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 볼라뇨, 중에서.

2014년 1월 1일

“당신들이 잘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멕시코에서 문학은 유치원, 보육원, 어린이 방과 같습니다. 기후는 좋고, 밝은 햇빛이 내리쬡니다. 그러면 당신은 집에서 나가 공원에 앉아서 발레리의 책을 펼칩니다. 발레리는 아마도 멕시코 작가들이 가장 즐겨 읽는 작가일 것입니다. 그런 다음 당신은 친구들의 집으로 가서 담소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그림자는 이미 당신을 따라다니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에 조용히 당신을 떠나버리는 것이지요. 당신은 그런 걸 모르면서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그런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당신의 빌어먹을 그림자는 더는 당신과 함께 없지요. 물론 그건 여러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태양의 고도를 이유로 댈 수도 있고, 모자를 쓰지 않은 머리에 햇볕을 받아 건망증이 심해졌다고 말할 수도 있으며, 술을 너무 마셔서 그렇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고, 고통으로 가득 찬 지하탱크와 같은 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해서 그렇다고 둘러 댈 수도 있지요. 또한 아주 우연하게 일어날 일들이 두려워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막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질병 때문이라고, 혹은 자신의 허영심이 상처를 입어서 그렇다는 구실을 댈 수도 있고, 평생 단 한 번만이라도 제 시간을 지키고자 하는 소망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신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당신은 순간적으로나마 그걸 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당신은 그림자 없이 일종의 무대와 같은 것에 도착하고, 현실을 해석하거나 재해석하거나 그걸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그건 앞 무대이고, 앞 무매 뒤에는 커다란 터널이 있지요. 그것은 갱도와 같은 것이거나 아니면 엄청난 규모의 갱도로 들어가는 입구와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동굴이라고 말합시다. 하지만 역시 갱도라고 말할 수도 있지요. 갱도 입구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나옵니다. 의성어일 수도 있고, 분노의 말들, 혹은 유혹이거나 유혹적인 분노의 말들, 또는 단지 중얼거리는 소리거나 속삭이는 소리, 혹은 신음 소리에 불과할 수도 있지요. 분명한 것은 아무도 그걸 볼 수 없다는 점이지요. 보인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갱도의 입구뿐입니다. 무대 장치, 즉 빛과 그림자의 조화와 시간 조작은 갱도 입구의 진정한 모습을 관객의 시선에서 숨깁니다. 사실, 앞 무대에 가장 가까이 있는 관객들만이, 그러니까 오케스트라석과 가까이에 있는 관객들만이 위장한 두꺼운 베일 뒤로 무언가의 모습을 볼 수 있지요. 그것이 진정 무엇인지는 볼 수 없지만, 적어도 그것의 희미한 모습은 볼 수 있습니다. 다른 관객들은 앞 무대 너머에 있는 걸을 전혀 보지 못합니다. 아니 그들은 그런 것에 아무 관심도 없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듯하군요. 한편 그림자 없는 지식인들은 항상 관객과 마주하면서 앞 무대에 등을 돌리고 있고, 그래서 뒤통수에 눈이 달리지 않은 한,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갱도 안에서 나오는 소리만 들을 수 있지요. 그리고 그 소리를 해석하거나 재해석하거나 재창조합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의 작업은 형편없습니다. 그들은 허리케인을 감지하는 대목에서 수사법을 사용하고, 분노가 폭발한다고 느끼는 대목에서는 웅변적이 되려고 하며, 단지 귀가 먹먹하고 쓸모 없는 침목만 존재하는 곳에서 운율의 법칙을 유지하려고 애씁니다. 그들은 삐악삐악, 멍멍, 야옹야옹이라고 말하지요. 그들은 체구가 어마어마한 동물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한편 그들이 일하는 무대는 아주 예쁘고 아주 잘 설계되었으며 아주 쾌적한 곳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크기는 갈수록 작아집니다. 이렇게 무대가 좁아져도 매력은 전혀 망가지지 않습니다. 단지 갈수록 작아지고, 더불어 객석 숫자도 갈수록 줄어들고, 물론 관객도 갈수록 감소할 뿐입니다. 물론 이 무대 옆에는 다른 무대들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갈수록 커진 새로운 무대들이지요. 거기에는 아주 커다란 미술이란 무대가 있습니다. 관객들은 얼마 되지 않지만, 모두 우아하다고 말할 수 있지요. 영화와 텔레비전이란 무대도 있습니다. 이곳의 수용 능력은 엄청납니다. 객석은 항상 만원이고, 앞 무대는 해를 거듭할수록 비약적으로 커집니다. 가끔씩 지식인들의 무대에서 연기하는 사람들은 초대 배우로 텔레비전이라는 무대로 갑니다. 관점이 약간 바뀌긴 했지만 이 무대에서도 갱도 입구는 동일합니다. 아마도 위장하기 위한 베일이 조금 더 두꺼워졌을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럴 경우에는 불가사의한 유머 감각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악취를 풍깁니다. 물론 이런 유머가 깃든 위장술은 많은 해석을 낳습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관객에게 최대의 편의를 베풀거나 관객의 집단적 시선이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두 가지 해석으로 축소됩니다. 때때로 텔레비전이라는 무대에 영원히 자리를 잡는 지식인들도 있습니다. 갱도의 입구에서는 계속해서 포효하는 소리가 나오고, 지식인들은 그 소리를 오역합니다. 이론적으로 그들은 언어의 대가들이지만, 사실은 언어를 풍부하게 만들 능력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던지는 최고의 말은 맨 앞줄에 앉은 관객들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서 되뇌는 말입니다. 그런 관객들은 <채찍질 고행자>라고 불립니다. 그들은 병든 사람들이고, 종종 잔혹한 말을 만들어 내고, 그들의 사망률은 상당히 높지요. 일과 시간이 끝나면 그들은 극장 문들을 닫고 갱도의 입구들을 커다란 강철판으로 덮습니다. 지식인들은 그곳을 떠납니다. 잘은 통통하고, 밤공기는 먹기에 적합할 정도로 깨끗합니다. 몇몇 술집에서 노랫소리가 들리고, 길가에서도 그 가락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따금 어느 지식인이 집으로 향하는 발길을 돌려 그런 술집 중 한 곳으로 들어가 메스칼을 마십니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 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그만두지요.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릅니다. 종종 그는 자기가 전설적인 독일 작가를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본 것은 그림자일 뿐입니다. 가끔씩 그는 자신의 그림자만을 보았을 뿐이지요. 그 그림자는 지식인이 가로대에 목을 매어 자살하거나 스스로 혈관을 잘라 목숨을 끊지 않도록 매일 밤 집으로 돌아간 것이지요. 그러나 그는 자기가 독일 작가를 보았다고 맹세하고 그걸 확신하면서, 자신의 행복을 비롯해 자기가 왜 질서를 지키며, 왜 난리법석을 떨고, 왜 주정뱅이 같은 정신을 지녔는지 해석하지요. 다음 날은 날씨가 화창합니다. 태양은 광채를 내뿜지만 화상을 입힐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에 맞게 긴장을 풀고 집에서 나와 자신의 그림자를 끌고 다니다가, 공원에서 발길을 멈추고 발레리의 시를 읽을 수 있답니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한답니다.”

“당신이 말한 내용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노턴이 말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습니다.” 아말피타노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