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당이 아니다.

2013년 10월 23일

최근에 겪은 일이다. 진료실에 들어온 분이 나에게 상담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더라. 처음 봤을 때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50대의 여성 환자로 걸음이 편치 않았고 발음도 굉장히 어눌했다. 그 분이 호소하시길, 몇 년 전부터 시선을 돌리는 게 불편하고 한 쪽으로 몸이 치우치는 것 같단다. 난 바로 소뇌장애를 떠올렸다. 여기서 제가 어떻게 해볼 건 아닌 것 같고, 어서 큰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아보시라. 환자 분은 목소리를 높이며 이미 7년 전에 비싼 돈 내고 검진 받았는데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고 강변한다. 7년이면 아주 오래되었네요. 다시 한 번 가보시는 게..

이야기의 본론은 이게 아니었다. 예전에 어떤 한의원에서 침을 맞았는데 굉장히 편안했단다. 팔 쪽에 침을 놨는데 기분도 좋았고. 나도 비슷하게 해주면 안 되겠냐고. 그 분이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전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이상이 없다는 검사 결과를 가져오기 전에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겠네요. 벌컥 화를 내신다. 왜 자기의 이야기를 듣지 않느냐고. 물론 안다. 어떤 이의 통증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때 상대방은 무시당한 기분을 느낀다. 내 고통을 네가 아냐고 이러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 거쳐야 할 단계가 있지 않은가? 하긴 그 분은 나에게 뭔가 다른 이야기를 원했고 나이도 어려 보이니 요구대로 해줄 줄 알았나 보다.

그래도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출 순 없잖아. 문득 든 생각. 이 사람이 나에게 치료를 요구하는 게 아닌 것 같아. 어떻게든 침을 맞아 플라시보 효과로 심리적인 편안함을 느끼고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는 거에 불과할지도. 알지. 슬며시 스킨쉽을 하면서 안정된 눈빛으로 시선 교환을 하고 야그를 경청해주는 거. 나도 환자를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만 이런 식은 아니야. 그럴듯한 설명을 덧붙여 친절하게 해줄 수도 있지 않은가? 기가 어떻니, 순환이 안 되어서 그렇다는 둥. 난 그런 걸 잘 모른다. 학교 다닐 때 그런 거에 혹한 적이 있다만. 어쨌든 입증할 수 없는 걸 가지고 썰을 풀라니. 그건 미친 짓 아닌가?

이야기가 자꾸 반복되네요. 죄송합니다. 접수 취소할 테니, 돌아가세요.

의자에 털썩 앉아 아까 전의 대화를 되새김질한다. 그저 짜증나는 환자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지만, 그 분이 나에게 요구한 건 무당 짓이었다. 그런 행세를 하는 한의사들도 많을 거고. 내가 유별난 건가. 다들 그렇게 살고 있는데 나만 모난 건가. 모르겠어.

김광석, 가을, 비

2013년 10월 15일

작년, 가을비 내리는 환자 없는 산골 보건지소. 휴게실에 들어갔다가. 형, 어두운 데에서 뭐하세요. 불 키지 마라. 네? 이 날씨엔 어두운 곳에서 이 노래를 들어야 한데이. 폰에선 음악이 나온다.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긴긴 밤을 또 잊지 못해 새울까. 창 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보다 커진 내 방 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http://youtu.be/QWOoWdvl2Dg

무슨 노래에요?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죽이지? 아름답긴 한데 굳이 이 컴컴한 분위기에 듣는 건 좀 그렇네요. 딴 것도 들어보자. 아, 아뇨.. 들어봐. 자살 충동 난데이. 이것도 불 끄고 들어야지. 뭔데요? 사랑했지만.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자욱하게 내려 앉은 먼지 사이로 / 귓가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그대 음성 빗속으로 사라져버려 /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http://youtu.be/xhmKg2eFSlw

비만 오면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을 흥얼거리는 것도, 작년에 가을을 끔찍하게 탔던 것도 다 1년 동안 동거한 어둠의 의과 형 때문이야. 라고 탓할 수만 없는 게 김광석 노래가 너무 좋잖아. 덕분에 김광석의 웬만한 노래들을 듣고 그가 태어난 대구 방천 시장의 김광석 거리도 다녀왔다.

비가 내리면 음… 나를 둘러싸는 시간의 숨결이 떨쳐질까 / 비가 내리면 음… 내가 간직하는 서글픈 상념이 잊혀질까 / 난 책을 접어놓으며 창문을 열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 음…잊혀져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파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http://youtu.be/qR5oYg8Io5o

비 온다고 그의 앨범을 들으며 감상에 젖어 있다가 시골에서 남자 두 명이 노래 틀어놓고 방바닥을 긁어대던 기억이 재생되어 피식한다. 음. 또 대구 가서 방천시장 골목을 거닐며 김광석 노래를 듣고 싶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2013년 10월 9일

태풍의 습격으로 텅텅 빈 해운대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책을 계속 읽는 것도 꽤나 지루한 일이다. 그러나 밖의 굉음에 겁먹어 나가지도 못하겠고. 미리 사온 맥주를 마시면서 책을 읽는다. 적적하군. 자정이 넘어 게스트하우스의 불은 꺼지고 냉장고와 정수기의 간헐적인 소음만 들려온다. 잠이 오지 않는다. 매일 새벽 3~4시에 자다 보니. 창문을 두드리던 빗소리는 잦아들고 마침 맥주도 떨어진다. 함 나가볼까? 바람에 꺾인 입간판, 찌그러진 우산들이 거리에 널브러져있다. 술집엔 아직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만. 원래 맥주를 산다는 목적을 까먹고 갑작스레 산책으로 변질된다. 24시간 카페가 있으려나? 지금까지 연 펍은 있을까? 바다를 본다. 여전히 파도는 높다. 어디 가지?

밤 1시. 아무런 목적 없이 해운대를 거닌다. 어라? 여태 연 카페가 있었구나. 청소 중인가 보다. 많은 의자들이 테이블 위로 올라간 가운데 띄엄띄엄 앉은 몇몇 이들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거나 폰을 쳐다보거나 혹은 꾸벅꾸벅 존다. 건물 사이의 골목에선 담배를 피우고, 누군가에게 전화 상으로 열변을 토하고 있다. 세차고 어두운 바람 사이에 둥둥 뜬 듯한 그들의 존재. 그림 하나가 이런 광경 위로 겹쳐 보인다.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의미 없이 말을 툭 던질 수도, 아님 등을 돌리고 맥주 한 잔을 할 수도 있고. 난 그림에 등장하는 이들 중 누구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아. 여긴 갓 태풍이 지나간 해운대이고 난 방황하는 불면증 환자이지만..

문득 정신을 차린다. 맥주 사야지. 역시 편의점은 24시간이구나. 6900원입니다. 영수증 드릴까요? 아뇨.

기회는 세 번 찾아온다.

2013년 10월 6일

지금 읽고 있는 책 재밌나 봐요? 네? 아, 마르크스 평전 말씀하시는 건가요? 신기해요. 지금도 마르크스 읽는 사람이 있었군요. 1990년대 이후로 많이 죽지 않았나요? 그건 그렇죠. 그래도 수정된 방향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난 신나게 마르크스 야그를 늘어놓는다. 상대방은 잠자코 있는다. 영화관 조명이 어두워진다. 영화 재밌게 보세요. 네.

영화관을 나서서야. 아, 마르크스 야그를 하려던 게 아니었구나.

영화 시간을 기다리다 갑자기 누가. 이따 영화 뭐 보세요? ‘늙은 여인의 이야기’요. 아, 저랑 다른 거 보시네요. 음, 나도 물어봐야 하나? 다음 영화 뭐 보세요? ‘소울 푸드 이야기’요. 아, 저랑 다른 거 보시네요. .. 왜 답이 없지?

영화관에 들어가서야. 아, 그냥 영화 뭐 보려는지 물어봤던 게 아니었구나.

다음 역이 어딘지 아세요? 경주역이에요. 감사해요. 뭐래, 아까 안내 방송 나왔는데. 이 기차 서경주역에 서나요? 그러니까 동국대 앞이요. 아니, 그거 승차권에 나와 있는 거 아닌가? 확인해볼게요. 서경주역에 서네요. 감사해요. 지금 몇 시에요? 이 사람 왜 이러지? 아까 전까지 폰 만지작거려 놓고선. 밤 9시 50분이에요. 감사해요.

기차에서 내리고서야. 아, 그걸 궁금해서 물어보려던 게 아니었구나.

이미 늦었어. 하하.

이게 나야.

오로지 영화에만 바쳐진 부산국제영화제 3일. 세 번의 식사, 10시간 남짓한 총 수면 시간, 물처럼 마신 커피와 맥주. 그리고 11편의 영화. 내가 한 가지에 빠지면 식음을 전폐한다는 게 여실히 입증된 3일이었다.

오늘도 저녁쯤 되어서야 밥을 먹지 않은 걸 깨달았다. 화장실에 들러 내 모습을 보니 가관이더라. 기름지고 헝클어진 머리, 면도를 잊은 수염, 핏발선 눈, 튼 입술, 지저분한 안경알, 땀으로 찐득한 티셔츠. 웬 폐인이 거울 안에 있는 건지.

어떤 친구가 나에게 해준 충고의 말이 떠오르더라. “못 생긴 건 이해해도 꾸미지 않는 건 용서할 수 없다.” 뭐, 평소에 좀 꾸미고 다니라는 말이겠다만. 이미 거울에 비친 모습대로 3일 동안 정줄 놓고 사람 많은 해운대를 돌아다닌 터라. 하하.

어쩔 수 있나? 이게 나인데..

소수

2013년 10월 3일

내가 소수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겠다.

우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숫자를 써 보자.

그러고는 먼저 2의 배수를 모두 지운다. 다음에 3의 배수도 지운다. 그리고 4의 배수, 5의 배수, 6의 배수, 7의 배수 등 계속 배수를 지운다. 그리고 남는 수가 소수이다.

소수를 찾는 규칙은 아주 단순하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아주 큰 어떤 숫자가 소수인지 아닌지, 또는 다음에 어떤 소수가 올 것인지에 대해 공식을 만들어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소수는 모든 규칙들을 지우고 났을 때 남는 수다. 나는 소수가 인생과 같다고 생각한다. 소수들은 매우 논리적이지만, 당신이 한평생 생각하더라도 소수가 만들어지는 규칙은 결코 알아낼 수 없다.
–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 마크 해던

가을 타기.

2013년 10월 1일

최근 유행하는 레포츠에 푹 빠져 있다. “가을 타기” 방구석에 가만 앉아 있음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 일부러 나가 걷고, 혼자만의 계획을 더 빡빡하게 세운다. 마침 이번 주엔 학습심리학, 발달심리학 수시고사를 쳐야 해서 공부하고, 사이사이에 책을 여러 권 돌려 가면서 읽는다. 좀 버티면 부산국제영화제. 해운대 돌아다니면서 하루에 영화 4편씩 모두 17편 정도 보겠지. 다음 주에 서울 올라가면 의료 봉사하고, 강의 듣고, 걷고, 연극 두 편 보고. 다다음 주엔 서울 국제공연예술제. 그리고 사이버대학 중간고사. 현대 무용 한 편 보고 막간에 노트북 펴서 시험 보고, 걷고, 다시 무용 보고. 광주 내려 가서 디자인비엔날레 함 둘러보고. 매주 서울~경주~부산 오가고. 연극, 판소리, 영화, 책.. 아주 촘촘해서 탈진과 인지과부하가 올 정도다. 더 끼워 넣을 틈이 없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허전해 하겠지. 이렇게 가을을 타고 나면 기진맥진한 채 11월을 맞을 거고. 헷갈린다. 그저 늘 하던 대로 외로움을 벗어나려는 몸부림 아닐 지. 에라 모르겠다. 씐나게 가을이나 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