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격 라토르

2013년 4월 30일

주성치의 영화를 야그할 때 나는 꼭 ‘유치함의 카타르시스’라는 표현을 쓴다. 과장된 슬랩스틱을 조금만 견디다 보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의 세계가 기다리기 때문이다. 주성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인도 영화 <돌격, 라토르>를 보면서 다시금 ‘유치함의 카타르시스’를 떠올려서 그렇다. 기존 영화(헐리우드)의 틀을 가지고 <돌격, 라토르>를 판단하면 후한 점수를 주긴 힘들다. 줄거리는 뚝뚝 끊긴 채 춤과 노래가 나오질 않나, 과장된 액션 장면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보면 당황할 것이다.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마을을 지배하는 악덕 지주와, 경찰서장 라토르, 사기꾼 시바 간의 대결을 다루고 있다. 선의 편에 있는 두 주인공 라토르와 시바가 지주와 싸우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 라토르는 직선적으로 적진에 달려가는 장수라면 시바는 지략으로서 지주를 농간한다. 이런 구도 위에 춤과 노래는 특유의 리듬(Chinta ta ta Chita Chita)으로 자못 심각해질 수 있는 장면에 쉼표를 찍고 웃음을 유발한다. 일단 보면 안다. 주인공이 손뼉을 치며 그 리듬을 구사하면 안도의 한숨인지 실소인지 모를 웃음이 빵 터지면서 뭔가 잘 될 거라는 기대감이 생기며 라토르, 라토르를 연발하게 된다.

웃음의 코드라는 게 사람마다 다르니 이 영화를 추천하기에 망설여지지만, <세 얼간이>를 재미있게 감상한 사람이라면 놓칠 수 없는 인도 영화일 것 같다. 이 영화가 국내 개봉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은 게 아쉬울 뿐이다.

원제<Rowdy Rathore> 2013전주국제영화제에서 감상한 영화.

미친년들

영화제에서 제목만 보고 예매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미친년들>. 일단 제정신이 아닌 채 살아가는 세 모녀가 나온다. 알코올 중독에서 겨우 벗어난 엄마, 덜컥 임신했으나 곁엔 아무도 없는 딸 모나, 레즈비언 애인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딸 조단. 그들은 항상 험한 욕을 입에 달고 산다. 그들에게 욕이란 생존 신호요, 구조 요청이다. 내일이 없는 팍팍한 삶 때문에 고운 말이 나올 리 없고 그렇게 내뱉은 말들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등돌리게 만든다. 카메라는 이 난장판을 가치판단 대신 냉정하게 보여준다. 아무리 뭐 같아도 서로 욕이라도 해주고 가끔씩 포옹해주는 가족이 있기에 그럭저럭 이어지는 삶들.. 사실 이 영화의 백미는 배우들 간의 피 터지는 연기 앙상블이 아닌가 싶다. 다들 원래 저런 거 아니야? 이런 의문이 들 정도였으니까. 모나 역을 맡은 엘리노어 피엔테의 오락가락하는 임산부 연기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여튼. 한글 제목 참 잘 지었네. <미친년들>. 이런 영화 볼 때마다 드는 생각. 국내 정식 개봉될까? 모르겠다.

원제 <See You Next Tuesday>, 2013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됨.

다음 목적지는?

2013년 4월 29일

마음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여행을 한단다. 단지 나는 그 일정이 좀더 짧고 압축적이며 동선은 길 뿐. 머리 안에선 본 영화들이 동시 상영되고, 몸은 너덜너덜해지고. 출근을 위해 밤을 꼬박 새워 신경주역에 도착했을 때 음악을 트니 마침 나오는 가사. 날 좋아해줘~ 월요일 아침에도~ 피식. 글쎄 그건 좀 힘들 것 같다. 커피 한 잔 마시고 진료를 시작한다. 환자와 상담하다가 뜬금없이 발리우드 영화 한 장면이 떠오른다. 정신차리자. 커피. 점심은 밥 대신 시에스타. 다시 진료. 커피. 퇴근. 덕분에 잠은 오지 않고 몸은 부서지고 있다. 어찌저찌 몸을 추스려 빨래하고. 여독을 안주 삼아 맥주 한 캔을 마시며 낄낄댄다. 그래, 이게 여행이지! 그런데 2년 넘게 이렇게 해왔으니 다른 생활을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대체 ‘다른 생활’이 뭔데?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자, 다음 목적지는 예산, 대전, 부산.

영화나 보러 가자.

2013년 4월 27일

주인공이 굉장히 어른스럽던데? 내용 자체는 어이없었어. 카프카의 변신을 원작을 한 건가? 그게 뭐야? 소설이름인데 내가 왜 그걸 읽었더라? 초현실적인 작품일 것 같네. 배우들이 국어책을 읽더라..

내 앞에 있던 사람들이 영화관을 나가며 방금 본 영화에 대해 진지하게 야그한다. 나도 방금 그 영화를 봤는데. 이야기하는게 왜 이리 엉뚱한 건지.

이유는 간단하다. 둘다 영화보다가 잤으니까. 그리고 방금 본 건 카프카의 ‘실종자’를 기반으로 한 영화였다.

물론 알고 있다. 중요한 건 영화의 내용 분석이 아니라, 그저 담화가 이뤄지는 바로 그 순간이라는 것을. 나중에 기억되는 건 카프카가 아니라 같이 전주국제영화제를 갔다는 사실이다.

“어떤 것도 나를 진정으로 감동시킨 적이 없다. 어제 베로나에 있는 영화관에서 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인간관계를 바라보며 즐길 수는 있어도, 관계를 직접 체험할 수는 없다. 언제나 확인한다.” – 프란츠 카프카의 편지 中

영화관을 나오니 비가 내린다.

다시. 영화나 보러 가자.

이가체프, 진하게.

이디오피아 브라보 한 잔 주세요. 이맘 때만 오시는 건가요? 네? 낯이 익어서요. 아, 국제영화제 보러 왔어요. 어쩐지. 1년 전에도 여기서 일하셨나요? 네. 기억력 좋으시군요. 오, 바로 이 자리에 앉으셨죠? 맞아요! 그 때는 이가체프, 그것도 진하게 드셨죠? 놀랍군요. 하하, 뭘요.

첫째 날엔 탄자니아AA를, 둘째 날엔 만델링을 주문했다. 난 결코. 이가체프를 시킨 적이 없었다.

그런데. 뭐 아무렴 어때..

이사

2013년 4월 25일

처음 관사 방문을 열고 보니 눈물이 났다. 슬퍼서가 아니라, 방 안 공기가 왜 이리 매캐한 건지. 벽지에서 허연 가루가 떨어져 그 유명한 석면인가 했다. 발리의 청정 공기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가. 짐 옮기다 눈물, 콧물을 뚝뚝 흘리다 안 되겠다 싶어서 보건소에서 다른 방 열쇠를 받아냈다. 퀴퀴한 냄새가 나긴 해도 버틸 만하네. 원래 방에 있던 걸 다시 빼서 가방 풀고 책도 풀고 나니 땀나더라. 씻으려고 수도 꼭지를 트니 녹물이 좔좔. 변기의 물도 내려가지 않는다. 재앙에 가까운 관사의 상태에 순간 맥주 한 캔을 따고 싶었으나 간신히 참았다. 그래, 몸만 누이면 되지. 걷다가 도서관에서 책 읽고 11시쯤에 들어오는 거야. 그런데 겨울엔 어케 하지? 자려고 누웠건만 잠이 오지 않는다. 이런저런 미래에 대한 고민 때문이 아니라, 시끄러워서. 알고 보니 아래층은 시청 산불감시대가 쓰는 숙소라 밤마다 남자들이 모여서 술 마시고 담배 피는 그런 곳이었다. 담배 연기가 스믈스믈 올라온다. 세상에.

다음 날, 근무를 마치고 대릉원을 걷는다. 음, 어디까지 가야 4시간정도 걸을 수 있을까? 걸어서 불국사까지 가볼까? 관사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어디 가지? 성동시장을 서성이다가 보건소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다른 방 있다네요. 네? 원래 내과의사 샘이 쓰던 곳인데 계약기간이 남았으니 함 보시고 짐 옮기세요. 받은 주소까지 걸어갔다. 원룸이다. 너무 깨끗하다. 세탁기도 있어! 따뜻한 물이 나와! 변기 물도 잘 내려가네. 세상에.

결국. 일주일에 이사를 세 번 한 셈이 되었다. 남들은 한 번 하면서도 진땀 빠져하는 걸 세 번 하다니. 그래서 몸살 기운이 있는 건가. 웃기게도 더 좋은 곳 있다고 거기 가라 하면 또 짐 싸고 이사할 수 있을 것 같다. 안녕하세요, 이사의 달인입니다.

결국. 나에게 남은 것은 세 집의 열쇠이다. 눈물 나는 집, 녹물 나는 집, 좀 살만한 집. 어째 부자가 된 것 같다..

바다 보러 가자.

2013년 4월 17일

아무리 미래에 대해 계산을 한들 삶은 엇나간 방향의 대답을 던져주었고 여태까진 나쁜 쪽으로 일이 발생한터라 마음을 다잡고 흔들리지 않으려 했다. 부작용인가, 굳은 얼굴과 시니컬한 말투를 덤으로 얻었지.

오늘 경주 보건소에 들러서 이런저런 사항을 체크하고 나니. 예상했던 것보다 근무 여건이 너무 좋아 깜짝 놀랐다. 홀로 궁상을 부들부들 떨던 게 불과 며칠 전이었는데. 웃기게도 처음부터 경주에 근무하던 분들은 그런 여건을 당연스레 여겼고 내 이야기는 딴세상 야그였다.

행복해하기 보단 분했다. 번호표 하나로 이렇게 갈리다니. 붕붕 뜬 감정이 내 머리를 휘저을 때. 이삿짐을 나르다 말고 가만히 앉아 생각해봤다. 만약 내가 3년 내내 경주에 있었다면. 그렇게 여행을 다니고 책을 읽었을까?

지난 2년동안 정말 열정적으로 살아오게 했던 원동력은 결국 날 가로막던 영양군의 산과 구불구불 국도, 폭설이 아니었을까? 그 당시 나는 하고 싶던 걸 끝까지 밀어 붙이며 쾌감을 느끼려 했지, 오지에 박힌 걸 원망하며 방바닥을 긁진 않았잖아.

그러면 지금 와서 과거에 받을 뻔한 대가를 왜 그리워하는 거지? 잠시동안 날 괴롭혔던 분노는 가라앉았다. 여태 해오던 대로, 읽고 걷고 보면 되잖아. 더 좋은 여건에서 말야. 2년간 영양군이 너에게 남긴 유산을 우습게 보지 말라구.

스스로 타이르며 이삿짐 정리를 마친다. 시계를 본다. 5시 반이다. 바다나 보러 가자. 해운대행 기차를 타러 가자. 어서.

세자매 – 안톤 체호프

2013년 4월 12일

체호프의 희곡이 상연된다는 소식만 들리면 달려가서 보곤 한다. 어제도 다소 무리한 일정으로 레프 도진 연출의 <세 자매>를 관람하고 왔다. 이렇게 체호프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뭘까? ‘어떻게 살아야지’, ‘행복은 있을까’ 등등 이런 고민들에 빠져있는 인간 군상들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는 것에 격한 공감을 해서 그런 거일지도 모르겠다.

<세 자매>의 등장인물들을 보면 조금 답답하다. 별다른 목표 없이 모스크바만 외쳐대며 모스크바에만 가면 행복이 찾아올 거라 믿는 세자매(올가, 마샤, 이리나), 가족에 이리저리 치여 삶에 지친 중년의 연대장(베라쉬닌), 대학 교수를 목표로 잡고 살아왔으나 결국 일개 시의회 의원에 머무르는 남자(안드레이), 세 자매와 대립하면서 자기 아이만 신경 쓰는 다소 매몰찬 올케(나타샤) 매너리즘과 술에 빠져있다 정신차려보니 이제 은퇴할 때가 된 군의관(체부틔킨)..

모두를 흥분케 하는 극적인 사건도 없는, 적적한 시골에서 사람들을 이어주는 것은 사랑이다. 등장인물들의 애정 선을 긋다 보면 무한육각면체가 나올 정도로 복잡하다만. 물론 여기엔 불륜도 포함된다. 이 부분의 수위를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극의 얼굴이 바뀐다. 알듯 말듯한 미묘한 드라마 혹은 욕정으로 가득 찬 막장 드라마. 뭐가 되었든 극은 사랑으로 인한 행복보단 불안정, 혼란만 넘친다.

「소설을 읽으면, 모든 게 진부하고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은데, 스스로 사랑에 빠지면, 모두들 아무 것도 모르고, 다만 모든 걸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될 뿐이야..」 – <세자매> 3막 중 마샤의 대사

안타깝게도 이런 애정관계들이 제대로 지속되지 않는다. 떠날 사람들은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보잘것없는 삶을 유지할 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비극이 아니다. 모스크바 가고 싶다며 징징대던 막내 이리나는 교사가 되어 시골을 떠나고, 촌스럽다고 무시당하던 올케 나타샤는 어엿한 가장으로 거듭나며, 중년의 위기에 흔들흔들하던 연대장 베라쉬닌은 가족들과 맘잡고 살아보겠다며 마을을 떠난다. 체호프는 삶의 여정을 툭 잘라 팡파르를 울리는 결말 대신에, 그냥 등장 인물들을 내버려둔다. 어쨌든 사람들은 살아가잖아?

「우리 인생은 끝나지 않았어. 살아야 해! 음악이 저렇게 즐겁게, 저렇게 기쁘게 연주되는 걸 들으니, 조금만 있으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살고, 왜 고통을 당하는지 알게 될 것 같아.. 그걸 알 수 있다면, 그걸 알 수 있다면!」 – <세자매> 4막 중 올가의 대사

이렇게 막이 내리고 나면 분명 밝은 작품이 아님에도 기분이 좋아지고 에너지가 솟는다. 카타르시스인가? 그래, 살아야 해! 레프 도진 연출에 대한 평으로 글을 쓰려 했으나 뒤엎고 결국 <세 자매> 감상이 되었구나. 뭐 어때. 연출가 에프로스의 말마따나 저마다 자신만의 체호프가 있다잖아?

2013년 4월 8일

야, 지금 뭐해? 야근 중이지. 이런, 골수까지 빼 먹히는구나.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고, 내가 던지는 농담도 똑같다. 골수까지 빼먹다.. 끔찍한 표현임에도 그저 무심코 쓰고 넘어가곤 했었는데 이 농담을 생생하게 그려낸 연극을 만날 줄이야.

연극은 어느 회사 부서의 야유회가 벌어지는 사슴 농장을 배경으로 한다. 몸보신에 유난히 집착하는 부서의 최고권력자 이부장은 사슴 피를 뽑아먹을 생각에 들떠있다. 성과 평가 때문에 속이 타 들어가는 김과장은 전전긍긍하면서 못하는 노래를 부르려 하고 있고 아부의 왕 안대리는 부장에게 굽신거리며 열심히 춤을 추며 논다. 성과 평가에서 최하등급을 받은 것을 안 김과장은 만취한 상태로 온갖 행패를 부리는데 여기서부터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극의 전개가 시작된다.

사슴 농장의 사슴들. 뿔이 자라면 잘리고 피는 뽑혀 먹고, 그러다 죽으면 버려지는 존재이다. 김과장은 사슴의 신세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열심히 부려 먹히다 가치가 없다 판단되면 정리해고라는 이름으로 잘리니 그럴 만도 하지. 더 힘든 것은 자신이 돋보이고 승진을 하기 위해서라면 동료를 독하게 짓밟기라도 해야 하는데 사람 착한 김과장은 그러지를 못한다. 허나 회사는 오히려 그런 것을 권장하고 처세술이라는 명목으로 직원 교육을 시킨다.

그러한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아웃, 통과하면 월급인상, 생명연장. 살아 남은 이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하고 냉담하며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타인을 기만한다. 총이나 칼만 들지 않았을 뿐 범죄 드라마에서 볼 법한 사이코패스 아닌가? 연극은 이런 과정을 굉장히 그로테스크하게 보여준다. 다들 신입 때는 벌벌 떨고 순진한 이들이었으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온전한 사회인, 아니 사이코패스로 거듭나고 소위 ‘어른이 되었다’라는 칭찬을 듣는다.

주사인가, 꿈인가, 현실인가. 아침에 깨어난 김과장은 갓 태어난, 걸음마도 딛지 못하는 새끼 흰 사슴을 보고 중얼거린다. “일어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극이 희망을 주려고 한 건지는 몰라도 그 새끼 사슴도 똑 같은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연극 하나가 사람 속을 이렇게 긁어대다니. 맞아, 연극은 그냥 과장했을 뿐이지. 설마 회사가 사람을 저렇게 가지고 놀겠어? 자기 위안을 읊어 대며 극장을 나오는데 옆 관객들이 이야기하더라. “와, 그 새끼랑 똑같은데?” “완전 우리 부장이네.”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앞으로 골수 운운하는 농담은 하지 말아야겠어. 이미 현실이니까. 하하.

,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2013.4.5~14)

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

2013년 4월 3일

소설<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타임머신이라는 소재에 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과 분열된 가족, 돌이킬 수 없는 과거라는 무거운 양념을 잔뜩 치고 있는, 상당히 색다른 작품이다. 가슴 벅차고 스릴 넘치는 이야기가 이어져야 할 것 같은 소재에 이렇게 회한 가득한 내용이 이어지다니. 이 작품에서 타임머신이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 근사한 장치가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에 일어난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을 때 사용하는 장치이다. 이 소설을 읽고 많은 SF소설, 영화에서 타임머신을 단골 소재로 쓰는 이유를 생각해봤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미련 덕분에 타임머신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그러니까 가장 불행한 순간으로 돌아가도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그저 자신의 삶을 관찰자의 시점에서 구경해야 하고 한 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 이동하면서도 그 순간들에 대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시간 여행. 작가 찰스 유는 그런 악몽을 냉소와 한숨을 곁들여 그려낸다. 쓰고 보니 참 우울한 작품일 것 같다만 또 그렇지도 않다. 끝없이 늘어놓는 물리학 용어를 걷어내면 다음과 같은 메시지들이 드러난다.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 바꿀 수 있는 게 없더라도 현실에 부딪히기.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달려들기. 직접 ‘선택’한 실패를 생생히 맛보는 ‘주체적’인 즐거움을 만끽하며 내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임을 선언하기.

미소를 띠며 읽을 수 있는, 하지만 자학에 가까운 유쾌함으로 가득한 이런 범우주적 성장SF소설이 또 어디 있을까?

남향집

2013년 4월 2일

지난 주말도 오늘처럼 비가 답답하게 찔끔찔끔 내렸지. 명동에서 로맨스가 가미된 연극으로 염장을 당하고 신발은 닳고 닳아 물은 새지, 서울 광장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함을 목격하고 가슴이 답답하여 곁의 덕수궁 미술관으로 들어섰다. 1층에서 하는, 체코 화가들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특별전은 컴컴한 하늘이랑 잘 어울리더라. 왜이리 칙칙한 거야. 그냥 나가긴 아까워 2층으로 올라가봤다. 한국근대미술작품들이 걸려 있었는데 그 중 참 맘에 드는 그림들이 많더라. 특히 오지호의 <남향집>. 밝은 햇살 아래 개는 편히 자고 있고 옆 문에선 아이가 고개를 빼꼼하는, 그림자마저 뜨뜻한 그림이었다. 발리 생각도 나더라. 물론 아이 대신 밭일 나가는 할매가 있어야겠지만. 바깥은 텁텁한 공기에 엄청난 소음으로 가득한데 그림 하나에서 안식을 얻다니. 매일 보는 시골 광경일 뿐인데 말이야. 발리 농촌 청년 다 된 건가.

<남향집>, 오지호 – 한국근대미술 : 꿈과 시 (덕수궁 미술관 2층) 2013.1.25~4.25

고향이 어딥니까?

2013년 4월 1일

언제부터인가 나는 봉화, 청송, 영덕, 안동, 영주를 ‘옆 동네’라 부르기 시작했다. 마치 분당 야탑역에서 서현역까지 지하철을 타는 것마냥 그곳들을 ‘잠시’ 갔다 오곤 했다. 남들은 평생 한 번 가보지도 않을 구불구불한 국도를 편안하게 운전하면서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다른 이들이 나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 거울로 시꺼먼 내 얼굴을 보니 이해 가는 질문이다만. 그럴 때마다 진한 서울 말씨로 서울에서 태어나 성남에서 주욱 살았다고 말해준다. 돌아오는 반응은. ‘아닌 것 같은데’

처음 이 지역에 왔을 때 받은 문화 충격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새 영양 사람이 되었나 보다. 문득 도스토옙스키의 말이 생각난다. “..그러나 인간의 사는 힘은 강하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동물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1년 전 써둔 글을 보다 혼자 낄낄대고 있다. 경북 북부 투어 가이드를 해도 될 법한 내공이 쌓였다고 해야 하나. 안동, 영주 야그만 나와도 신나게 떠들 수 있으니. 이제 경주 가면 경상도를 다 돌아다닐 것 같은데. 음. 설렌다.

http://suhhyng.pe.kr/?p=862

시간은 고통을 경험으로 바꾸어놓는다.

시간이 모든 것을 치유해준다는 말은 진실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사실이며,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조심하지 않으면, 시간이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가져가버리고, 그 자리에 이해만을 채워 넣는다. 시간은 기계이다. 시간은 고통을 경험으로 바꾸어놓는다. 순수한 정보를 가져다 편집하고, 보다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번역해놓는다. 우리 삶의 사건들은 기억이라고 불리우는 다른 물질로 변형되며, 이 과정에서 손실되는 것은 결코 다시 되돌릴 수 없다. 다시는 편집되지 않은, 가공되기 전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로 인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선택권이 없다. – <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 찰스 유

발리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SF소설 페이지를 넘기다가 마주친 글귀. 근사한 통찰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