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여진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2013년 2월 26일

예전에 아지즈 네신의 작품을 읽다 인상적인 구절을 메모해둔 적이 있었다. 왜 사람들이 SNS를 사용하는 가에 대한 대답인 것 같아서.

세상에 존재하는 사실을 단지 자신만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거죠.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면, 숨을 쉬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람의 존재 이유는 커지죠. –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지즈 네신

그러다 최근 지그문트 바우만의 글을 읽던 도중 촌철살인의 문구를 발견했다. “나는 보여진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이제 언젠가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그 유명한 ‘존재 증명’의 명제는 우리들의 이 매스커뮤니케이션 시대에 맞게 새로운 버전으로 업데이트된 “나는 보여진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밀려 쫓겨나버리고 말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보면 볼수록, 즉 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선택하면 할수록 점점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납득시켜주는 증명처럼 여기게 되는 셈이다. –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지그문트 바우만

희망 없음.

나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은 곧 절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체념과 초연함에 가까울 뿐이다. 어떤 일이 생겨도 자아를 유지할 자신감이랄까? 혹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여 가지는 마음의 완충 장치일지도. 뭐, 언제나 상상 이상의 최악이 찾아 오긴 한다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삶은 계속되고 맷집은 늘어날 테니까.

사천가

2013년 2월 25일

“바르게 살자” 길에서 마주치곤 하는, 큰 돌에 새겨진 말이다. 거기에 사람 이름도 몇 개 쓰여 있다. 지역유지 분들이 자랑스런 얼굴로 돌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이 아른거려 볼 때 마다 피식거린다. 그 분 들은 바르게 사시나? 뭐, 그렇다면 ‘바르게’ 산다는 건 뭐지? 사전을 찾아보니 규범에 어긋나지 않게 사는 것이란다.

이자람의 판소리 브레히트 ‘사천가’를 보면서 그 돌이 떠올랐다. 사천가의 주인공 순덕은 착하긴 해도 바르지 않은 삶(1)을 살고 있었다. 너무 순해 어찌저찌 생긴 돈마저 아는 이들에게 뜯기고 사기꾼한테 반해 인생이 더 꼬이며 건물 주인에게 어서 가게 빼라고 압박을 받는다. 어이쿠야, 게다가 아이까지 생겼네. 혹자는 순덕이 참 멍청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착함이 곧 바름 혹은 도덕이 아닌 세상이니까.

순덕은 위기마다 사촌을 등장시킨다. 이 사촌은 순덕이 남장한 것으로 곧 그녀의 분열된 자아이다. 사촌은 뭔가 다르다. 자신의 이득을 끝끝내 지키며 심지어 사람들을 저임금으로 부려먹으면서 부자가 된다. 잊지 마라, 사촌은 그 착하다던 순덕이니까. 남을 등치는 철저한 사냥꾼(2)이 된 사촌(순덕)은 이제 남부럽지 않게 ‘바르게’ 살 수 있게 되었다.

바르다. 규범에 어긋나지 않게 사는 것. 그럼 이 극에서의 규범은 뭐지? 무한경쟁시대에서 어떻게든 타인을 누르고 성공하는 것이다. ‘성공해야 한다’라는 규칙 말고 다른 규칙은 없다.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가치의 혼돈에 빠진 채 끝나버린다. 이걸 본 관객은 판단해야만 한다. 착하게 살아야 하나 아니면 바르게 살아야 하는가?

공연을 보기 전에 걱정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사천의 선인)을 판소리로 재현한다는 게 새로운 시도였고, 한다 치더라도 원작을 모르는 사람이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으니. 허나 기우였지. 타악기와 베이스의 리듬에 맞춰 이자람이 동시에 연기해내는 인물들은 나에게 생생하게 다가왔다. 수궁가, 적벽가 같은 고전을 벗어나 창작 판소리를 듣고 전율을 느껴본 적은 처음이었다. 통쾌하다가 슬프고. 처음부터 결말까지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 이자람의 노래는 정말 대단하더라. 그냥 이렇게 외치고 싶다. 이건 꼭 봐야 한다!

이자람 판소리 브레히트 ‘사천가’ 성남아트센터 앙상블 씨어터 (2013.2.23~24)

(1) 보이체크, 게오르크 뷔히너. 원래는 “너는 착하지만 도덕적이지 못해.”
(2) 모두스 비벤디, 지그문트 바우만

덧. 4월에 과천에서 ‘사천가’ 공연이 있다는데 아는 이를 꼭 데리고 가고 싶다.

불행한 사내에게 찾아온 행운

2013년 2월 20일

안동행 기차를 타야 한다. 아직 시간 여유가 있네. 맥주 한 캔 사러 청량리역 편의점에 들어간다. 하이트 하나 집어든 나의 시선을 잡아 끈 건. 책을 읽고 있는 점원의 모습이었다. 계산해주고 한 페이지 넘기고, 카드 돌려주자마자 한 페이지 넘기고. 무슨 책이길래 저렇게 몰두하는 거지? 책 이름이 궁금해진다. 영수증 드릴까요? 아니요. ‘불행한 사내에게 찾아온 행운’ 특이한 제목이군.

“당신이 먹은 것을 말해보라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주겠다.” – 브리아 샤바랭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읽는 책을 묻는다. 특이하거나 들어본 적 없으면 일단 구입해서 읽어본다. 위의 인용문을 비틀어서. “당신이 읽는 것을 말해보라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주겠다.” 이 정도까지 아니더라도 그 사람이 좋아한다고 주장하는 독서 성향을 파악할 순 있으니까. 모르는 사람이 읽는 책도 마찬가지다. 뭐, 그저 새로운 경향을 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몇 주 뒤 ‘불행한 사내에게 찾아온 행운’을 읽기 시작한다. 약간 놀랐다. 표지에서 보이는 그림체와는 달리 냉소적인 어른 동화들이 담겨있다. 욕정, 시기, 권태, 자아도취, 망상으로 가득찬 인간 군상들을 굉장히 건조하게 그려내면서 씁쓸한 뒷맛을 남겨준다. 웃음인지, 냉소인지. 이런 블랙 유머를 좋아하긴 한다만. 앞서의 오만한 인용문은 취소하련다. 이런 걸 그렇게 몰두하면서 읽다니. 그 사람은 어느 별에서 온 거지?

안동행 기차를 타야 한다. 아직 시간 여유가 있네. 맥주 한 캔 사러 청량리역 편의점에 들어간다. 책을 읽던 점원은 없다. 영수증 드릴까요? 아니요. 큭. 안타깝군. 혹시라도 다시 만나면 한마디 해주고 싶었는데.

“카프카 함 읽어보실래요? 잘 읽게 생기셨는데.”

노란 비명

2013년 2월 19일

자 이제 검은색을 섞어봅시다. 절망이 들어간 비명입니다. 배우는 붓을 수평으로 그으면서 비명을 질러댄다. 으으아아아악! 그런 다음에 아무렇지 않게 다른 색으로 넘어간다. 비명 중에서도 공포가 가미된 게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비명과 함께 완성된 그림. 김범의 <노란 비명>

아, 입구에 걸려 있던 그 그림이었구나. 빵빵 터지는 영상이지만 웃음기를 좀 걷어내고 내용을 돌이켜보면 작가의 푸념이 들리는 듯하다. 힘들게 작품을 만들어놔도 그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상황에서의 고민이랄까? 많은 이들이 읽으면서도 읽지 못하고 보면서도 보지 못한 채 지나치는 이미지와 글에 담긴 고뇌에 대한 애도일지도.

만일 그림이 걸려 있고 저렇게 옆에 제작 비디오를 틀어 놓으면 그 작품이 더 잘 이해될까? 모르겠다. 관객이 어떤 그림을 볼 때 증폭되어 나오는 다양한 생각을 제한시키는 꼴이 될 것 같기도 하고. 현대 예술에서 보는 이와 그리는 이와의 소통 단절을 참으로 코믹하게 그려내는 영상이다.

<노란 비명>, 김범 – “끈질긴 후렴” 백남준아트센터 (2013.2.7~6.16)

Máscara

2013년 2월 13일

밝은 그림과 팝아트의 홍수 속에서 마주친 단색의 리놀륨 판화. 인간의 얼굴과 비슷하나 심하게 비틀어진 표정이다. Oswaldo Guayasamin의 Máscara(마스크). 모르는 이름이다. 그래도 이 판화에 이끌려 몇 번이고 돌아가 유심히 살펴본다. 공포에 질린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났나? 집에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면서 오스왈도 과야사민의 정보를 찾는다. 에콰도르 화가란다. 주로 라틴 아메리카 민중의 분노, 슬픔, 고뇌를 그렸다고 하니 내가 느낀 게 얼추 맞나 보다. 일면식도 없는 이에게 판화로 이런 감정을 전달하다니. 끌린다. 문득 에콰도르에 있다는 그의 미술관에 가고 싶어졌다. 그건 나중으로 미뤄두고. 이 느낌이 휘발되기 전에 글로 기록해둬야겠어. 밀란 쿤데라의 에세이 한 귀퉁이가 떠오른다. 화가는 다르다만 공포에 의해 왜곡된 초상화를 다룬다는 점에서 비슷한 것 같아서.

“그의 그림은 ‘자아’의 한계에 대한 질문이다. 어느 정도까지 왜곡될 때 한 개인은 여전히 그 자신으로 남아 있을까? 어느 정도까지 왜곡될 때, 사랑하는 존재는 여전히 사랑하는 존재로 남아 있을까? 소중한 얼굴이 질병 때문에, 광기 때문에, 증오 때문에, 죽음 때문에 멀어질 때, 얼마나 오랫동안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 ‘자아’가 더 이상 ‘자아’이기를 멈추는 경계는 어디인가? .. 거기까지 내려가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을까? 얼굴이다. 얼굴은 무한히 연약하며 몸 안에서 전율하는 ‘자아’, 즉 ‘이 숨겨진 다이아몬드, 이 보물, 이 금괴’를 은닉하고 있다. 얼굴, 나는 그곳에 시선을 고정한 태 인생이라는, ‘의미가 결핍된 이 우연성’의 삶을 살기 위한 이유를 찾는다” – <화가의 난폭한 몸짓>, 밀란 쿤데라

중남미 현대 미술전 <하바나, 열정을 말하다> (~2013.2.20) – 아라아트센터

20분

2013년 2월 6일

책을 읽는다. 똑똑. 계십니껴? 늘 하던 대로 침을 놔드리고. 20분 있다 빼드릴게요. 자리에 앉는 순간 2주 전 기억이. 할매에게 늘 하던 대로 침을 놔드리고. 이런저런 야그를 듣는다. 첫 째 딸은. 둘 째는. 셋 째는. 네네. 딴 생각도 약간. 총각 참 착하네, 임자 있나? 없죠, 하하. 꼭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아, 네. 서울에서 일하고. 어, 네? 예쁘고 25이라네. 네? 이번에 서울에서 볼 일 있는데 이야기해볼게. 감사합니다. 현재로. 타이머를 본다. 15분. 할매는 왜 아무 말도 없는 걸까? 잊어버리셨나? 책을 펼친다. 음. 타이머를 본다. 13분. 노화로 인한 망각을 되새기게 하는 건 실례야. 12분. 하지만 확인은 해봐야지. 10분. 그새 ‘변동사항’이 생겨서 할매도 말하기 그런 걸 거야. 8분. 25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 몇 년 째 25 이런 거. 5분. 할매가 한 번 해본 말일텐데 이리도 잡념이. 3분. 그래도 다시 한 번. 2분. 포기하면 편해. 1분. 허허. 벨이 울린다. 침 빼드릴게요. 할매는 인사를 하며 나간다. 침묵이 폭발하던 기나긴 20분은 지나고. 늘 하던 대로.. 책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