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를 쓰다.

2013년 3월 20일

엄마로부터 러시아 문학에 대한 애정을 물려 받았다. 덕분에 도스토옙스키의 이런저런 작품들을 어릴 때부터 읽게 되었다만 별 흥미를 붙이진 못하고 오히려 고골이나 안톤 체호프에 열광하였다. 세월이 흐르고 다시 페쟈(그의 애칭)의 소설을 펼쳐 보니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끝없는 대화의 용광로, 선악을 구분하기 힘든 타락한 인간 군상들 등 어린 나이에 이해하기 힘든 글이었다. 게다가 건조하고 냉정한 문체를 좀더 좋아해서 그랬는지도.

최근에 나온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전을 읽으면서 페쟈에 대한 모호했던 감상들이 조금씩 명확해졌다. 츠바이크는 그를 ‘병적 영혼의 위대한 해부자’라고 칭했는데 확 와닿는 말이었다. 몇몇 소설들만 떠올려도 뭔가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등장인물은 거의 없다. 종교와 사회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과도기적 인간들의 자기 분열이 난무하며 악마에 가까운 인물들(특히 ‘악령’의 스타브로긴)도 들끓었지.

츠바이크의 표현을 다시 빌려서, 페쟈는 영적인 면에서 극단적 무신론자들 가운데 가장 믿음이 확고한 자였다. 무슨 말이냐면 그는 믿지도 않으면서 신앙 없음의 고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믿지 않는 신에 대한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했던 것이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대심문관 장면을 떠올려보자. 극단적 무신론자가 아니라면 쓰기 힘든 글 아닌가? 또 그런가 하면 ‘악령’에서는 치혼 주교의 입을 빌려 무신론에 대해 경고한다. “노골적인 무신론이 종교에 무관심한 태도보다 훌륭하다. .. 철저한 무신론자는 가장 철저한 신자에 버금간다. .. 그러나 무관심한 사람에게 믿음이란 해로운 공포일 뿐이다.”

츠바이크의 평전을 보다가 다시금 페쟈의 소설에 빠져버리고픈 충동이 들었지만 그의 작품은 독자에게도 굉장한 에너지를 요구하고, 정신적인 안정을 주기 보다는 삶에 대한 인식을 더 날카롭게 하며 결국 우울한 대기로 빠뜨리기에.. 자제해야지. 그나저나 슈테판 츠바이크의 짧고 강한 평전도 대단하다. ‘자네 도스토옙스키 한 번 읽어보지 않겠는가? 참 재밌는데 말이야’ 이러면서 독자를 슬금슬금 유혹한다. 페쟈의 팬이 아니더라도 아는 이들에게 읽어보라 추천하고픈 책이다. 츠바이크의 열정적인 인물평을 음미하며 글을 마무리하련다.

그는 삶을 제어하려 한 것이 아니라 삶을 느끼려 했다. 그는 운명의 주인이 아니라 운명의 광적인 노예이고자 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종”, 만물에 헌신하는 자로서 이제 그는 인간적인 것을 잘 아는 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운명에 대한 지배권을 운명에 되돌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삶은 우연적 시간을 넘어서 위대해질 수 있었다. 그는 영원한 힘들에 예속된 마법적 인간이었다. 그리고 우리 시대를 문서화하는 빛의 한가운데서 이미 지나갔다고 믿었던 신비로운 시대의 시인이 도스토옙스키라는 형상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는 진정 이 시대의 예언자이자 위대한 광인, 운명적 인간이었다. –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슈테판 츠바이크

푸른배이야기 : 사진, 연극, 기억

2013년 3월 19일

1년 전 인사동 관훈 갤러리이었을 거다. 국방부 주최, 후원. 갤러리 안에는 6.25당시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아직 앳되어 보이는 청년들이 전투기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앞에 멈춰 섰다. 그 사진 밑에는 이름이 없었다. 모두 전사하고 유해조차 발견되지 않고, 잊혔다.

2년 전 대림미술관이었을 거다. ‘주명덕 사진전’에서 어느 사진에 시선이 멈췄다. 1971년의 논산의 한 마을에서 사람들을 찍은 단체 사진. 논산. 아버지의 고향이다. 1971년. 아버지가 중3일 때다. 사진에는 없지만 어렸을 때의 아버지를 찾는 마냥 몇 분 동안 그 사진을 바라봤다. 사진이 찍힌 연도와 장소를 증거 삼아 내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기를 기억하려 했다.

우리는 두 번 죽는데, 첫 번째는 몸이 죽을 때이고, 두 번째의 최종적인 죽음은 ‘우리의 이야기를 해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 도래한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난 주 소극장판에서 ‘푸른배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글을 쓰기 위해 작은 어촌 마을인 남촌 도림동에 머물던 주인공은 거기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뚝방집 여자들, 냇가에서 잡은 고기를 사달라고 조르던 아이들, 낡은 배를 강매한 칠복할아버지, 여자에게 이용만 당하는 안춘식.. 따로 떼어 놓고 보면 극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무대 위에 모여 남촌 도림동이라는 정겨운 장소를 재현한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놓친 이야기가 많다며 더 자세히 말할 수 없음을 아쉬워 한다.

세월이 흘러 유명작가가 된 주인공은 다시 남촌 도림동을 찾는다. 이미 개발이 되어 원래 살던 사람들은 다 떠나버렸고 남은 건 예전에 찍은 단체 사진 한 장 뿐이다.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도, 마을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이도 없다. 그럼 그냥 이렇게 끝이 나는 건가?

아니다. 작가는 이미 이야기로서 훨씬 더 생생한 사진을 보여 줬다. 그의 말로 구현된 사진을 들쳐보면 어촌에서 살던 이들의 삶의 순간이 되살아나고 그렇게 지속되는 순간들을 잊을 수 없도록 한다. 이야기로 된 사진.. 그게 바로 연극이 아닌가 싶다. 앞서 언급한 보르헤스의 글을 상기해보자.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사라진다 할지라도 연극이 사진처럼 홀로 남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면 두 번째의 최종적인 죽음은 유예되는 게 아닐까?

불완전한 사람들

2013년 3월 14일

요즘 들어 종이 신문을 본지 꽤 되었다. 지금 근무지에서는 원래 구독하던 신문이 배달되지 않아 그런 것도 있겠지만 모니터 위에서 후루룩 읽는 게 더 편하니 종이 신문에 점점 손이 가지 않는가 보다. 어쩌다 신문지를 보다 보면 누가 봐도 광고임이 확실한 기사, 기자의 피땀이 느껴지는 기획취재기사, 외국 통신사에서 받아 적은 티가 나는 기사 등등 참 다양한 읽을 거리가 있다. 날마다 어떤 사람들의 손을 거쳐 이런 신문이 완성되는 건지 문득 궁금해지기도 한다.

톰 래크먼의 ‘불완전한 사람들’이 그런 의문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소설인 것 같다. 이 작품은 로마의 영자신문사를 배경으로 매일 마감에 정신 없이 쫓기는 이들의 야그를 맛깔스럽게 풀어내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뭔가 이상이나 대의를 품은 고결한 언론인이라기 보다는 그저 일상에 이리저리 치이는 생활인에 가깝다. 한 때 잘나갔으나 이제는 빈털터리가 된 파리 특파원, 끔찍한 사건을 딪고 문화면 편집장으로 우뚝 올라선 부고 담당 기자, 다른 이의 오타에는 인정사정 없지만 친구 보는 눈은 형편없는 교정교열 편집장, 예전에 헤어졌던 애인에게 추파를 던지다 바람맞은 수석 편집장, 아랍어를 잘 할 줄 모르는 카이로 통신원, 그룹에서 임명한 아무것도 모르는 ‘회장 친인적’ 발행인..

쓸쓸함, 슬픔, 두려움을 가미한, 사람 냄새 풀풀 나는 이야기 조각들의 모음이랄까? 여기에 각 인물들의 이야기를 기사 헤드라인 식으로 배열하고 인터넷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점점 쇠락하는 신문사의 상황을 중간에 끼워 넣는 기법도 일품으로 아침에 보는 신문지 안에 인생이 담겨있음을 따뜻하게 알려주는 작품이다.

덧. 비슷한 기법을 쓰긴 하지만 스케일이 훨씬 큰 조르주 페렉의 ‘인생사용법’도 읽어보시길(서평 : http://goo.gl/4YkLB )

Blue Alert

2013년 3월 13일

 

http://tvpot.daum.net/v/vcebcsLwQklkkkXdhwsQ998

There’s perfume burning in the air
Bits of beauty everywhere
Shrapnel flying, soldier hit the dirt

Visions of her drawing near
Arise, abide, and disappear
You try to slow it down
It doesn’t work

요즘 자주 듣는 재즈보컬, 마들렌 페이루. 처음엔 빌리 할리데이를 떠올렸으나 그보단 더 포근한 음성을 들려주는 것같다. 아무래도 살아온 환경이 차이나서 그렇겠지? 재즈를 음반으로만 접하는 입장이다만 이런 보컬의 연주를 한 번 쯤은 라이브로 듣고 싶은 욕심이 난다.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 가면 벗기

2013년 3월 12일

바티칸에서 콘클라베(교황 선출)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난 영화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영화도 엄숙한 콘클라베로 시작한다. 각 국의 추기경들이 한 자리에 모여 교황을 뽑으며 다들 간절한 기도를 한다. “주여, 제발, 저는 아닙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추기경 멜빌이 교황으로 선출되는데 그가 보인 첫 반응은 “안 돼!! 주여, 저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보다 못한 주위 추기경들은 비밀리에 정신과 상담을 받게 하나 그는 교황청을 나왔다가 경호원을 따돌리고 잠적해버린다.

참 뒤틀린 블랙코미디일 것 같은 도입부이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 영화는 교황과 추기경, 바티칸 등 모든 종교적인 요소을 배제하고 나면 갑작스레 중차대한 임무를 맡은 어떤 노신사에 대한 야그라 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카톨릭의 색을 덧칠해보면 최고 직위까지 오른 성직자가 주어진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여태 살아온 길을 회고해보는 일종의 로드무비가 된다.

멜빌이 정신과 상담을 받을 때 의사는 직업이 뭔지 묻는다. 교황이라고 할 순 없으니 잠시 생각하다 말한다. “배우에요” 여태까지의 가면을 내려두고 잠시 남이 되어 보고 싶었나? 사실 그는 젊었을 때 배우 지망생이었다. 다만 무대 위에선 형편없는 배우였고 현실에서 그가 가장 잘 ‘연기’해낼 수 있었던 건 바로 성직자였다. 가지 않은 길(1)을 그만 음미하고 이제는 현실로 돌아와 가면을 다시 써야 하건만 멜빌은 그러지 못한다.(2)

삶을 연기한다.. 이 모티브는 추기경들의 배구시합 장면에서 변주된다. 외부와 차단된 교황청 안에서 추기경들은 배구 시합을 하면서 그 동안 걸치고 있던 근엄함과 신중함을 던져버리고 어린애처럼 즐거워한다. 카메라는 슬로우 모션으로 분노하고 좌절하며 환희에 찬 동작을 찬찬히 비춘다. 허나 그들은 멜빌과 다르게 다시 능숙하게 현실로 돌아와 멜빌에게 교황직을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

결말도 참 발칙하다만 그건 여기서 밝히긴 힘들고. 2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보고 머릿속 한 켠에 남겨두다가 콘클라베와 이번 4월 개봉 소식이 들려와 겸사겸사 글을 남긴다. 가볍다가도 무겁게 삶에 대한 질문을 툭툭 던지는, 흔치 않은 작품이다. ‘인간’이기도 한 교황의 이야기로만 볼 게 아니라 언제나 부담스러운 역할을 요구하는 사회와 거기에 피곤을 느끼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로 읽어 내도 충분히 흥미진진할 것 같다.

(1)영화에서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가 거듭 언급된다. 멜빌이 읊는 대사 중 일부.
꼬스짜한테 소설의 소재를 주고 싶어요. 제목은 「뭔가를 하려고 했던 사람」. 젊었을 때 난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했고. 멋지게 말하고 싶었지만 혐오스럽게 말하고.. 모든 게 다 이 모양이군요. 이걸 다 요약해 보면 땀까지 흐른다니까요. 결혼하고 싶었는데 못했고, 늘 도시에 살고 싶었는데 이렇게 인생을 시골에서 끝마치게 되고, 그게 다죠.” “예순 둘이나 드셔서 인생이 불만족스럽다고 하는 건 그리 관대하신 게 아닙니다.” “정말 꽉 막힌 사람이군. 난 살고 싶단 말이오!” “..자신의 죄를 두려워하고, 영생을 믿는 신자들만이 의식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우선, 믿음이 있는 분도 아닌데다, 둘째, 당신한테 무슨 죄가 있겠어요? 단지 법무부에서 25년간 근무한 게 단데요.” “(웃으며) 28년이오…” -“갈매기” 4막 중 소린과 도른의 대화, 안톤 체호프.

(2)이 때 메르세데스 소사가 부르는 ‘Todo cambia(모든 것이 변해가네)’가 흘러나온다. “피상적인 것도 변하고 / 심오한 것도 변하고 / 사람들의 사고 방식도 변하고 /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네. // 여행하던 이들은 방향을 바꾸지, / 그게 아플지라도 말이야. / 그렇게 모든 게 변화하니…,/ 내가 변하는 게 이상할 게 뭐야.” http://youtu.be/zZH_-ozrypQ

What a difference a day makes

2013년 3월 11일

What a difference a day makes
There’s a rainbow before me
Skies above can’t be stormy
Since that moment of bliss, that thrilling kiss

It’s heaven when you find romance on your menu
What a difference a day made
And the difference is you

월요일 아침 같은 기분으로 책을 읽다가 글에서 언급하던 트랙이라 듣게 되었는데. 환자 없을 때 진료실에 틀고 방문진료 나갈 때 틀고 산책하러 나갈 때 틀고. 아, 참 좋네. 경쾌한 템포, 사라 본의 목소리, 깔끔한 반주까지. 하루가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지~ 근데 그런 하루가 오긴 올까?

http://www.youtube.com/watch?v=3JhgEjA6DgU

희망 고문.

2013년 3월 7일

1년 넘게 축구를 보지 않았다. 성남이 너무 너무 못해서. 그러다 올해 K리그 개막 소식을 접하면서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던 차에 사촌형에게 연락이 왔다. 개막전 보러 가자. 좋아. 오랜만에 사촌형을 만나 반갑게 인사했다. 표 사러 갈게. 뭐야. 왜? 아직 시즌권을 사지 않았단 말이야? 응. 이럴 수가. 형의 눈빛을 보니 웬지 시즌권을 사야 할 것 같았다. 그래, 타협해서 10경기 입장권만 구입하자. 여차저차 경기장에 들어갔다. 상대는 수원. 지지만 말아라, 제발. 하지만 졌다. 그렇게 소리지르고 욕도 하면서 봤건만. 시원하게 졌다. 차라리 연극을 볼 걸. 우울한 내 표정을 보고 있던 형은 위로한다. 작년보단 낫잖아. 윽, 작년은 최악이었으니 작년보단 나아야지. 다음에 또 보자. 그래.. 지난 일요일의 경기가 나에게 남겨준 건. 찬바람 맞으며 고래고래 소리질렀으니 심한 목감기는 필연이요, 덤으로 몸살까지 얹어 주셨네. 감사해요.. 오늘까지 골골거리다 정신차려보니. 아, 남은 게 또 있었네. 9장의 홈경기 입장권. 음. 그래도 반은 이기겠지? 이런 헛된 희망을 품고 다음 주에 예매해둔 연극을 취소한다. 성남 홈 경기를 위해서.

샤다라빠의 웹툰을 보고 갑자기 울컥해서 끄적인다. 그러니까 결론은 축구를 멀리 하고 독서를 하는 게 낫습니다.

http://goo.gl/JRC0J

발리하이브리드트럭

2013년 3월 5일

발리를 산책하다가 ‘공업사, 빵꾸’ 간판이 달린 허름한 정비소 안을 들여다 보면 뼈대만 남은 트럭 옆에서 할배가 끊임없이 뭔가를 고치고 있다. 나는 그 분을 ‘내연 기관의 달인’이라 부른다. 뭐, 40년 넘게 바퀴 달린 걸 다 수리해 왔던 분이니 별명을 지어드려도 될 것 같다.

할배가 침 맞으러 오실 때마다 묻는다. 오늘은 뭘 자르시나요? 응? 가게 앞에 큰 전동톱이 있어서요. 아, 그거 누가 고쳐달라 맡긴 거야. 오늘은 자전거 고치시나 봐요? 응? 앞에 자전거가 있어서요. 아, 그거 내가 타고 다니는 건데. 가게에 무슨 일 있어요? 응? 경찰 오토바이가 서있어서요. 아, 요즘 수리하고 있는 거야. 이렇듯 그가 고치는 사물은 꽤 다양하다. 승용차, 경운기, 트럭, 수레, 자전거, 탈곡기 등등 심지어 개집까지. 그래도 내가 보기에 할배의 주특기는 트럭 수리이다. 발리에 처음 왔을 때 어떤 트럭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지. 앞에는 아시아자동차의 마크가, 뒤 쪽 화물칸에는 현대자동차가, 네 바퀴에는 기아 상표가 찍혀있고, 옆에는 소형 양수기가 달려있는, 진정 격렬한 하이브리드풍 트럭이랄까. 여튼 희안하고 전위적인 사물이 내 앞에서 경운기의 속도로 굴러가고 있었는데 바로 할배의 작품이었다. 40년 넘게 축적된 부품들을 맞지 않으면 자르고 용접하고 두드리고. 그렇게 탄생한 발리하이브리드트럭 1호, 2호, 3호.. 들이 영양군을 누비고 있다.

날이 따뜻해진 지금. 산책하다가 정비소 안을 들여다 본다. 뼈대만 있고 앞에 번호판이 간신히 붙어 있던 트럭이 제법 모습을 갖춰간다. 전조등이 달리고 이제 배터리를 달 차례인가 보다. 할배는 보이지 않네. 밥 먹으러 가셨나. 내가 발리를 먼저 떠날지, 저 발리하이브리드트럭 몇 호의 시동이 먼저 걸릴지 모르겠다만. 경운기의 영혼을 품에 안은 그 트럭 작품들을 잊지 못할 듯싶다.

수업

2013년 3월 2일

어느 교수의 집으로 학생이 찾아온다. 종합박사 학위를 따고 싶다며 학생에게 가르침을 부탁 받은 교수는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러다 ‘재앙의 시작’이라던 비교언어학을 강연하면서 일이 꼬인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던 학생은 갑자기 이가 아프다며 칭얼대고 교수는 교수대로 자신의 말만 하다가 폭발하여 학생을 구타한다. 결국 교수는 학생을 죽여 버리고 하녀는 뒷수습을 해준다. 그리고. 교수의 집으로 다른 학생이 찾아온다..

외젠 이오네스코의 ‘수업’(이윤택 연출)을 보면서 교수의 행동은 여태 지나쳐 왔던 이들을 떠올리게 하였다. 극에서처럼 직접적인 구타를 하진 않아도 자신만의 야그를 계속 하고, 상대방 견해는 무시하고, 하던 야그 또 하고. 이런 거야말로 타인의 귀에 대한 폭력 아닌가? 밀란 쿤데라의 말마따나 우리 인간의 전 생애라는 게 남의 귀를 빼앗기 위한 투쟁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 해도, 말을 밀어 부치는 이가 권력까지 지니고 있으면 상황은 골치 아파진다.

교수라는 인물을 권력자로 놓고 극을 되새김질 해보자. 말 그대로 교수 아니면 독재자, 유명 평론가, 부모 등등 여러 경우에 적용시켜볼 수 있겠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학생이 고통을 호소하는 것에 눈감은 채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며 윽박지름을 보자니 상대방에 대한 공감이 없는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게 몽둥이만 들지 않았지, 두들겨 패는 거랑 뭐가 다를까 싶다. 교수가 광기에 사로잡혀 책상을 두드릴 때 히틀러의 연설이 나오는 것도 그런 효과를 노린 것 같기도 하고.

이쯤에서 평상시 해오던 생각을 끄집어낸다.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기. 계속 노력해야겠다만 같은 단어라도 다르게 전달되는 이 세상에선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수업’의 메시지가 지금까지 생명력을 얻어 꿈틀대는 것도 그런 이유겠지. 다른 이들에게 선뜻 보러 가라 하진 못하겠지만 배우들의 강렬한 연기와 어두운 연출이 맞물려 잔상이 진득하게 남는 연극이었다.

<수업>, 외젠 이오네스코 작, 이윤택 연출 – 게릴라극장 (2013.2.2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