브람스, 프랑크, 슈베르트의 작품도 명반 명녹음으로 음악을 틀자마자 바로 샤프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덧. 최근에야 라르고 사장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이야기를 접해서. 추억과 같이 떠오르는 다닐 샤프란의 음악을 가지고 끼적여봤다..

하류지향

2014년 7월 9일

어려서부터 공부하는 게 정말 싫었다. 그 공부라는 건 문제 풀이로, 수학이야 공식 외워서 풀고, 과학은 주기율표 물리 공식 외워서 풀고, 국어야 작품의 특징을 줄줄 외워서 풀었지. 부모님은 매와 격려로 나를 자리에 앉히고 다독였다. 대학만 들어가면 이 지겨운 거 하지 않아도 된단다. 나는 그 말만 믿고 수능 한방 인생 한방을 중얼거리며 문제 풀이 기계로 변모했다. 그렇게 하여 대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끝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시험이 있었다. 외우고 또 외웠다. 어찌저찌 졸업하는가 했더니 국가고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생은 시험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깨달았다. 여전히 부족하나 그렇게 외운 걸 바탕으로 환자를 보고 처방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외운 것 또한 쓸모 없는 게 전혀 아니었다. 내 왕성한 호기심의 얇디 얇은 밑받침으로 남아 다른 분야의 책을 읽을 때 도움이 되었다. 그럼, 왜 나는 그렇게 공부를 싫어했을까? 돌이켜보면 수학 문제를 풀 때마다 이랬지. 내 인생에 집합이 도움이 될까? 무한은 웬 말이냐 이 시간이 무한 같구나. 수많은 수학자들이 인생을 바친 수학적 개념을 내 마음대로 가치 판단하고 있었다.

여태 뭔 소리를 하고 있냐면, 책 “하류지향”을 읽고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그렇다. 책에 따르면 배움이란 자기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모르고, 그것이 어떤 가치와 의미와 유용성을 갖는지도 말할 수 없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단다. 오히려 자기가 무엇을 배우는지 몰라서, 그 가치와 의미와 유용성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배움이 일어나는 동기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기가 말을 배울 때 그 유용성을 인식하고 그러니까 “음, 이걸 배워야 사회화될 수 있어!” 이러는 게 아니라, ‘그냥’ 배우는 것이다.

아, 이렇게 따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야, 너라면 50분 동안 그 지겨운 수업 듣고 있겠어? 아니잖아!’ 물론 아주 지겨웠다. 허나 여기서 파헤치고 싶은 건 지겨운 ‘이유’이다. 나는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왔다. 일어나면 어머니께서 밥을 챙겨 주시고 아버지가 주신 용돈으로 취미 생활을 했다. 요컨대 노동보다는 소비에 가까운 삶을 태어날 때부터 영위한 셈이다. 결국 소비 주체로써 교육을 하나의 서비스로 바라보고, 그것이 매력적이지 않은 상품으로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아까 말했듯이 배움은 시간이 걸리는, 꽤나 성가신 과정이다. 학생 시절에 내가 월 알았겠는가? 여태 소비란 돈만 주면 뭔가를 금방 얻을 수 있는 ‘무시간’적인 행위였는데 공부는 그게 아니잖아.(1) 남은 건 불평 타령이다. 그 당시 내가 알아온 가치에 근거하면 투입한 수고에 비해 효율도 형편없는 상품이었고 하자니 손해 보는 ‘거래’로 느껴졌다. 내가 단지 몰랐던 건, 교육의 기회는 결코 아무에게나 아무렇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학생은 이렇게 두 가지 길로 나뉘는데 나처럼 어쩔 수 없이 하거나, 아님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책 “하류지향”은 배움이 사고 파는 서비스로 전락되고, 이 모든 걸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니트족(2)의 탄생 과정을 다룬다. 여기선 그 중 몇 챕터를 가지고 내 경험에 비추어 끼적여 봤다. 뭐, 주입식 교육의 문제점 등이 생략되어 아쉽긴 하다만 신선한 해석이라 몰입해서 읽었네. 소비 주체의 시각으로 모든 걸 바라보기. 이미 우리는 ‘시간이 걸려야’ 얻을 수 있는, 많은 경험을 그렇게 보고 있지는 않은가?

(1) 경험을 돈으로 산다.. “나를 빌려드립니다”를 함 읽어보시길. 아래는 예전에 써둔 감상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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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부와 노동을 거부하는 사람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잉여라 할 수 있겠다.

배수의 고도

2014년 7월 8일

세월호 참사는 한국에 내재되어 있던 부패와 모순 등을 한 번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반복되었던 인재이면서도 어설픈 미봉책만 세우다 언젠가 잊혀질까 봐 우려가 되기도 하지. 게다가 이런 일이 있음으로 큰 불만이 쌓이고 그 에너지가 정치적 변화로 이어졌으면 좋으련만, 도무지 바뀔 낌새가 없는 정당들의 정쟁에 가려지고 있다.

지난 주말에 “배수의 고도”라는 연극을 봤다.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한국의 세월호 참사와 겹쳐 보이는 부분이 참 많았다. 일단 대지진 직후의 혼란과 갈등을 다룬 1부는 제쳐두고, 약 10년이 지난 후부터 시작하는 2부는 기시감마저 느껴졌다. 원전 반대를 내세운 야당이 정권을 잡았으나 경제 침체 때문에 공약을 뒤집고 원전 건설로 선회한다.

“배수의 고도”가 탁월했던 점은 진영 논리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목소리를 통렬하게 전달해주는 데에 있다. 전력 부족으로 기업들은 빠져나가니 혜택을 줘야겠고, 재생 에너지로는 충당이 안되니 결국 일본 정부는 경제 성장이란 기치 아래 원전을 다시 건설하려 한다. 방사능에 피폭된 이들의 극렬한 반대, 원전을 유치하려는 지방 현 의원의 찬성 등등 여러 의견들을 병치시키면서도 극은 단호하게 사람이라는, 생명의 가치를 내세운다.

사람을 생각하고, 안전을 우선시하면 좋은데 말이야, 그럼 돈이 많이 든다는 거지. 산업 경쟁력도 떨어질 테니, 반대파의 목소리를 묵살하고 원래 하던 대로 하자. 세월호 참사뿐 아니라 밀양 송전탑, 원전 건설 강행 등 많은 걸 생각나게 했다. 진정 대안은 없는 건가? 여태 뒤척였던 대안 경제 서적을 떠올리면서도 정작 정치적인 세력화에 실패하고 거대 양당들에 의해 흐지부지되는 거, 이조차도 익숙한 거라 힘이 빠졌다.

“배수의 고도”의 결말에는 대안 제시는 없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활극이 펼쳐진다. 하긴 그런 게 쉬운 일이 아니지 싶으면서도 약간 아쉽긴 하였다. 허나 작가는 여태 반복된 비극의 고리를 굉장히 예리하게 파헤쳐내는 통찰력을 보여줬다. 이런 작품을 거의 마지막 공연에서야 접하게 되다니 좀 아쉽군. 끝나고 일어날 때 자리를 뜨기 어렵게 만드는 극을 아주 좋아하는데 “배수의 고도” 또한 그 범주의 작품 중에서도 순위권에 넣어놓고 싶다.

u003C배수의 고도>, 나카츠루 아키히토 작, 김재엽 연출
(2014.6.10~7.5),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경상 방언

2014년 7월 7일

경상도 생활 4년 차, 요즘 경상도 억양이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오고 있다. 안동, 영주의 경북 북부 사투리에 기반하여 여러 억양이 섞인 정체 불명의 동남 방언을 구사한다. 분명 난 서울 명동의 백병원에서 태어나고 26년을 서울, 경기에서 살아 왔는데 말이야. 심지어 대구, 부산 출신 사람을 만나면 괜히 반갑고 그렇다. 내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서울말을 꽤 잘하는 경상도 사람이 된 것 같네.

일례로, 예전에 신경주역에서 KTX 입석을 타야만 했을 때 빈 자리로 몸을 날렸는데 어느 사람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자기 자리라는 거라. 뭐, 다투기도 싫어서 미소를 지으며 “아, 그래요~” 피하려 했다만 상대방은 웃으며 그냥 앉으라 하더라. 돌이켜 보니 나도 모르게 그 사람과 아주 똑같은 부산 말투로 능청스레 대답한 거였다. 아마 딱딱 끊어지는 서울말로 받아 쳤으면 그 사람 입장에선 꽤 재수 없게 들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타향 살이 4년 차에 확실히 얻은 건, 아마 앞서 말한 언어 능력(?)을 포함한 나름 훌륭한 현지화 능력인 듯하다. 어디에든 금방 녹아 들어갈 수 있달까? 이젠 내 고향이 어딘지도 모르겠어.

아래 링크는 경북 북부 사투리로 노래는 부른 “낙동연가”.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우연히 접한 건데 듣자마자 고향에 온 느낌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내 고향은 서울이다..

http://ift.tt/1jl08HB

병실에서의 죽음

2014년 7월 3일

“녀석이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정말로 혼자라고 느낄 때가 언제인지 알아? 수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있을 때지, 하고 나는 대답했다. 녀석이 하는 이야기의 맥락을 제대로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게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어야 했다. 우리가 정말로 혼자라고 느낄 때는 죽는 순간이었다. ..” – <치과의사>, 로베르토 볼라뇨

병원 당직을 서면서 가족 없는 임종을 몇 번 지켜봤다. 심박수 그래프가 평평해지고 동공 반사는 없고 경동맥은 뛰지 않는다. 사망 시간을 기록해두고 가족을 기다린다. 다양하다. 헐레벌떡 달려오거나 아님 30분 있다 슬슬 오거나. 아무개 씨께서는 몇 시 몇 분에 사망하셨습니다. 체호프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살아서 혼자였던 것처럼 관 속에서도 혼자일 것이다.” 물론 체호프가 젊었을 때 편지에 끼적인 말이다. 큭. 그도 죽기 직전에 결혼했었지.

뭉크의 “병실에서의 죽음”을 보고 나서 드는 이런저런 생각들. 니체는 이렇게 야그했었다. “나를 죽이지 못한 모든 것들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 뭐, 허세에 가까운 말이지. 니체의 최후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오지 않을 텐데. 고통 앞에서 버티는 이는 아무도 없다. 통증, 죽음 앞에서 강한 척하는 이가 있을까?

뭉크, 영혼의 시 (2014.7.3~10.12)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저널리즘

2014년 7월 1일

어떠한 사건에 대한 매끈한 해석은 우리를 편안하게 한다. 단호하게 내려진 분석과 단정, 네 편과 내 편, 그리고 흑과 백은 그 안에 있어야 할 치열한 논쟁을 은폐한다. 결국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 판단하며 넘어가고, 안심한다.

조 사코가 그린 일련의 ‘코믹 저널리즘’ 작품들은 우리를 진실의 수렁에 빠뜨린다. 웬 수렁이냐고? 예를 들어보겠다. 최근에 나온 “저널리즘”에는 이라크 민간인을 테러범으로 오인하여 총을 쏘는 미군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이 실려 있다. 민간인 학살범! 이렇게 분노할 수도 있겠다만 조 사코의 시각은 사뭇 다르다. 지루한 순찰을 하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으면 매복 공격이 들어와 목숨을 잃는 미군들의 공포를 그려낸다. 국가 대 국가가 아닌 개인의 이야기가 그림으로써 독자에게 바로 다가간다.

참 애매하다. 원래는 민간인 오인 사격으로 알고 넘어 갔어야 할 사인인데 쓸데 없이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다. 저 사람들이 나쁜 놈들인지 아닌지 모호해졌다. 그럼 조 사코는 이 사람 저 사람 다 사연이 있다는 양비론을 주장하고 있는 걸까? 아니다. 그는 진실 자체가 프리즘 같은 거라 칼처럼 재단할 수 없는 지점이 존재함을 찬찬히 알려주고 있다. 독자는 객관성이라는 보기 좋은 허울을 던져버린 만화를 보면서 점점 진실의 수렁에 빠진다. 끝을 알기 힘든 악순환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1)

조 사코는 자신이 이미 편견과 한계를 지닌 인간임을 인정한다. 그는 몰타에서 태어났으며 미국 국적을 지니고 있다. 몰타에 아프리카 난민들이 몰려드는 문제를 취재할 때, 그가 태생적으로 지닌 한계 때문에 계속 하는 고민을 그림으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이게 바로 무미건조하게 사실만 전달하는 매체하곤 다른, ‘코믹 저널리즘’의 강점이며 조 사코는 이런 점을 잘 활용하는 대가라 할 수 있겠다.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만드는 단편 만화들이 실린 “저널리즘” 만약 코믹 저널리즘을 처음 접한 이라면 이 책을 보기 전에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2)을 먼저 보는 걸 추천한다. 앞서 말한 진실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작품들이다.

(1)예전에 쓴 연극 “전하의 봄” 감상평을 함 읽어보시길. 너무 많은 이야기를 아는 순간 상대방은 적이 아니게 되고 모호함의 덫에 걸려버린다.

http://blog.suhhyng.com/220048422982

(2)”가자 지구 비망록” 감상평

http://blog.suhhyng.com/130160033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