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파괴.

2013년 6월 29일

극장 의자에 앉으려다 흠칫했다. 지난 주 용산의 소극장에서 마주친 사람이 옆에 있었다. 그 때도 체호프의 작품을 상연했었지. 아, 참 나랑 비슷하네. 하며 지나쳤다가 또 만나다니. 옷차림도 똑같았다. 추리닝 비스므레한 바지와 넉넉한 티셔츠, 운동화. 거기에다 무릎 사이의 백팩에서 체호프의 희곡을 꺼내는 게 아닌가! 이럴 수가. 나도 지금 가방에 그 희곡이 있어. 도플갱어인가? 아니야. 여자잖아. 체호프를 좋아하는 여자라니. 용기를 내어 말했다. 혹시 저번 주에 용산에서 체호프의 단막극을 보지 않으셨나요? 네, 맞아요. 나를 알아본다. 체호프 좋아하시나 봐요. 네, 다음 주에도 갈매기 볼 거에요. 놀랐다. 나도 예매해놨지. 그러시군요. 연극이 시작된다.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결말. 박수. 상념에 잠긴 채 지하철로 걸어간다.

갈매기. 갈매기랬지? 아무 벤치에나 앉아 노트북을 편다. 갈매기. 예매 취소. 딴 거 보자. 갈매기만 아니면 돼..

왜냐고? 전혀 매력이 없었거든. 하긴 NEPA등산복 바지에 바르샤 유니폼을 입었던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만.

묘하다. 어렴풋이나마 ‘나랑 취미가 비슷한 사람’이 내 이상형일 거라 생각해왔지. 그런데 막상 맞닥뜨리니 아니었다. 아. 대체 나는 누구를 만나야 하는 건가.

감정 불신.

2013년 6월 26일

난 강렬한 감정을 불신한다. 너무 빨리 잊어서 그런가? 물론 그 당시엔 진심이었겠지. 그래도 어느덧 휘발되어 재조차 남지 않기에.. 뭐, 대처 방법은 이렇다. 이끌리는 대로 지르고 뒤를 돌아보지 않기. 그게 점점 쉬워진다는 게 무서운 건지, 대견한 건지. 잘 모르겠다.

어쩔 수 없는 일들.

아, 내가 일부러 그랬냐구! 자다가 역을 지나친 건데 무임승차라고? 어쩔 수 없었는데!

고객님, 일단 태화강역에서 경주역까지의 운임을 지불하셔야 합니다. 회사의 방침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거스름돈을 받던 승객은 동전을 바닥에 던진다. 빌어먹을, 이딴 동전 필요 없어!

승무원은 무릎을 끓고 동전을 줍는다. 고객님, 반대편 기차는 새벽 세 시에 지나갑니다.

승객은 경주역에 내린다. 자정을 갓 넘긴 시각. 세 시라니. 어떻게 기다리지? 아. 큰 일이네. 내일 또 일찍 나가야 하는데. 얼굴을 두 손에 파묻는다.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어.

승무원은 경주역에 내린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이제 집에 가면 된다. 아까 그 일 때문에 얼굴은 어둡다. 계속 중얼거린다. 나보고 어쩌라구. 어째야 하는데. 어쩔 수 없었는데.

비가 내린다. 승무원은 어디 가시나고 붙잡는 택시 기사들을 지나친다. 역 앞에 누군가 앉아 있다. 아까 그 사람이다. 승객이 고개를 든다. 그 둘은 눈을 마주치고 동작을 멈춘다. 아무 말도 없다..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건가?

내가 바다야.

2013년 6월 19일

졸다가 눈을 떠보니 바다다. 물이 목까지 차 올랐다. 표류하다 익사 직전에 다다른 것 같다. 숨이 막힌다.. 그런데도 웃음이 나오네. 큭. 누구 장난인지 알고 있으니까. 죽진 않아. 확실해.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다시 눈을 뜬다. 친숙한 이가 내 목을 조르고 있다. 역시 너군. 그래, 나야. 이번엔 기발했어. 바다에 빠지게 하다니, 네가 만든 거야? 글쎄, 바로 내가 바다였어. 꽤 셌지만 아직 부족해. 미쳤군. 항복할 뻔 했다니까, 더 노력해봐. 술 고프지? 아냐, 커피 한잔 마시고 네가 갈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가 목을 조르던 손을 푼다. 갈게. 잘 가, 또 보자, 외로움아.

레퀴엠.

화요일에 영화 보러 부산에 갔다가 어떤 포스터에 끌렸다. <베르디 레퀴엠 연주회> 목적지를 바로 부산문화회관으로 바꿨다. 이 칙칙한 날에 왜 레퀴엠을 듣고 싶었는지. 가사만 놓고 읊으면 분노와 후회, 절대자에 대한 공포, 뒤늦은 반성 등 마음 심란케 하는 것으로 가득하다. <Dies irae, dies illa, solvet saeclum in favilla> 진노와 심판의 날 하늘과 땅이 모두 재가 되리라. 더욱이 베르디의 화려한 작법으로 온갖 감정이 증폭된다. 아이쿠 비까지 쏟아지네. 하지만 나는 무신론자다. 내세를 믿지 않지. 뭐랄까, 최후를 맞기 직전의 사람들의 집단 심리극 혹은 음악극을 보는 느낌으로 레퀴엠을 듣는다. 그럼에도 침잠되는 건 피할 수 없다. 곡이 끝나고 마지막 음이 사라지기 전에 박수가 터져 나온다. 졸지 않았음을, 이 곡의 끝을 알고 있음을 자랑스러워 하는 ‘안다’ 박수. 이 열광에 도저히 동참할 수 없어 소음을 뒤로 하고 지하철역으로 빠르게 걸어 간다. 어두운 잔상을 떨치고 싶어. <Libera me> 나를 자유롭게 하소서. 매 화요일마다 하는 것처럼 동백역에서 내려 해운대로 걸어 간다. 폭우가 한바탕 헤집고 지나간 바닷가의 신선한 내음이 다가온다. 바다가 보인다. 사람이 레퀴엠을 부르든 블루스를 부르든 여기엔 파도가 치겠지. 바다에 바람에 갈매기에 위안을 받는다. 다행이야. 이런 걸 느낄 수 있다니. 밤기차 타기 전에 맥주 한잔 하자. 같이 할 벗이 있음 더 좋겠지만. 뭐 어때. 화요일 저녁에 부산에서 음악듣고 바다 보면서 맥주 마시잖아. 인정해. 넌 행복한 거야. 음. 레퀴엠 듣고 삶에 대한 찬양이라니. 마지못한 태도로 인정한다. 그래. 이게 행복이라면 행복이겠지.

Forza, Juve!

2013년 6월 12일

Hey, Juve! (어이, 유벤투스!)

그래, 밤에 이 거리에서 유벤투스 유니폼을 입고 다닐 사람은 나밖에 없겠지. 고개를 돌려보니 커다란 몸집의 외국인이 있네. 콧수염을 기르고 아디다스 셔츠를 입었으며 땀냄새가 지독했다. 음. 일단 영어는 아니고. 독일어네. 죄송합니다, 방금 독일 영화를 보고 슈베르트의 가곡을 좋아하지만 당신의 말을 알아듣진 못하겠네요. 그는 나의 어깨를 붙잡는다. 어눌하게 영어로 야그한다. 지금 이 전화 좀 받아보라고. 네? 자기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나. 단번에 거절하고 맥주 마시러 가려 했지만 그러기엔 그의 눈동자는 너무 애처로웠다. 아아 길을 잃으셨군요.

전화를 받는다. “뭐야, 전화 받고선 왜 말이 없어.” 응? 웬 술에 취해 흐물흐물한 여자의 한국말이? 나는 독일인을 바라본다. 그는 윙크를 하며 다시 뜨거운 눈빛 공격을 한다. 애욕에 찬 몸짓이었군.

이 고독의 협동조합원을 도와줘야 하나. 기차 시간은 빠듯하고 맥주 한 잔은 간절하고. 에라 모르겠다. 길잃은 아이를 대하는 마냥 숨을 몰아쉬고 전화기를 쥔다.

여보세요? 엥, 누구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는 지나가던 사람입니다. 네? 지나가던 사람입니다, 여기 위치는. 네네. 해운대 아쿠아리움 입구이고요. 길건너 동성모터스, 카페베네가 보이네요. 잘 모르겠어요. 그린나래 호텔과 글로리 콘도, 노보텔 사이에요. 네.

전화기를 건넨다. 그는 상대방에게 몇 마디 하고 전화를 끊는다. 고마워, 고맙다고 하며 나를 껴안으려 한다. 제길, 난 혼자 맥주 마시고 밤기차 타야 한다고! 뿌리친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이 입고 있었던 건 바이에른 뮌헨 트레이닝 셔츠였다. 큭, 축구로 세계가 하나되는 밤이군. 돌아선다. 가던 길 가야지. 독일인이 외친다.

Forza, Juve! (만세, 유벤투스!)

더치 커피..

2013년 6월 5일

더치커피엔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어. 옛날 오랫동안 배를 타야했던 네덜란드 선원들이 배에서도 커피를 마시기 위해 찬 물을 이용해 커피를 추출했다는군. 그렇게 추출하면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다나? 이렇게 이야기를 깔아놓고 커피를 마시면서 외친다. 오, 천사의 눈물, 커피의 와인!

문득 궁금했다. 그럼 네덜란드에선 더치커피를 왜 팔지 않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저 이야기는 거짓이니까. 쇼핑몰에서 더치커피로 검색을 해봐라. 다 일본에서 나온 도구들 혹은 그것을 모방한 제품들이 대다수이다. 검색해보니 CoffeeGeek에선 이런 스타일의 추출기기를 명백하게 “Japanese-styled iced coffee dripper tower”(1)라고 정의하더라.

그럼 일본, 한국을 제외한 곳에서도 이렇게 찬물로 추출하는 방식이 있을까? 있긴 있다. 하지만 더치커피가 아닌 “Cold Brew” 혹은 ”Cold Press”라고 불리운다.(2) “Toddy Cold Brew System”라는 기구가 꽤 유명하다. 더치커피기구와 생긴 건 달라도 원리는 비슷하다. 웹사이트의 소개에 따르면 신 맛이 덜해 위장자극이 적고 추출한 커피를 2주까지 보관 가능하단다.(3)

더치커피를 마실 때마다 항상 나오는 이야기. 카페인이 없거나 적다? 카페인의 용해도는 25도에서 22mg/ml, 80도에서 180mg/ml, 100도에서 670mg/ml이다. 그러니까 찬물에서 카페인이 나오긴 한다는 거다. 여기에 커피의 양, 물이 커피에 닿는 시간 등의 변수가 더해진다면 더치커피에 함유된 카페인의 양은 상당하다. 자잘한 설명은 그만하고 실험결과(4)부터 보자. ml당 농도를 보면 드립 커피보다 카페인 농도가 높다는 충격적인 결과이다. 물론 저 수치는 커피의 분쇄도, 추출시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저카페인’의 신화는 깨진 셈이다.

음. 더치 커피 만들다 말고 웬 잡설인지. 다 카페인 탓이지. 써놓고 보니 웬지 중독자 같다. 그저 애호가일 뿐인데. 여튼 더치 커피는 이렇다구요. 에스프레소 한 잔 더 마셔야겠어.

(1)http://j.mp/x1ZgxB
(2)http://en.wikipedia.org/wiki/Cold_brew
(3)http://toddycafe.com/cold-brew/why-toddy-cold-brew (4)http://cafe.naver.com/coffeemaru/51580

예매

2013년 6월 1일

몇 주전 공연 정보를 검색하다 눈에 띄는 콘서트가 있었다. 탱고 연주라. 보나마나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이렇게 편곡해서 연주하는 거겠지? 아니었다. 반도네온이 포함된 구성의 밴드였다. 한국인 반도네온 연주자가 있을 줄이야. 고상지 밴드. 호기심이 동해 유투브에서 찾아 봤다. 오, 생각보다 연주가 훌륭하다. 피아졸라라는 거대한 벽 때문에 고마쓰 료타를 제외하곤 다른 반도네온 연주자는 안중에도 없었는데 귀가 확 트일 정도였다. 결국 충동적으로 예매했다. 두 장을.. 누굴 데려가야지?

http://youtu.be/VsAmzktB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