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2013년 12월 26일

어제 김태춘 공연에서 알게 된 시집. 시 낭송만 듣고 반해 오늘 시내 서점을 뒤져서 한 권 구했다. 참 좋네.눈사람 – 정호승

사람들이 잠든 새벽 거리에
가슴에 칼을 품은 눈사람 하나
그친 눈을 맞으며 서 있습니다.
품은 칼을 꺼내어 눈에 대고 갈면서
먼 별빛 하나 불러와 칼날에다 새기고
다시 칼을 품으며 울었습니다.
용기 잃은 사람들의 길을 위하여
모든 인간의 추억을 흔들며 울었습니다.

눈사람이 흘린 눈물을 보았습니까?
자신의 눈물로 온몸을 녹이며
인간의 희망을 만드는 눈사람을 보았습니까?
그친 눈을 맞으며 사람들을 찾아가다
가장 먼저 일어난 새벽 어느 인간에게
강간당한 눈사람을 보았습니까?

사람들이 오가는 눈부신 아침 거리
웬일인지 눈사람 하나 쓰러져 있습니다.
햇살에 드러난 눈사람의 칼을
사람들은 모두 다 피해서 가고
새벽 별빛 찾아나선 어느 한 소년만이
칼을 집어 품에 넣고 걸어갑니다.
어디선가 눈사람의 봄은 오는데
쓰러진 눈사람의 길 떠납니다.

주정

2013년 12월 21일

대전에서 오셨다구요? 반갑습니다. 저 대전 자주 가죠. 네? 대전시립미술관이랑 그 옆에 이응노미술관이라고 있거든요. 아, 모르신다고요? 대전역 앞에 자주 가는 칼국수집 있는데 아세요? 아, 모르신다고요? 맥주 한 잔 드시죠.

통영 가보셨다구요? 반갑습니다. 저 1년 마다 두 번은 통영에 갑니다. 국제음악제 하거든요. 작곡가 치강 첸 아세요? 비진도 갔다오셨다구요? 소매물도, 욕지도, 한산도.. 정말 섬들이 근사하죠. 도다리 쑥국 생각나네요. 꿀빵도 좋죠. 맥주랑 같이 먹기 좋죠. 맥주 한 잔 드시죠.

맥주에 관한 전시를 구상중이시라구요? 재밌겠네요. 제가 대전에서 본 인터랙티브 아트 작품이 생각나는데 응용하면 좋을 것 같네요. 아님 관람객 참여 유도도 어떨까요? 광주 비엔날레에서 본 게 떠오르네요. 부산 비엔날레에서 본 것도.. 일단 맥주 한 잔 드시죠.

오, 전주국제영화제 가셨어요? 저도 그 행사 갔다왔습니다. 제가 한 네 번째로 좋아하는 곳이죠. 아, 이번에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받은 작품 서울에서 상영한다네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정말 인상깊게 봤어요. 꼭 보세요. 아, 제천에도 영화제가 있답니다. 매년 갔죠. 맥주 한 잔 드시죠.

커피 좋아하세요? 반갑네요. 저도 커피 좋아합니다. 예전에 영양군이라고 산골에서 커피를 볶으면서 조용한 크리스마스를 보냈죠. 신기하다고요? 커피 볶는 거 어렵지 않아요. LPG가스통에서 직화로 해야 편하게 볶을 수 있죠. 재밌어요. 맥주 한 잔 드시죠.

아, 대체 뭐하는 사람이냐구요? 그냥 지나가던 취객입니다. 맥주 한 잔 드시죠.

시험에 든 하루

2013년 12월 12일

그래, 사이버대학 수강 신청을 처음부터 잘못한 거야. 저녁 시간에 연달아 시험 두 개를 보다니. 심지어 시험 하나는 봉사 시간과 정확히 겹쳐버렸다. 문제 하나 풀고 침 놓고, 문제 하나 풀고 침 뽑고. 지금 뭐 하십니까? 아, 저 시험 봐요. 뭔 시험? 침 뽑아드릴게요. 네. 다 되었습니다. 그 분이 일어나면서 한숨 푹. 맞아요, 인생은 하루하루가 시험이죠. 네? 안녕히 계세요. 어찌저찌 시험을 보긴 봤다. 하나가 남았다.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면서 다시 노트북을 편다. 하나 풀고 손 비비고, 하나 풀고 커피 한 모금. 손이 얼어갈 즈음 세 문제 정도 남고. 이제 열차가 들어오겠습니다. 앗. 기차부터 타야지. 눈 덮인 벌판을 보면서 시험을 보다니. 내 살면서 이렇게 분위기 있는 시험은 처음이야.

공부는 미리미리, 수강 신청 전에 시험 시간표 확인도 미리미리 해야지. 여튼, 아이폰 테더링에 축복을! 와이브로 모뎀에 영광을! 음. 이제 발달심리학 하나 남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