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할 줄 아는 거.

2013년 7월 30일

니나: 꼬스짜, 난 이제 알아요, 이해해요, – 우리가 무대에서 연기하건 글을 쓰건 상관없이 – 우리한테 중요한 건 명예도 광채도 내가 꿈꿨던 것이 아니라, 인내할 줄 아는 거라는 걸. 자기 십자가를 질 줄 알고 믿음을 갖는 거죠. 난 믿음이 있어,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고, 내 본분에 대해 생각하면, 삶도 두렵지 않아요.
트레플레프: (슬프게) 당신은 자신의 길을 찾았고, 어디로 가야할지 알고 있지만, 난, 왜, 누구한테 필요한지 모르고, 아직도 몽상과 환영의 혼돈 속에서 헤매고 있어요. 난 믿음이 없고 내 본분이 뭔지 몰라요.

 

-안톤 체호프, <갈매기> 중에서..

잔혹한 출근..

2013년 7월 29일

이상하다. 아무리 기다려도 광명역 가는 셔틀버스가 오질 않네. 버스회사에 전화 걸어도 받질 않고. 택스 타야 하나. 광명역으로 가죠! 네. 30분 안에 도착해야 해요. 이렇게 택시 롤러코스터가 시작된다. 안개 자욱한 비오는 외곽순환도로를 질주한다. 운전하시는 기사아저씨도, 재촉하는 나도 덜덜 떤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랄까. 어쨌든 광명역에 도착하고. 기사 아저씨는 머뭇거리다, 미안하지만 삼천원은 더 받아야겠어요. 네, 그러시죠.. 이렇게 눈앞에서 서울-신경주 KTX 비용이 사라졌다. 그래도 무덤덤하다. 목숨값이라 치지 뭐.

2년여 동안 국내를 7만km이상 돌아다니면서 아직 몸 성한 상태로 걸어다니니 이것 또한 축복이지. 특히 목숨걸고 출근한 적이 많아서. 오늘 일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베스트10(워스트10이 맞겠지만)에 들지도 못한다. 영양군으로 운전할 때보단 훨씬 낫지 뭐.(1)

플랫폼에 앉아 커피 한모금을 들이키고 주위를 돌아본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여행가는 이들이 많네. 서로 사진찍으며 미소짓는다. 음. 남들 1년에 한 두번 하는 여행을 나는 매주 하는구나.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웃지 뭐.

(1)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잔혹한 출근’ http://suhhyng.pe.kr/?p=1754

Da Capo

2013년 7월 19일

안녕하세요, 아들한테서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수비면에 있을 때 맨날 커피 볶고 그랬다면서요? 맥주도 쉽게 볼 수 없는 거 마시고 호리병에 담긴 술 같은 거 마시고. 방 청소 안해서 지저분하게 병이 쌓여 있고. 뭐, 그럴 수도 있죠. 요즘도 매주 여행 다니나요? 요즘도 책을 그렇게 많이 사세요? 요즘도 매일 걸으러 다녀요? 요즘도 애인이 없나요? 다 아들한테 들은 거에요. 괴짜라고. 아뇨,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낭만적인 거죠. 그런데 특이하긴 하네요. 밥은 먹고 다니세요? 이런.

지난 1년 동안 같이 일했던 치과ㅇㅁ 쌤의 어머니가 오셔서 침을 놔드렸는데 처음부터 나에 대해 많은 걸 알고 계시네. 이렇게 한 번 오신 다음 친구를 한 분 씩 데려와 소개하신다.

봐봐, 내가 말한 괴짜 쌤이야~
안녕하세요, 친구한테서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

33번 뮤직박스

2013년 7월 14일

작년 쯤이었나, 뜨거운 여름이었다. 잘 지냈어? 뭐, 그럭저럭. 버스 안에서 친구와 야그하다가. 어라, 야. 왜? 음악이 신선한데? 그러게. 인코그니토의 애시드 재즈였다. 신기해. 운전석에는 젊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신호에 버스가 설 때마다 파란 하늘을 올려다 본다. 승객만 아니었다면 바다보러 버스 몰고 가겠네요.

어느 날 밤. 지방에서 올라와 서현역에서 버스를 탔다. 지친 마음에 눈의 초점도 흐릿해지고 멍때리고 있다가. 음악이 들려왔다. DJ가 심혈을 기울여 창조한 음향과 함성소리. 어라, 이태원은 아까 지나쳤는데. 졸면서 버스를 잘못 탔나? 운전석을 봤다. 바로 그였다. 깔끔하게 차려 입고 이따금 어깨를 들썩인다. 큭. 퇴근하고 클럽으로 가시나요?

비가 내린다. 지겹도록. 집을 나와 버스를 탄다. 이번에도 종로로. 밖이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버스 안도 축축, 하늘엔 비가 촉촉. 날씨 탓이야 중얼거리다 음악에 깜짝 놀랐다. 웬 힙합이지. 드렁큰 타이거의 8:45인가. 운전석을 본다. 바로 그였다. 날씨 탓인가. 굳은 표정으로 밖을 응시한다. 볼륨을 높힌다. 세상에. 번개가 친다. 비가 내린다.

있을 때 잘할 걸 들릴 때 말할 걸 어느 날과 다를 것 없었던 그 날 아침 날 깨우는 벨소리에 난 이미 느꼈어 시간을 돌리기에는 이미 늦었어 내가 행복하게 해 준다고 기다리랬잖아 내가 정상에 설 때까지 기다린 댔잖아 조금만 더 참아줘 세상에 남아줘

딩동

다음 정류장은 이매촌 한신. 서현역. AK플라자. 입니다.

그건 말야.

2013년 7월 11일

여기 어떻게 왔어? 서울에서 3시간 동안 버스 타고 왔지. 그래? 그런데 왜 10분 밖에 안 주지? 그러게. 요즘 뭐하고 살아? 뭐,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9분. 형은? 나야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하하. 점점 시간이 줄어간다. 그러다, 갑자기 시간이 13분으로 는다. 뭐지? 아, 서울에서 왔다고 한 걸 밖에서 들었나 봐. 우와, 노래방 서비스 같아! 12분. 11분. 이런저런 이야기를 툭툭 던진다. 웃는다. 웃어야 한다. 심심해 죽겠어, 하하. 그래? 그럼 내가 책 보내줄게. 꼭, 여기 주소로 택배 보내. 괜히 쪽지 같은 거 넣지 말고. 큭, 내가 쪽지 넣을 일 있겠어? 1분. 마이크가 꺼진다. 유리를 두드리며 소리친다. 또 보자구! 볼 수 있으면..

그저 걷고 싶었다. 웃을 상황이 아니었는데. 근데 웃어야지. 삶은 어차피 연기니까. 버스 안에서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잠실역에 도착한다.

여기 왜 있어요? 네? 아는 얼굴이다. 3개월 전 경주에서 우연히 만나 술 한잔 같이 한 분이다. 바로 알아봤네요. 유벤투스 유니폼의 위력인가. 전 오늘 강릉 갔다 왔어요, 친구 만나러. 강릉을 당일치기로? 역시 특이해. 경주에선 잘 지내요? 뭐 그럭저럭 잘 지내죠. 밤마다 무덤가를 산책하고요.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 하긴 퇴근 시간 대의 2호선 지하철에서 마주치기란 꽤 어려운 일이다. 어디 가요? 집에 가죠. 지하철 타다 잘못 든 환승 통로라는데 여기서 마주쳤단다. 반가워요. 저도요.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소리친다. 또 보자구요! 볼 수 있으면..

음. 경주에 온 첫 날, 처음 만나 야그 하면서 41도짜리 초화주 한 병을 밤새서 다 마셨었지. 혼자 낄낄댄다. 대체 왜 그랬는지. 뭐, 여행 다닐 땐 가면을 벗으니까.

집을 나가서 돌아오기까지 15시간 동안 사람 두 명과 합쳐서 20분 남짓 야그를 했을 뿐인데. 기분이 널뛰기 하다니. 왜 그런 걸까?

http://youtu.be/5WHmWI0x-2E

上同상동

2013년 7월 3일

7월. 어느덧 올해의 하반기. 궁금해졌다. 작년의 오늘 저녁엔 뭘 했을까? 2년 전에는? 책 읽다 말고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뒤적거렸다. 2012년 7월 3일. 혼자 맥주 한 잔하고 있었군. 2011년 7월 3일. 혼자 맥주 마시면서 책을 읽고 있었다. 아. 난 굉장히 한결 같은 사람이구나. 그럼 오늘은? 책만 읽겠어. 꼭.

역시 뜻대로 되진 않더라..

크래프트웍스 탭하우스 판교점이 문을 열었는데 어찌 그냥 지나갈 수 있으리. 이태원의 맥주를 분당에서도 마실 수 있게 되었어요. 히히. 그래! 엄마랑 같이 마시자. 2년 째 혼자 마시는 고리를 끊는 거야. 전화한다. 미안하다, 정말 마시고 싶지만 내일 일찍 나가야 해서. 밥이나 먹으러 들어오렴.

큭. 그래도 웃는다. 맥주 한 잔이 내 앞에 있잖아.

2013년 7월 3일. 上同상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