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머리카락이 아름다워.

2013년 9월 30일

소냐: 난 예쁘지 않아요.
옐레나: 넌 머리카락이 아름다워.
소냐: 아녜요!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을 보려고 뒤돌아 본다) 아녜요! 못생긴 여자한테는 그렇게들 말하죠. “당신의 눈은 아름다워요, 당신 머리카락은 아름답군요.”..
-안톤 체호프, <바냐 아저씨>, 3막 중.

점심 먹다 옆 테이블에서 하는 말 엿듣고 혼자 빵 터졌네. 체호프 희곡 대사랑 비슷해서. 10월 말에 명동에서 바냐 아저씨 공연이 있는데 기다려지네. 웬 망상이람.

누구도 웃지 않으리

우리는 눈을 가린 채 현재를 지나간다. 기껏해야 우리는 현재 살고 있는 것을 얼핏 느끼거나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나중에서야, 눈을 가렸던 붕대가 풀리고 과거를 살펴볼 때가 돼서야 우리는 우리가 겪은 것을 이해하게 되고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 “누구도 웃지 않으리”, 밀란 쿤데라

실망했어.

2013년 9월 27일

난 너한테 정말 실망했어.

막히는 버스 안. 내 옆에 있는 이는 자꾸 실망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애인을 질책하는 건지, 아님 만만한 후배를 말로 두드리고 있던 건지는 모르겠다. 도로에서 사고라도 났나? 버스는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그 사이 실망, 실망, 실망. 문득 궁금해졌다. 저 사람은 왜 저 단어를 자꾸 쓰는 걸까?

난 타인에게 실망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그저 내 마음 속에 다른 이에 대한 이미지를 하나 만들어 놓고, 그러니까 원래 그 사람의 본 모습하곤 거리가 먼 이미지에 맞춰 평가하는 듯하여 겁이 나니까. 그런데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과정인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사람을 만난다고 치자. 여행지에서 부담 없이 술 한 잔 하면서 담소를 나누는 게 아니라, 뭔가 돈, 명예 등 이런 게 걸려 있는 만남이다. 영업하는 사람은 이 사람이 물건을 살 것인가, 고용주 입장에선 이 사람이 농땡이 안 치고 일을 잘 할 것인가, 사채업자는 이 사람이 돈을 떼지 않고 잘 갚을 것인가? 몇 분 되지 않는 만남에서 정말 많은 것을 분석해야 한다.

꼭 이런 게 아니라도, 많은 이들은 몇 안 되는 단서들로 상대방에 대한 특징을 정리한다. 하긴, 누군들 안정된 정의定義나 이미지를 거부할까? 누군들 어떤 이가 갑작스럽게 변모하여 칼을 휘두르거나 등을 돌리는 등 그런 사건을 좋아할까? 그래도 주사위를 던지는 것처럼 빗나간 시도라 할 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서 기대가 뒤섞인, 안정되어 보이는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제 그렇게 만들어진 틀로 타인을 바라본다. 거기서 조금 삐쳐나가면 놀란다. 어쩔 수 없다. 그 사람에 대해 수집된 데이터가 부족한 만큼 그 시각의 틀도 작으니까. 반대로 생각하면 안지 오래된 사람일수록 놀랄 일도 적잖아. 놀라는 걸로 그치지 않는다. 이제 그에 대한 판단을 한다. 실망이야. 그냥 내가 잘 몰랐던 것일 뿐인데 편하게 실망이란 단어로 갈음한다.

아직 버스 안이다. 도로에서 사고라도 났나? 버스는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내 옆에 있는 이는 전화하다 지쳤는지 졸고 있다. 귀에서 맴돈다. 실망이야. 실망..

난 너한테 정말 실망했어.

다르게 말하면 이런 거 아닐까? 난 널 잘 몰라, 그리고 앞으로도 잘 모를 거야.

사족. 남 통화하는 거 엿듣고 이렇게 망상에 빠질 줄이야. 그 때 떠오른 그림이 루마니아 낙서가 댄 퍼잡스키의 낙서이다.

철학의 힘.

2013년 9월 20일

제 남동생은 종종 제게, 철학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 뿐인데 왜 철학을 하냐고 묻곤 하는데, 저는 그것이야말로 철학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참과 우울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요. 사람들이 분노를 속으로 삭여서 우울해지고 비참해질 때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오히려 현 상황을 강화시키기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정부가 좋아하는 종류의 비참입니다. 가령 실업 상태인 것을 개인의 잘못으로 느끼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사실은 구조적인 실업인데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종종 생겨나는 또 다른 비참이 있습니다. 세계에 대한 정당화된 분노를, 그리고 그 분노에 대한 사유와 성찰을 수반하는 비침이지요. 제가 보기에 이것은 철학이 체계적인 비판과 분석에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가에 관한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불의와 일반화된 비참에 대한 실천적 대응을 낳을 수도 있지요. – “맑스 재장전” 중 니나 파워와의 대담.

묵언수행

2013년 9월 15일

문득 깨달았다. 집을 나선 지 10시간동안 쉬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말을 두 마디만 하였다.

하나. 예매했는데요.
둘. 이가체프 한 잔 주세요.

이 사실을 알고 걸어다니면서 사람들을 관찰했다. 아무리 혼자 있는 사람이라도 몇 분을 참지 못하고 카톡을 보내며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평범하진 않구나. 지하철을 탄다. 오늘 밖에서 책 200페이지 넘게 읽으면서 말은 6초 남짓 했을까? 지금 내 옆에 앉은 이는 6분 동안 전화기에 떠들고 있다.

그래. 오늘 한 마디만 더하자. 그 한 마디를 위해서 이태원으로 걸어간다. 소중한 한 마디..

셋. 인디카 맥주 한 잔 주세요.

취미와 특기

2013년 9월 13일

어제 봉사하러 간 곳에서 인적사항 좀 작성해달라 하더라. 이름, 주소, 소속 정도만 쓰고 주니 빈칸이 있다고 다시 돌려준다. 뭘 더 쓸까요? 취미, 특기란이 비어 있네요. 써야 하나요? 얼마나 중요한 건데요. 취미: 독서, 음악감상, 여행. 그 동안 내 생활을 압축한 세 단어. 좀 아쉬운 감이 있었다. 여행에 집약된 수만 킬로미터의 야그들. 혼자 간 수많은 공연들. 유배된 선비 마냥 탐독한 책들. 괜한 투정을 부려본다. 쓰고 보니 너무 진부한 취미인데요? 괜찮아요, 자 이제 특기를 쓰세요. 특기. 특기. 근골격계 치료라 쓰기엔 좀 낮 뜨겁고. 내가 잘하는 게 뭐지? 뭘까? 문득 떠오르는 게 있다. 쓴다. 푸핫, 진짜에요? 네. 저 이런 거 굉장히 잘합니다. “컴퓨터 수리 및 조립, 가전 제품도 가능”

BIFF 볼 것들.

2013년 9월 9일

좀 있으면 부산국제영화제. 영화제 기간 동안 보고 싶은 걸 추려봤다. 물론 시간표가 나와야 상세하게 계획을 짜보겠지만. 시놉만 보고 골랐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영화 보겠구나.

제5계급 / The Fifth Estate – “셜록”으로 유명한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위키리크스의 줄리언 어산지로 나온단다. 좋아하는 배우이고 관심 가는 소재라 일단 선택.
http://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10923&c_idx=59&sp_idx&QueryStep=2

늙은 여인의 이야기 / The Story of an Old Woman – 시놉 보면 원테이크로 찍힐 만한 시나리오가 아닐 것 같은데. 프로그래머 님의 추천 글 보고 선택.
http://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9720&c_idx=55&sp_idx&QueryStep=2

이탈리아 영화를 볼 기회가 있으면 꼭 찾아서 본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접한 “시저는 죽어야 한다”,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모두 다 강렬한 인상을 남겨서.. 이번에도 시도!

용감무쌍 / L’intrepido
http://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10814&c_idx=59&sp_idx&QueryStep=2

팔레르모의 결투 / A Street in Palermo
http://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10806&c_idx=59&sp_idx&QueryStep=2

레프리 / The Referee
http://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10739&c_idx=65&sp_idx&QueryStep=2

 

폭력녀 / Miss Violence – 그리스 영화라 해서.. 가족 붕괴 드라마를 어떻게 그려낼지 궁금하다.
http://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10861&c_idx=65&sp_idx&QueryStep=2

커다란 노트 / Le Grand Cahier – 최근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작품에 빠진 적이 있었다. 굉장히 건조하고 고독한 문체로 잔인한 장면을 그려내는 게 자꾸 기억에 남는다. 이 영화의 원작도 국내 출간 되어 있는데 영악한 쌍둥이의 시선에 비친 전쟁의 참상이 어떨지 기대된다.
http://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10804&c_idx=59&sp_idx&QueryStep=2
아고타 크리스토프, “비밀 노트” 감상평 : http://blog.suhhyng.com/130171372828

프린스 아발란체 / Prince Avalanche
http://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10439&c_idx=59&sp_idx&QueryStep=2

파라다이스: 호프 / Paradise: Hope – 다이어트.. 나도 다이어트 해봐서 아는데.. 시놉시스만 보고 괜한 감정이입하면서 목록에 넣어뒀다.
http://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7921&c_idx=59&sp_idx&QueryStep=2

찰리의 진실 / It Was You Charlie
http://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10839&c_idx=59&sp_idx&QueryStep=2

은밀 부위 / Intimate Parts
http://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10805&c_idx=59&sp_idx&QueryStep=2

치명적 믿음 / Nothing Bad Can Happen – ‘믿음’을 소재로 한 “마스터”와 비슷하려나.
http://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10505&c_idx=69&sp_idx&QueryStep=2
마스터 감상평: http://blog.suhhyng.com/130171927044

당신이 원하는 그것 / That Thing You Love – 부산이 아니면 어디서 페루 영화를 보겠어. 그리고 블랙코미디는 언제나 환영이다..
http://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7930&c_idx=65&sp_idx&QueryStep=2

특별 기획으로 아일랜드 영화를 상영한단다. 옛날 아일랜드 감독의 영화만 찾아본 적도 있었는데.. 프로그램에 “더 제너럴”, “크라잉게임”, “원스” 등 반가운 이름이 많다. 시간만 되면 다시 보고 싶다.
http://www.biff.kr/kor/html/program/prog_list.asp?gotopage=1&OrderBy=asc&c_idx=67&sp_idx=272&QueryStep=2

충만한 하루

2013년 9월 8일

 

주말 밤마다 집에 들어오면 기진맥진하면서도 흐뭇하다.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걸어 다니다가 버스를 타면 책을 읽고, 연극을 본 다음 시간이 비면 주위 미술관을 들러보고, 다시 걷다가 지하철을 타면 책을 읽고, 그래도 좀 시간이 비면 그 자리에서 노트북을 펴고 사이버 대학 심리학 강의를 듣는다. 그런 다음 연극을 보고 걷다가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오늘 본 걸 메모 정리한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굉장히 피곤하지만 충만한 하루구나. 연초에 쓴 글이 생각나 피식한다.

http://suhhyng.pe.kr/?p=1430

벌써 8개월이 흘렀는데 저 글에 쓴 것보다 훨씬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이것저것 읽고 보고 들었다. “깨지길 간절히 바라는 혼자와의 약속조각들”. 저 때야 외로움에 떨면서 쓴 표현이었지만. 글쎄다. 이런 하루가 주말마다 계속된다면 깨지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안녕, 공룡

2013년 9월 6일

한남동에서 분당행 버스를 타다 익숙한 얼굴들을 마주쳤다. 둘다 고등학생 동창이었다. 그들은 술을 한잔 했는지 아님 버스를 쫓아 뛰어왔는지 상기된 표정이었다. 신기하게도 이름이 기억났다만 아는 척하긴 망설여지더라. 한 번도 같은 반, 동아리인 적이 없었고, 안녕! 하고 말을 이어나갈 접점 자체가 없었기에. 거참. 그 중 한 명은 중3때 나와 같은 학원을 다녔었다. 이건 기억나네. 그때 내가 걔를 ‘공룡’이라 집요하게 놀려댔었지. 허나 이미 15년 전 일이고, 서른을 바라보는 거의 낯선 이한테 덜컥 외치긴 힘들었다. 이런저런 옛날 생각에 책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다 이제 서현역에 도착한다. 마음 속으로. 큭. 안녕, 공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