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를 쓰다

2014년 3월 21일

난 예전부터 빈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가 학교 다닐 때도 시험 보면서 답안을 꽉꽉 채우려 하지 않았다. 교실을 나오고 나면 언제나 메달 순위권 그러니까 3~4등 안에 들었다. 물론 성적이 아니라 교실을 나온 순서. 한 시간 가까이 답안지를 붙잡고 있는 학우들을 보며 창문 하나를 두고 다른 차원이 펼쳐진 듯한 묘한 느낌이란. 아, 핵심만 꼭꼭 쓰는 자신감 넘치는 우등생이 아니고 뭐랄까 자포자기에 가깝다 해야 하나. 교수님, 제 목숨은 당신께 달렸나이다.

이제 슬슬 취업철인가 보다. 아는 동생한테 자기 취직했다고 전화 오질 않나, 동기 형한테 급박한 목소리로 너 지원한 곳 있냐고 전화 오고. 몇 군데 지원 넣을까 해요. 무슨 생각이야, 어서 넣어! 그래, 나도 이력서를 써 볼까나? 이미 몇 개월 전에 써둔 이력서가 있긴 하다. 약간 수정하고 사진 붙여 보내자. 문서를 연다.

아아, A4의 그 광활한 빈 공간. 허나 난 그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아니, 나한테 경력 따윈 없는데 뭘 더 쓰란 말인가? 졸업학교와 인적 사항. 3년 내내 옮겨 다녔으니 3줄은 기본. 영양군 보건소-수비보건지소-경주시 보건소. 거기에 한 줄씩 추가. 한방 진료실 및 한의약공중보건사업 진행. 이제 자기 소개서. A4용지를 어떻게 채워야 하나? 난 요점 없이 긴긴 글을 증오한다. 따라서 짧게 관심 분야, 따로 공부했던 것들을 추려서 쓴다. 반도 못 채웠지만 당당하다. 자포자기인 건가. 그래도 메일을 보낸다. 고용주님, 굽신굽신.

소개팅.

2014년 3월 20일

소개팅을 아주 가끔씩 하는데, 최근 3연발은 얼굴도 보지 못해서 이것도 기록이다 싶어 끼적인다. 몇 개월 전엔 약속을 잡고 당일에, 2시간 전에 펑크. 그 다음엔 아는 형님이 주선해준다 해서 찔러봤는데 상대방이 대뜸 음력 생년월일시까지 물어본다. 사주에 심취해있다나. 여튼 알려줬으나 이후 연락 없음. 궁합이라도 봤나 허허. 최근에도 연락처를 받아 문자로 일정 조율 중 연락 두절. 금토일 가능합니다. 근데 답이 없네. 전화번호 받고 일주일 있다 연락해서 그런가?..

주말을 비워놨는데 아쉽게 되었군. 괜찮아. 늘 하던대로 연극 보고 술 한 잔, 음악 듣고 술 한 잔 해야지 뭐, 히히.

사계에서

2014년 3월 12일

사계에 들어간다. 바에서 누군가. 이 분 또 오셨네, 어디 갔다 오셨어요? 혼자 연극 보고 왔죠. 프로그램 북을 꺼내서 그에게 보여준다. 그는 바로 펼친 페이지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거기 뭐 있어요? 아뇨, 뭐. 맥주 한 모금. 여기 이 사람 유명한 배우에요? 네, 중견급 배우시죠, 왜요? 그게. 이 배우가 옛 여자친구 큰아버지였거든요. 푸핫, 진짜요? 맞아요, 예전에 어디 뮤지컬인가 연극 보러 갔을 때 백스테이지에서 인사드린 적이 있었죠. 다 옛날 일인데. 오늘 프로그램 북을 펼치자마자 그 얼굴이 나오다니. 아니, 예전 여자친구의 큰아버지라면, 남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정말 묘하네. 말로 표현은 못하겠고. 난 잠자코 있었다. 맥주 몇 모금. 저 있잖아요. 네. 이거 이 프로그램 저한테 주시면 안 돼요? 그래요, 가지세요. 나는 이런저런 야그를 나누다 펍을 나온다.

사계에 들어간다. 바에서 누군가. 또 왔네, 어디 갔다 오셨어요? 혼자 음악 듣고 왔죠. 어디? 대학로요. 그는 아직 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다. 그 페이지를 펼쳐 본다. 거기만 보시지 말고 딴 페이지 좀 보세요. 하하, 어디요? 그는 이미 취해 있었다. 여기, 제가 참 좋아하는 대사죠. ‘인생은 한낱 걸어 다니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 뿐’ 그는 잠자코 있었다. 좀 우울한 연극이죠, 하하. 이거 이 프로그램 돌려 드릴게요. 아니, 왜요? 제가 이거 가지고 있어봤자 뭐 하겠어요? 그래요, 받을게요. 취하네요, 안녕히 계세요! 그는 펍을 나가고 그 프로그램 북은 바 위에 올려져 있다. 나는 다른 이들과 이런저런 야그를 나누다 펍을 나온다.

아저씨의 연정.

2014년 3월 11일

경주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자취방에 들어오니 잠은 안 오고. 이과두주 한 병 따르며 음악을 듣는다. 지난 주 “손열음 & 아르예 바르디 리사이틀”에서 들었던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 E-flat 장조를 튼다. 아르예 바르디가 연주하기 전에 E-flat 장조 소나타의 느린 악장은 하이든의 연애편지와 같다고 이야기했다. 어라? 처음 듣는데? 하이든이 일했던 궁정에서의 주치의의 부인, 마리안느 폰 겐칭어에게 바치는 곡이란다. 워낙 보고 듣는 눈이 많아 편지나 말로 고백을 하진 못하고, 느린 악장에 메시지가 숨어 있을 거란 말만 편지에 썼단다. 음. 60대 남자의 로맨스라. 예전에 들으면서도 좀 달달하다고 느꼈다만 그런 사연이 있었을 줄이야.요제프 하이든 Piano Sonata no. 59 in E flat, Hob. XVI:49 중 아다지오 칸타빌레.
알프레드 브렌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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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 잔 더 따르고 늙으막의 레오슈 야나첵이 작곡한 현악사중주 2번 “비밀편지”을 재생한다. 3악장에서 첼로와 비올라의 반복적인 리듬 위에 정열적으로 노래하는 바이올린 선율이 아름답다. 38세 연하의 카밀라라는 여인을 표현한 거라는데. 둘 사이에 무려 700통 넘게 편지를 나눴고 그걸 기반으로 이 작품이 나왔지. 하이든보단 훨씬 직접적이라 더 마음에 든다.

레오슈 야나첵 현악사중주 2번 “비밀편지” 중 3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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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선곡 주제가 ‘아저씨의 연정’이 되었구나. 하하.

덧. 사진은 연주회 가서 받은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사인. 통영에서 또 뵈요! 이렇게 인사하니 놀라더라. 뭔가 극렬팬이 된 듯한 느낌이야.

고독

2014년 3월 8일

고독은 인간 존재의 타고난 이기주의의 일면이다. – <안트베르펜>, 로베르토 볼라뇨

헛걸음질

2014년 3월 2일

광화문 근처에서 후배와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형! 지금 어디 가세요? 할 말이 없었다. 그냥. 걷고 있었어.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걷다뇨. 오늘 삼일절인데! 아 그래? 오늘 삼일절이야? 당황한 후배를 뒤로 하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무 것에도 이르지 않는 걸음. 헛걸음.

3년 동안 주말마다 이랬다. 영역은 점점 더 넓어져서 전국 곳곳을 헛걸음하였다. 땀이 나고 식고 슬슬 땀내가 기어나올 무렵, 바람이 불어주고 발의 통증은 점점 사라질 때 나는 몽상에 빠진다. 시청각의 감각도 희미해져 그저 앞에 뭐가 막고 있는지, 옆에 차가 오는지 판별만 하는 정도다.

열심히 뛰는 사람들에겐 runner’s high가 있다면, 나에겐 walker’s high가 있다. 걸으며 아까 본 영화, 책, 연극을 생각하다가 어디 취직하지, 그 사람은 지금 뭐하지, 나는 누구지 등등 잡념에 휩쓸리다 어느 순간 머리가 깨끗해진다. 그냥 걷는다. 그런 접신 직전에 후배를 만났으니. 하하.

이런 헛걸음질을 할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기껏 3월 한 달이 남았다. 동선을 짜본다. 어딜 돌아다닐까? 서울~경주~울산~경주~부산~경주~서울~경주~부산~경주~부산~제주~서울~경주~부산~거제~통영~부산~경주~서울. 더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