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necticut Trout Stream

2012년 12월 30일

햇빛이 부족해. 가뜩이나 해가 짧은 산골이라 그런가, 오후 5시에 벌써 노을을 내비치는 발리의 하늘을 보면서 항상 중얼거린다. 햇빛이 부족해. 서울 올라와서도 밝은 색조의 그림을 찾아 다닌다. 그러다 어느 전시회에서 특효약까진 아니더라도 빛이 넘치는 작품을 보게 되었다. 어니스트 로슨의 ‘Connecticut Trout Stream’. 겨울과 봄 사이의 강을 그려낸 건가. 강한 빛이 내리비치지만 어딘가 서늘한 기운이 맴돈다. 지난 봄에 낙동강 상류를 걸을 때 광경이 생각나기도 하고. 구름이 걷히고 나서 갑작스럽게 해가 나오고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던 강, 숲, 풀.. 옆 건물에서 전시 중인 고흐의 그림( http://suhhyng.pe.kr/?p=1227 )은 지중해에 가까운 아를의 빛을 담고 있다면 로슨의 그림은 추위가 사그라드는 겨울의 빛을 담고 있다. ‘Connecticut Trout Stream’처럼 빛이 무뚝뚝하게 다가와 온기를 전해주는 계절아, 어서 와라. 햇빛이 부족하거든.

 

<Connecticut Trout Stream>, Ernest Lawson – 미국 인상주의 한국특별전,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2012.12.22~2013.3.29)

이태원, 판소리, 카페, 북.

2012년 12월 27일

나에겐 다른 이와 술을 마실 때마다 나오는 특이한 습관이 있다. 약간 취했다 싶으면 사람들에게 맥주와 에스프레소를 섞어서 돌리기 시작한다. 원하든 원치 않든 함 잡숴봐. 에스프레소 콘 비라입니다. 비율은 에스프레소 원샷에 라거 330ml 어쩌고 저쩌고. 음. 이 야그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 어느 주말 이태원이었다. ‘좀’ 취한 나는 사람들에게 에스프레소 콘 비라를 만들어주겠다고 하며 자리를 떴다. 허나 이태원에서 맥주만 마셨지,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어 골목을 헤맸다. 에라, 카페베네 가자 하는 순간 아주 작은 카페를 찾았다. 들어서자마자, 니 내 설움 들어봐라! 네? 오디오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위국땅 백성들아 싸움가자 천아성 외난 소리 족불리지(足不履地) 나를 끌어내니 아니 올 수 없든구나. 어느 곱상한 남자가 카페 구석에서 북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춘다. 스피커는 걸쭉한 욕을 뱉는다. 내가 너무 취했나? 진짜 조금만 마셨는데. 지나간 맥주병 수를 헤아려본다. 신나게 북을 두드리던 남자는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 오디오의 볼륨을 줄인다. 뭐 드릴까요? 에스프레소 더블 샷 두 잔 주세요. 이 노래 적벽가 맞나요? 오, 아시네요. 누가 부르는 거죠? 박동진 명창이에요. 그는 볼륨을 높인다. 너희 아직 술잔 먹고 재담 취담(醉談) 실담(實談) 허담(虛談) 장담(壯談) 패담(悖談)허거니와 명일대전(明日大戰) 시살(弑殺)헐 제 승부를 뉘 알소냐? 고수의 추임새에 커피가는 소리가 묻힌다. 커피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차, 여기 쿠폰 가져가세요. 나는 카페를 나오고 그는 다시 북을 잡는다.

다음에 이태원을 지나칠 때마다 이 카페에 들르곤 했지만 북을 두드리던 남자를 다시 보지 못하였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꿈이였나 싶기도 하고. 이태원, 카페, 판소리, 북의 조합이라. 음. 이 야그가 왜 나왔더라.

아, 코트 뒤적이다 그 때 받은 쿠폰이 나와서..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

보건소 회식이 끝난 후 2차 가기가 싫더라. 발리에 일찍 들어가기도 그래서 읍내를 걷기 시작한다. 가로등이 드문드문한 으슥한 길에도 달빛이 환해 걸을 맛이 난다. 콧구멍을 얼어 붙게 하는 바람에도 이따금 하늘을 보면 너무나 밝은 별들 때문에 추위마저 잊게 된다. 어떤 천문학자가 한 말이 생각난다. 노래가사에 ‘너에게 별빛이 되어’ 이런 말 있죠? 이 항성 스펙트럼을 보시면 칼슘에 해당되는 흡수선이 있습니다. 네, 우리 몸에 있는 그 칼슘과 같은 원소입니다. 나중에 우리가 소멸되어서 다른 행성의 누군가 에겐 빛이 될지도 모르는 거죠. 근사한 말이야. 이걸 어디서 봤더라. 옳지, 정말 멋진 제목의 영화였어.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

영화의 배경은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이다.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고원에 위치한 사막으로 별빛을 보기에 최적의 장소여서 천문대의 메카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말하듯이 우리가 별을 볼 때 그 별의 빛은 과거로부터 온 것이다. 천문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과거 속에서 유물을 찾는 고고학과 비슷한 셈이다. 가까운 과거. 아타카마 사막에는 피노체트 정권의 차카부코 수용소가 있다. 그 곳에 갇힌 이들은 천문학을 서로 가르쳐주며 하늘의 별을 찾는다. 별빛을 보면서 그들의 처지를 잊고 자유를 느꼈으니까. 가깝고 아픈 과거. 칠레의 군부 독재 정권은 많은 사람을 납치해 고문하고 죽인 다음 시체를 아타카마 사막에 버렸다. 그리고 은폐를 위해 포크레인으로 뼈를 으스러뜨린다.

현재. 납치된 이들의 가족들은 삽 하나 들고 시체를 찾아 나선다. 발목, 손가락, 경추 등 뼛조각을 찾을 때마다 일희일비하고 온전한 유해를 찾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다. 천문대의 망원경은 하늘을 보고 유족들은 땅에서 시체의 흔적을 찾아 나서고, 별빛과 뼛조각은 칼슘 원소로, 그리고 과거의 기억으로 연결된다. 중력을 가진 것처럼 사람을 자꾸 끌어당기는 기억들.

다시 하늘을 본다. 밝다. 별빛은 누군가에게 자유, 환희를 가져다 주고 아니면 자꾸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였다.. 그나저나 너무 춥다. 그래, 지금처럼 덜덜 떨면서 걷다 들어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우연히 이 영화를 봤지. 영화관 나오면서 바라본 서울의 하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참 밝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차 몰면서 음악이나 들어야겠어. 별빛이 내린다~

http://youtu.be/mi0pCkk5JhA

리어외전

2012년 12월 26일

‘리어왕’을 읽고 책을 덮으면서 올라오는 탄식 그리고 한 마디. 아, 엿 같다. 아버지가 딸들에게 재산을 나눠주자마자 버림받고 부부간의 믿음은 사라지고 형제는 권력을 위해 서로를 모함한다. 그리고 모두 죽는다. 어찌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있나. 연극 ‘리어외전’을 연출하신 분도 그렇게 느끼셨나 보다. 그래서 원작의 대사를 살리되 결말을 좀 바꾸고 극의 이름에 ‘외전’을 붙였다. 이런 뭐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하지 말자며 극이 시작되지만 그게 쉬운 일인가. 굳이 무대 위가 아니더라도 돈, 권력 때문에 가족이 남남하며 찢어지는 일은 빈번하기에. 역시 ‘외전’에서도 익숙한 줄거리가 펼쳐진다. 아니야, 좀 다르다. ‘외전’은 그리스 비극에서 볼법한 코러스가 나와 틈틈이 극에 개입하며 춤과 노래, 임시 배역(?)까지 소화한다. 게다가 결말의 반전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9명의 코러스가 나와서 뛰어다니니 분위기가 너무 심각해지지 않고 분명 ‘비극’인데 자주 웃긴다. 원작과 다르나 더 잔혹한 ‘외전’의 마지막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야, 이제 이런 야그 반복하지 말자. 제발! 허나 우린 알고 있다. ‘리어왕’ 야그는 세계의 수많은 무대에서, 그리고 현실에서도 재현된다는 것을.. 그러니까 비극이지.

 

<리어외전> 고선웅 연출, LG아트센터. (2012.12.12~12.28)

2011~2012년 기억에 남는 책들. (문학)

2012년 12월 24일

나만의 독서 리스트 정리하기. 이번엔 문학, 그러니까 소설위주의 목록이다. 머리 밑바닥의 기억을 긁어 모아 글을 쓰는데 역시 내 취향이 잔뜩 묻어난 목록이다. 비문학, 교양 서적이라면 얕은 밑천에 감히 ‘추천’이라는 말을 붙이겠지만 문학은 그럴 수 없는 것 같다. 그래, 그냥 좋아하는 작품, 작가들을 소개하자. 혹시라도 다른 이가 이 글을 보고 관심이 생겨 작가의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한다면 그것으로 된 거야. 이런 심정으로 가볍게 시작했지만 역시 또 일이 커졌다. 뭐, 일단 밀란 쿤데라의 에세이 중 한 귀퉁이를 머금고 아래 목록을 휘리릭 지나치시길.

 

상이한 예술들은 상이한 방식으로 우리 뇌에 접근해서, 각기 다른 용이함으로, 각기 다른 속도로, 각기 다른 정도의 불가피한 단순화를 통해, 그리고 각기 다른 항구성으로 자리를 잡는다. 우리 모두는 문학사에 대해서 말하고 문학사를 내세우면서 문학사를 안다고 확신하지만, 공동 기억 속에서 문학사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수많은 독자들이 순전히 우연에 의해, 제각각 자신을 위해 그리는 단편적인 이미지들을 이어 붙인 패치워크다. 그런 모호하고 일시적인 기억들로 이루어진 구멍 뚫린 하늘 아래에서는 우리 모두 블랙리스트에 좌우된다. 우리는 자의적(恣意的) 평결, 검증할 수 없는 평결, 언제든지 멍청한 우아함을 흉내 낼 준비가 된 평결에 좌우된다. – “블랙리스트들 혹은 아나톨 프랑스에게 바치는 디베르티멘토”, 밀란 쿤데라.

 

2011~2012년 기억에 남는 책들. (문학)

 

1.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 알렉산드로 보파(이탈리아)

작년 봄에 읽고 나서 무척 맘에 들어서 아는 사람들 만날 때마다 선물해주는 책. 비스코비츠라는 이름을 가진 사마귀, 쥐, 민달팽이, 개미 등 다양한 동물들의 행동을 통해 인간 습성을 풍자한다.. 라고 갈음하기엔 굉장히 건조하게 느껴지니 일단 읽어보고 작가의 말랑말랑한 상상력을 느껴야 한다! 이건 사야 돼!

 

2. 물방울 – 메도루마 슌(일본)

일본의 문학이 아닌 ‘오키나와’의 문학이라 칭해야 할 것 같다. 태평양 전쟁 때 무의미한 희생을 당해야 했던 오키나와 주민들의 애환을 따뜻하면서도 유머러스한 필치로 그려낸다.. 이 단편집이 맘에 들어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도 읽었는데 이 또한 훌륭하더라. 수록된 단편 중 하나인 ‘바람소리’ 서평 참조. ( http://suhhyng.pe.kr/?p=1039 )

 

3. 야쿠비얀 빌딩 – 알라 알아스와니(이집트)

부패한 정치인, 승진이 막혀 근본주의자가 된 젊은이, 현실에 관심 없는 부자 등등 한 아파트에 사는 여러 인간 군상을 통해 이집트 혁명의 배경을 되짚어볼 수 있다. 병든 사회의 단면을 들여 보고 있자면 아랍의 봄이 갑자기 터진 사건이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만약 소설이 생생한 비공식적 역사책으로 기능한다면 그 예로 이 작품을 꼽고 싶다.

 

4. 칠레의 밤 – 로베르토 볼라뇨(칠레)

로베르토 볼라뇨는 이 작품에서 칠레 군부 독재에 협력했던 지식인들을 글로써 처단한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를 다룬 점에서 우리나라의 상황과 통하는 면이 많다. 한 사람의 중얼거리는 회고가 계속 이어지는 형식으로 처음엔 당황스럽지만 한번 흐름을 잡으면 볼라뇨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작가가 원래 이 작품의 제목을 ‘지랄 같은 폭풍’이라 지으려다 출판사에서 만류했다는데 웬지 그 심정이 이해될 정도로 어둡고 광기 어린 작품이다.

 

5. 달에서 떨어진 사람들 – 알베르토 산체스 피뇰(스페인)

괴물이 등장하는 괴기(?)환상소설(콩고의 판도라, 차가운 피부)을 쓰시던 분께서 내놓은 톡톡 튀는 단편집이다. 깔끔하면서도 어느 한 편으로는 냉정함이 느껴져 카프카를 떠올리게 된다. 특히 ‘일요일에는 절대로 추로를 사지 마세요’가 인상적이다. 무죄임에도 절대권력에 의해 유죄를 선고받을까봐 억눌린 개인의 모습,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괜한 일에 엮일까 달아나는 무서운 무관심 등을 꽤나 건조하게 표현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감각은 참 감탄스럽다.

 

6. 어느 미술 애호가의 방 – 조르주 페렉(프랑스)

오직 그림들에 대한 묘사로만 이루어진 특이한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마치 카탈로그를 들고 미술관 안을 걷는 느낌이 든다. 수많은 그림에 담겨진 야그 조각들이 모두 모여 마지막에 뒤통수를 때리는 쾌감도 대단하다. 작가 분이 워낙 그림에 애착이 많은 만큼 그림 경매에 대한 풍자가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소설에 담긴 기법이 극단적으로 확장되어 나온 게 바로 ‘인생사용법’으로 이 또한 마술 같은 작품이다.

 

7. 어느 섬의 가능성 – 미셸 우엘벡(프랑스)

미셸 우엘벡은 천연덕스레 자신을 ‘극우 아나키스트’라 소개한다. 극우에 아나키스트라. 참 묘한 조합이지만 소설을 보면 약간이나마 이해된다. 일단 늙은 마초가 등장한다. 힘이 예전 같지 않음을 알지만 외로움은 싫고 사랑을 하고 싶다. 허나 우린 모두 개별적인 존재, 어차피 혼자야. 작가는 이 존재의 고통을 극단적으로 끌어내 읽는 이를 힘들게 한다. 고통을 끝내기 위해 미셸 우엘벡은 소설 속에서 인류의 멸망을 이끌어내고 사랑을 느끼지 않는 신인류를 탄생시킨다. 늙고 불쌍한 마초의 절규를 끝까지 참아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보는 순간 짜릿하고 심지어 희망마저 느끼게 된다. 미셸 우엘벡의 모든 것을 쥐어짜낸 듯한 작품. 매우 외롭거나 뭔가 꺾인 느낌에 괴로워하는 남자에게 권하면 바로 바닥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 처음부터 이 소설을 접하는 건 부담스러우니 ‘투쟁영역의 확장’으로 맛을 보시길.

 

8.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 – 샤리아르 만다니푸르(이란)

평범한 남녀의 만남도 시대, 관습을 잘 못 만나면 드라마가 된다. 이 작품의 남녀 이야기가 맞닥뜨린 건 현재 이란의 ‘검열’이다. 신체 접촉이 있어서도 안 되며 특정 행위를 연상시키는 단어도 쓸 수 없다. 그럼 어떻게 야그를 쓰나? 저자는 머릿 속의 자기 검열과 싸우고 자유를 찾고 싶어하는 주인공과 싸운다. 그리하여 굉장히 특이한 소설이 나왔다. 하고 싶은 말을 쓰면 이내 (삭제)마크가 붙어버리고 독자는 같은 장면을 묘사하는 두 개의 단락을 알아서 선택하는 호사를 누리게 된다. 왜 호사냐고? 이란에 있는 사람들에겐 선택권이란 없으니까. 작가는 이 작품이 이란 내에서 출판될 수 있으면 바랄 일이 없겠다고 하는데.. 그런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9. 나치와 이발사 – 에트가 힐젠라트(독일)

참 발칙한 소설이다. 수용소에서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나치 친위대 야그를 다루는 것도 금기 사항인데 그 친위대 중 생존한 인물이 유대인으로 신분을 속이고 이스라엘 건국에 앞장서다니. 간추린 내용만 보면 어이없기도 하고 웬 네오 나치즘인가 하겠지만 작가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입장에서 글을 쓴다? 현재의 이스라엘이 폭력 위에서 세워진 국가임을 상기해본다면 작가가 나치 친위대의 대학살과 이스라엘을 건국한 유대인의 광신적인 폭력성에는 차이가 없음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는지. 전자의 행위는 역사적으로 처단받고 지탄받으나 이스라엘을 비판하면 바로 반 유대주의, 인종주의로 몰리는 현실을 지적하려던 게 아닐까? 굉장히 새로운 방식의 홀로코스트 문학으로 마지막 장면까지 곱씹게 만드는 작품이다.

 

10. 에식스 카운티 – 제프 르미어(캐나다)

그래픽 노블이지만 이 작품은 마땅히 문학 범주에 넣어야 한다. 춥디 추운 겨울이 지속되는 캐나다의 인기 스포츠인 아이스 하키를 소재로 시골마을의 외로운 군상들을 촘촘하게 묘사해낸다.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쓸쓸함이 뚝뚝 묻어 나오는 이미지도 일품이다. 그저 한 번 보길 권한다. 이런 책을 내준 출판사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2012년 12월 22일

연말이라 그런가요?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원래 자주 상연되긴 하지만 요즘 부쩍 눈에 띄는 공연이 많네요. 오늘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러 국립극장에 갔습니다. 문화혁명을 배경으로 재해석한, 티엔친신이라는 분의 연출이랍니다. 사람들에게 어느 한 입장에 서있기를 강요한 극단의 시대에 펼쳐진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야그. 그럴 듯합니다. 시작은 흡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연상시킬 만큼 경쾌합니다. 노동자 공련파, 군부 전사파로 나눠진 10대들은 지붕을 타고 전봇대를 오르면서 싸우고 노래합니다. 저 땐 저랬나 보죠? 원작에서 느껴졌던 무거움은 사라지고 로미오와 줄리엣은 좀더 발랄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로미오는 줄리엣이 처음 만난 외간 남자여서 그런거지.”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제가 하는 말입니다만 여기에선 둘 다 하도 적극적이어서 유보해야겠네요. 게다가 줄리엣의 유모와 로렌스 신부가 굉장히 코믹하게 나오다 보니 심각해지려다 다시 분위기는 풀어지고 그럽디다. 그 수많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관람하면서 이렇게도 가볍고 역동적인 무대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정신없이 흘러갔습니다. 찐득한 비극을 원하는 사람한텐 맞지 않겠지만. 뭐, 이런 연출도 괜찮습니다. 이제 극이 끝나고 망상이 시작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죽지 않고 맺어졌다면? 첫 번째. 집안 불화로 이혼. 두 번째. 도망쳐서 사십여 년 간 같이 살면서 자녀 다섯을 두고 구걸하며 지낸다. 그러다 헤어진다. 로미오가 꿈에서 깨어난다. 앗, 꿈. 조신지몽 패러디군요. 세 번째.. 이건 그로테스크한 버전이라 여기서 그만두죠. 하하. 찬바람 맞으며 지하철까지 걸어가면서 온갖 음침한 변주가 생각나네요. 내일은 ‘리어왕’을 각색한 ‘리어 외전’을 보러 갑니다. 자칭 ‘오락비극’이라. 기대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 국립극장 해오름 (2012.12.18~12.29) — 국립극장

키사라기 미키짱

2012년 12월 21일

이상합니다. 코미디인 줄 알고 갔는데 미스터리 극입니다. 주위를 보니 다들 웃고 있네요. 네, 재미있긴 했습니다. 무대를 봅시다. 자살로 삶을 마감한 아이돌의 추모식에 아저씨 팬 다섯 명이 모입니다. 각자의 에피소드를 털어 놓으면서 세상을 떠난 이가 눈 앞에 보일 것 같네요. 다만 좀 걸리는 게 있습니다. 그들이 야그하는 아이돌의 이미지는 환상에 가깝습니다. 천사, 귀요미, 꿀벅지.. 그저 자신들의 욕망을 젊은 여자에게 투영한 게 아닐까요? 자, 아까 말했듯이 연극은 미스터리 극으로 탈바꿈합니다. 알고 싶지 않은 사실들이 하나 둘 밝혀집니다. 나의 미키짱은 그럴 리가 없어! 몇 개의 단서로만 이루어졌던, 위태로운 환상은 무너져 내립니다. 이제 삼촌 팬들의 어긋난 기대 혹은 이미지에 짓눌리던 ‘인간’ 미키짱의 모습만 남는 순간입니다. 문득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던 사진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거 있잖습니까, 아이유와 은혁이 함께 찍힌 사진. 수많은 팬들의 절교 선언이 이어지던 걸 보고 왜 그러는지 몰랐는데 갑작스레 감이 오네요, 하하. 원작이 영화라는데 그것도 챙겨봐야겠습니다. 그나저나 고정된 장소에서 5명이 모였을 뿐인데 거기에 없는 이를 살아 숨쉬게도 하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는 거. 연극이 아니면 어디서 볼 수 있을까요? ‘키사라기 미키짱’ 그냥 코미디로 웃으면서 봐도 되고 아님 지난 시절의 극렬한 팬심을 회상하면서 보면 더 재미있을 것 같은 작품입니다.

<키사라기 미키짱> – 컬처스페이스 엔유 (2012.11.29~2013.02.24)

 

한꺼번에 두 주인을

2012년 12월 18일

연극 ‘한꺼번에 두 주인을’의 기본 얼개는 헤어져야만 했던 두 연인의 극적인 재회를 그리는 것이지만 바로 하인 트루팔디노 덕분에 평범한 애정극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트루팔디노는 연인인 두 주인을 섬기면서도 당당하다. ‘어차피 그들은 돈, 음식을 주는 척하니 나도 일을 하는 척하겠다.’ 이런 식이랄까? 계층을 넘어 조롱과 풍자를 해대고 심지어 관객과 함께 야그하면서 무대 위에서 논다. 게다가 슬랩스틱에 노래가 삽입되면서 이런 난장이 또 없다. 트루팔디노의 맹활약 속에 두 연인의 사랑은 묻히고 갑작스레 연극은 ‘하인의 사랑 찾기’로 변한다. 18세기 이탈리아 희극을 보면서 한국의 마당극을 떠올리게 되다니. 미친 존재감을 뽐내며 관객과 함께 호흡한 트루팔디노 역의 백원길 씨에게 찬사를 바치고 싶다. 이 분 덕분에 더욱 즐거운 난장판을 보게 되었으니까. 추운 겨울에 큰 웃음을 원한다면 여러 요소가 듬뿍 버무려진, 시끌벅적한 희극 ‘한꺼번에 두 주인을’도 괜찮은 선택일 것 같다.

<한꺼번에 두 주인을>, 명동예술극장 (2012.12.1~12.30)

White Rain

2012년 12월 17일

진료실 뒤 쪽에 고추 밭뙈기가 펼쳐진 것을 이내 자그마한 산이 가로막고 있다. 비가 올 때 창문을 열고 음악을 틀어 놓는데 그동안 밭은 푸름에서 빨갛게, 그리고 우중충한 흙으로 변하였다. 어느새 비는 눈이 되었고, 이제 12월이다. 괜한 상념에 잠기지 않으려 책을 읽고, 산책을 해봐도 눈비가 오는 창문 밖을 보노라면 가벼운 타향의 세월 속에 금새 가라앉는다. 다행히도 주말은 찾아오고 서울을 발길 가는 대로 돌아다닌다. 그러다 예정 없이 들른 미술관에서 기막힌 작품 하나를 마주친다. “White Rain” 가라앉음을 회복하려 힘들게 올라온 서울에서 되레 침잠하게 만드는 작품을 만나다니. 빛의 파편이 아크릴 막대에 투사되어 물의 질감을 전달해주는데 그 속을 걸으면 빛의 흐름이 바뀌어 그 느낌이 비를 맞는 것보다 강렬하다. 비와 관련된 이런저런 기억, 그리고 진료실에서의 한적함마저 상기시키는 ‘빛의 비’. 계절이 바뀌고 이 아크릴 바 사이를 다니면 또 다른 기억들을 꺼내겠지? 전시 기간이 짧아 그러진 못하겠지만 나중에라도 다시 접하고픈 작품이다.

<White Rain>, 타카히로 마츠오. – “인공정원”,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2012.12.04~23)

영상 : http://youtu.be/UfhI9faOH4E

단골남.

2012년 12월 16일

교보문고에 책을 주문해 놓고 찾으러 가는데 직원 분이 대뜸. 서형탁 씨죠? 네? 네. 잘 모르는 사람이 내 이름을 알고 있다면 조금은 당황스럽다. 물론 자주 가니 그럴 수도 있겠다만. 한달 전까지 내 책을 주시던 다른 직원도 그랬지. 책을 받고 문을 나서기까지 겨우 20초 정도 걸리지만 10개월 넘게 매 주말마다 반복되다 보니 이젠 나를 보자마자 책을 꺼내주시는 정도가 되었다.

비슷한 사례. 자주 가던 대학로의 공연홀에서 예매한 표를 찾으려는데 내 이름을 묻지 않고 바로 준다. 게다가. 아차 할인권을 놓고 왔네요. 뭐, 자주 오시니 담에 가져오세요. 감사합니다.. 통영에서 있던 일이 기억난다. 이틀 동안 6개의 음악회를 듣는 강행군의 일정이었지. 중간에 통영 꿀빵을 먹으며 맥주를 까고 있는데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온다. 어라? 누구시지. 매표소 직원이 회원 정보에 공연정보를 받는 집 주소가 없다며 적어달란다. 뭐, 이틀 동안 4번 이상 표를 찾았으니 이름을 외울 법도 하지.

전혀 모르는 이에게 이름이 아닌 다른 ‘행동’으로 기억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태원의 어느 폅에 친구랑 들어갔는데 어떤 직원이 반갑게 맞아준다. 또 오셨군요. 어라 저 아세요? 매주 토요일 낮마다 런던 프라이드 드시는 분 아니세요? 맞아요. 무슨 일 있길래 낮술을 자주 드시나요? 별일 없어요.. 그 사람한테는 내가 ‘런던프라이드 낮술남’인 셈이다.

내 인상이 특이한가? 뭐, 그냥 단골이라서 그런 거겠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2012년 12월 13일

토요일 11시쯤이었을 깨다. S는 침대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한다. 밥은 먹고 나가렴. 어머니께서 말씀하신다. 먹는 둥 마는 둥.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다. 문이 닫힐 쯤. 저녁은 집에서 먹어라! S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버스를 타고 명동에 도착한 다음 걷기 시작한다. 을지로, 종로 1, 2, 3, 4가. 5가 모퉁이에 있는 두산아트센터에서 연극 ‘소설가 구보 씨의 1일’을 볼 것이다. “피리오드”

어머니는 구보가 제방에서 나와, 구두를 신고, 단장을 끄내 들고, 문깐으로 향하야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어뒤, 가니.” 대답은 들리지 안헛다. “일즉어니, 들어오늬라” 역시, 대답은 들리지 안헛다. 어머니는 밤낮으로, 책이나 읽고, 혹은 공연스리 밤중까지 쏘다니고 하는 아들이 보기에 딱하고, 또 답답하였다. “피리오드”

큭. S는 웃는다. 내 야그 아닌가? 구보는 아무런 용무 없이 종로 네거리를 바라고 걷는다. S도 그렇다.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 종로 통인동, 효자동, 청운동, 부암동을 걸어 간다. 구보는 전차에서 마주치는 여인을 보며 상상에 빠지기도 하고 백화점에서 마주친 가족을 보며 행복은 무얼까 생각에 잠긴다. S도.. 그렇다. 이런저런 망상을 만들어 내면서, 걷는다. “피리오드”

극적 사건이 없는 일상 생활에 돋보기를 들이댄 박태원. 구보는 박태원의 분신이 되어 영상, 음악, 무대 장치 등 여러 매체를 가지고 구현된 서울의 여러 장소를 돌아다닌다. 종로, 동대문, 전차, 다방, 술집, 명동, 백화점.. 연극에서 구보는 뭘 위해 그렇게 돌아다니는 건가? S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민이나 한적한 고독을 잠시 잊고 그저 사람 구경을 하려고. 활기차고 다채롭잖아. “피리오드”

구보는 생각한다. 이제 나는 생활(生活)을 가지리라. 내게는 한 개의 생활을, 어머니에게는 편안한 잠을-. 막이 내린다. S는 가만히 있다. 이뤄지지 못한 사랑 혹은 죽음의 야그가 없는 내용에서 무슨 감동을 받았길래. 어머니의 말씀. “평범한 게 소중한 거야.” 그렇다. 두 시간 남짓한 연극에서, 지나고 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일상의 순간들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다니. 그리고 구보의 동선과 많이 겹쳐서 감정이입을 더 했을지도. 이제 S는 고달픔과 추위를 잠시 잊었든, 혹은 잊으려 노력하였든 집으로, 방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피리오드”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과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의 대본 일부를 사용함.

-연극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두산아트센터 (2012.11.27~12.30)

더 헌트 (Jagten)

2012년 12월 12일

어린 아이의 말 실수 하나로 성추행범으로 몰리면 어떻게 될까? 더군다나 작은 마을이고 그 아이가 죽마고우의 딸이라면? 더 헌트(Jagten)는 그런 악몽을 너무나 폭력적으로, 생생하게 재현한다. 주인공 루카스는 단지 아이의 말 한 마디로 변태가 되고 그리도 친절했던 친구들은 그에게 집단 린치를 가한다. 그가 쌓아왔던 모든 인간관계가 파괴되는 순간이다.

이리도 핍박받는 영화 주인공이 있었던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어둠 속의 댄서’가 얼핏 떠오른다. 다만 ‘어둠 속의 댄서’에선 여자 이주 노동자가 주인공이어서 잠시나마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 여길 수도 있고 뮤지컬 장면이 간간히 삽입되어 일말의 위로라도 건네지만 ‘더 헌트’는 그런 거 없다. 루카스가 여태 알아온 사람들이 안면몰수하고 그를 버러지처럼 대하는 걸 그저 힘없이 스크린 밖에서 지켜봐야 할 뿐이다.

진실? 무죄 추정의 원칙? 그런 건 사치였다. 이제 마을 공동체에서 루카스는 어서 지워 없애야 할 티끌이다. 직장에서 쫓겨나고 상점에서 물건 구매를 거부 당하며 크리스마스 이브 미사에서마저 따돌림을 당한다. 영화 보면서 심란했던 이유는 이게 결코 가상의 야그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신문, 방송, 혹은 어떤 커뮤니티에서 한 번 크게 터뜨려 놓고 사건 처리나 재판 결과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서 한 사람이 바보 되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깊은 줄 알았지만 한 순간의 오해로 금이 가는 사람의 관계들. ‘더 헌트’는 인간 관계의 위태로움을 관객들에게 거칠게 들이대는, 참으로 무서운 영화이다. 마음을 울적하게 하여서 여태 보지 않으려 피해 왔던 것들을 능숙하게 끄집어 내는 토머스 빈터버그 감독의 솜씨라던지 정말이지 눈물 머금게 하는 매즈 매켈슨의 처절한 연기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추천하고픈 작품이다. 어서 정식 개봉 해야 할 텐데 말이다.. 여튼 이 영화의 정곡을 찌르는 듯 하는 G.K.체스터턴의 한 경구로 글을 마무리 하고 싶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또 원수를 사랑하라고도 말한다. 아마도 일반적으로 그 둘이 동일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Cool犬

그래, Cool犬이라 부르자.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산책할 때마다 갑자기 어디에선가 따라 나서 같이 걷는 개가 있다. 한 바퀴 돌고 나면 그 개는 집으로 들어 가고 나는 산책을 마무리한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서 좀 이상한 일을 발견했다. 제 집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더니 볼 때마다 들어가는 집이 달랐다. 그렇다. 그 개는 떠돌이 개였다. 다만 여러 집에 들어가는 품새가 너무 당당해서 그리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먹이를 구걸하거나 꼬리도 흔들지 않는 떠돌이 개라니. 나는 그저 그 개의 점심 산책 동행자였다. 정말 쿨하지 않은가? 그래, 쿨견이라 부르자. 이제 기온이 점점 낮아지고 쿨견이 점심 산책을 빼먹는 경우가 잦아졌다. 허나 걱정을 할라치면 개는 나도 모르게 옆에 다가와 같이 산책을 시작하곤 했다. 폭설이 내리는 저녁이었다. 구멍 가게를 다녀오다 집 앞에서 쿨견과 마주친다. 몸을 덜덜 떨며 연신 재채기를 하고 있다. 나는 마당 창고 문을 열고 들어오라 손짓한다. 개는 망설이다가 돌아선다. 어이! 소리쳐 부르지만 개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튿날부터 쿨견이 보이지 않았다. 눈 위로 알 듯 말듯한 발자국들만 남아 있다. 나는 산책하다 괜스레 주위만 돌아볼 뿐이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눈이 슬슬 녹기 시작한다. 오늘도 걷는다. 기온이 좀 따뜻해져 걸을 만하다. 갑자기 옆에 기척이 있어 돌아보니 쿨견이 같이 걷고 있다. 비쩍 말랐지만 당당한 걸음으로 말이다. 살아 있구나! 개는 슬쩍 올려다보고 만다. 반응 참 무덤덤하네. 코스를 끝마쳐간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옆을 보니 어느새 개는 사라졌다. 작은 발자국만 남긴 채.. 역시 Cool犬이구나.

나만의 리스트.

아는 이에게 독서 스터디용으로 읽을 만한 책 추천을 부탁 받아서 정리를 시작한 건데 일이 좀 커졌다. 지난 2년 동안(2011~2012) 읽은 ‘비문학’ 서적 중 쉽게 읽히고 야그 거리가 풍부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집에 가서 다시 펼쳐보고 예전에 썼던 서평들을 모으는 작업이 생각보다 쉽진 않더라. 그래도 결산한다는 느낌으로 나름 즐기면서 목록을 작성했다. 마무리 하고 보니 참으로 잡스럽게 읽어댔구나. 이 김에 ‘문학’ 서적(그래봤자 대부분 소설이겠지만)들도 추천 리스트를 만들어 봐야겠다.

 

(인문/비평)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피에르 바야르
http://suhhyng.pe.kr/?p=879

제목과는 달리 독서라는 행위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담긴 책이다. 완벽한 교양이라는 환상을 떨치고 책에 대한 자신만의 담론을 만들어 나가는 길을 제시해주는 독서입문서.

 

(사회/노동) 노동의 배신 – 바버라 에런라이크
http://suhhyng.pe.kr/?p=1059

저자가 직접 비숙련 노동에 뛰어들어 기록한 ‘적응 실패기’. 2012년에 읽은 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다. 자세한 건 서평 참조.

 

(근현대사/중동/만화) 팔레스타인 – 조 사코

그림으로 표현되는 끝없는 증오의 역사. 처음에는 경악하지만 취재가 반복되면서 점점 피곤해지는 감정을 가감없이 전달하는 조 사코의 그림은 어느 사진, 글보다도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 책 덕분에 역사를 다룬 그래픽 노블 장르에 꽂혀 아트 슈피겔만의 ‘쥐’(나치 강제 수용소),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여성의 입장에서 본 이란 혁명)를 접하였는데 다들 추천하고픈 작품들이다.

 

(의료윤리) 안락사는 살인인가 – 토니 호프

의학 윤리의 다양한 쟁점을 다룬 입문서. 뒤에 더 읽어볼 만한 책 목록을 수록하고 있어서 더 깊고 멀리 나아가게 하는 진정한 입문서이다.

 

(경제) 자본주의 고쳐쓰기 – 세바스티안 둘리엔 외 2명

1부에서는 미국발 경제위기 근원을 경제사를 훑어가면서 비교적 쉽게 설명하고 2부에서는 시장경제를 어떻게 고쳐서 운영할지 방향을 제시한다. 아무래도 유럽 쪽의 시각이 듬뿍 담긴 책이지만 최근 대선 레이스에서 ‘경제민주화’와 관련해서 눈여겨보면 이런저런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시간이 있다면 ‘부자 나라는 어떻게 부자가 되었고 가난한 나라는 왜 여전히 가난한가’도 꼭 읽어보시길.

 

(문화사/음식) 차별받은 식탁 – 우에하라 요시히로
http://suhhyng.pe.kr/?p=896

소외된 이들만의 식단을 소재로 하나의 미시사를 기록한 르포로 우리가 먹는 음식에 담긴 사연은 무엇일지 음미하게 한다. 서평 참조.

 

(건강/심리학) 몸에 갇힌 사람들 – 수지 오바크

다이어트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발견한 보물. 최근에는 성형수술을 한다거나 살빼는 것을 고장난 기계의 부속품을 갈아끼우는 것 마냥 당연시하고 쉽게 여긴다. 이 책은 사회의 몸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가 개인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따뜻한 문체로 풀어낸다. 점차 ‘세계화’ 되어 가는 몸의 이미지와 그걸 쫓는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다시 정립해야 할 것인가.

 

(사회/문화) 자기 계발의 덫 – 미키 맥기
http://suhhyng.pe.kr/?p=598

범람하는 자기 계발서를 분석하여 정리한 역작. 바버라 애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 (http://suhhyng.pe.kr/?p=751 )이 신랄하고 읽기 편하긴 하지만 ‘자기 계발의 덫’은 좀더 많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한 번 읽으면 시중의 자기 계발서들을 제목과 책 소개만 보고도 무슨 경향의 내용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사회 안전망의 부재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 끊임 없이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게 만드는, 자기 계발서의 마약 같은 면모를 폭로한다. ‘긍정의 힘’을 중얼거리며 자신을 격려한 적이 있는 사람이 이 책을 보면 그 말의 연원이 썩 유쾌하지 않다는 거에 놀랄 것 같다.

 

(사회/철학) 맹신자들 – 에릭 호퍼
http://suhhyng.pe.kr/?p=707

사회 변혁을 일으키는 대중 운동에 대한 ‘길거리 철학자’ 에릭 호퍼의 단상들. 개인(지식인)들의 불만에 주목하여 사회 변화를 분석해내는 시각은 매우 독창적이다. 너무 개인적인 차원에 맞춘 건 아닌지 약간 불만이지만 이만큼의 통찰을 간단명료하게 보여주는 책도 드물다.

 

(가족/심리학) 결혼하면 사랑일까 – 리처드 테일러

‘불륜’에 관한 보고서. 옳고, 그르다의 판단을 떠나 왜 불륜이 이루어지는지를 수많은 남녀들의 인터뷰를 기반으로 분석한다. <불륜 때문에 결혼생활이 끝나는 게 아니라 이미 ‘끝난’ 결혼이 불륜으로 이어진다> 이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이 책을 같이 읽었던 보건지소 여사님의 평이 굉장히 가슴 아프다. ‘총각이 벌써 이런 책 읽으면 결혼은 어떡하누.’

 

(뇌과학/인지심리학/종교) 종교 본능 – 제시 베링
http://suhhyng.pe.kr/?p=876

진화론의 시각에서 종교의 근원을 다루는 책. 자세한 건 서평 참조. 비슷한 주제를 다룬 ‘신의 뇌’( http://suhhyng.pe.kr/?p=740 )보다 내용이 더 풍부하고 깔끔하다.

선귤당기.

2012년 12월 7일

너의 이름은 너의 몸에 속한 것이 아니라 남의 입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남이 부르기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되고 영광스럽게도 치욕스럽게도 되며 귀하게도 천하게도 되니, 그로 인해 기쁨과 증오의 감정이 멋대로 생겨난다. 그 때문에 유혹을 받기도, 기뻐하기도, 두려워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공포에 떨기까지 한다. 이빨과 입술은 네 몸에 붙어 있는 것이지만 씹고 뱉는 것은 남에게 달려 있는 셈이니, 네 몸에 언제쯤 네 이름이 돌아올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저 바람 소리에 비유해보자. 바람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인데 나무에 부딪침으로써 소리는 내게 되고 나무를 흔들어대기도 한다. 너는 일어나 나무를 살펴보아라. 나무가 가만히 있을 때 바람이 어디에 있더냐? 너의 몸에는 본시 이름이 없었으나 몸이 생겨남에 따라 이름이 생겨서 네 몸을 친친 감았다. 그것이 너를 겁박하고 억류하는 걸 알지 못할 뿐이다.

..어려서는 아명이 있고 자라서는 관명이 있으며, 덕을 나타내기 위해 자를 짓고 사는 곳에 호를 짓는다. 어진 덕이 있으면 선생이란 호칭을 덧붙인다. 살아서는 높은 관작으로 부르고 죽어서는 아름다운 시호로 부른다. 이름이 이미 여럿이라 이처럼 무거우니 네 몸이 장차 그 이름을 감당해낼지 모르겠다.

-‘선귤당기’, 연암 박지원

프로파간다

2012년 12월 6일

한국인의 밥상 ‘고추 먹고 맴맴’ 중 영양 고추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최불암 씨의 그윽한 해설이 나온다. ‘청양 고추는 원래 청송과 영양에서 시험 재배되기 시작한 품종으로 청송의 청, 영양의 양을 따 청양이라는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나는 TV를 보면서 영양군과 영양고추공사가 저 대목을 넣기 위해, 그리고 저 방송 시간을 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 지를 생각하며 피식했다. 지금 영양군은 ‘지속적 설파(continuous interpretation)’를 하고 있구나. 지속적 설파란 온갖 방법을 동원해 대중의 마음에 다가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상을 각인시키는 홍보 방식이다. 다음은 또 다른 예.

낮 뉴스에서 갑작스러운 배우자 사망으로 인해 미처 노후 준비를 못한 사람들의 생활고를 보도한다. 그러면서 모 보험사의 통계를 인용한다. 뉴스가 끝나고 생명보험 광고가 연달아 나온다. 어서 가입하세요~ 낮에 뉴스를 볼 시간이 있는 사람들의 연령층을 대충 고려해보면 목적이 굉장히 분명해 보이는 뉴스 보도다. 앞에서 언급한 ‘지속적 설파’에 ‘집단 형성(group formation)’이 결합된 사례이다. 뉴스는 대중에게 프로파간다(선전)을 하고 보험사들의 광고로 깔끔하게 마무리하다니 감탄이 나올 뿐이다.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프로파간다’에 쓰여진 PR(홍보) 방법들이 방송에서 적용된 사례들이다. 그저 어림짐작으로 본 게 저 정도인데 실제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선전에 파묻혀 살고 있는 걸까. 더 놀라운 건 ‘프로파간다’가 쓰여진 연도가 1928년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 나온 대중심리를 조작하는 수법들이 아직도 유효하다니. ‘프로파간다’를 읽은 지는 좀 되었다만 요즘 선전이 난무하는 ‘선거의 계절’에 다시 보니 여러 대목에서 무릎을 치게 만드는 진정한 고전이다.

Minor Swing

2012년 12월 4일

중2때부터 클래식, 재즈 음반을 모았으니 햇수를 세보면 꽤 오래된 취미가 되었다. 특이하게도 나는 히스토리컬 레코딩, 그러니까 옛날 녹음에 열광하였다. 30,40년대 78회전 SP레코드에 기록된 음악에 왜이리 끌렸는지 모르겠다만. 프리츠 크라이슬러, 요셉 시게티, 야샤 하이페츠 등등 옛 바이올리니스트를 죽 듣다가 장르를 넘어 스테판 그라펠리의 음반에 연이 닿았다. 단지 오래된 바이올린 녹음으로만 알고 산 것인데 처음 듣고 나선 얼마나 놀라웠는지. 그게 바로 재즈와의 만남이기도 했다.

스테판 그라펠리 곁에는 언제나 장고 라인하르트의 기타가 있었고 이 분의 연주도 범상치 않은 터라 또 빠져들었다. 이 두 거장이 함께 한 트랙들은 모두 음악사의 귀중한 순간들이지만 그래도 딱 하나 고르라면 장고 라인하르트의 대표곡인 “Minor Swing”을 틀고 싶다. 이후 수많은 편곡을 들어도 맘에 드는 게 없을 정도로 열정적이고 애잔하며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살아있다.

포항에서 바다 끼고 7번 국도 따라 운전하면서 귀에 걸린 트랙이기도 하고. 내가 왜, 언제 이 곡을 들었는지 회상하다 중학교까지 거슬러 올라갔구나.

http://youtu.be/0jJBgAN7qNA

나에게는 얼굴을 쓰다듬을 손이 없다.

2012년 12월 3일

우연히 대학로에서 국립현대무용단의 공연을 보게 되었다. 단지 포스터에 끌려 충동 예매를 했던 것이었지만 생각보다 어려웠다. 발을 구르거나 손의 움직임 하나 하나가 의미를 머금고 행해지는 것일 텐데 그런 언어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대략의 분위기나 짐작해볼 뿐이었다. 공연을 보는 동안 내가 여태 봐왔던 춤들을 되새김질하였다. 남녀가 추는 끈적한 탱고, 크리스마스와 함께하는 클래식 발레, 중년의 위기가 오신 분들의 무도장 댄스, 손뼉치기와 발구르기에 장단 맞춰 추는 플라멩고, 북한TV에서나 볼법한 매스게임의 오싹한 군무群舞, 근육보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사나이의 클럽 댄스.. 모두 어떻게든 의도를 가지고 추는 춤들이다. 그럼 아닌 춤도 있나?

마리오 쟈코멜리의 사진 한 장이 생각났다. 눈이 좀처럼 오지 않는 이탈리아 세니갈리아의 신학교에 어느 날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쟈코멜리는 신부들이 기쁨에 겨워 아이들처럼 눈싸움을 하고 춤을 추는 장면을 필름에 온전히 담아내었다. 참 밝고 따뜻해서 보기만 해도 기분 좋게 만드는 막춤의 순간.. <나에게는 얼굴을 쓰다듬을 손이 없다> 글 쓰는 동안 발리에는 촉촉한 진눈깨비와 어둠이 내려 기분이 음침해졌는데 이 사진 보면서 마음을 달래야겠어.

마리오 쟈코멜리 사진전 <The black is waiting for the white> (2012.11.24~2013.2.24 서울 한미사진미술관)

유물.

그 할배는 계속 그 곳에 있었다. 내가 아침, 점심마다 산책할 때 그는 같은 곳에 앉아서 허공을 바라보거나 때때로 주위를 조금 서성이다 숨이 부친 듯 다시 자리에 앉곤 했다. 그러기를 7개월. 내가 걸을 때마다 그 자리에는 할배가 꼭 있었고, 마치 없으면 어색할 것 같은 배경의 한 요소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지난 주부터 그가 그 곳에 없다. 추워서 그런가, 별일 없으신가? 여러 의문을 삼키며 지나쳐 갔다. 오늘, 웬 버스가 그 곳에 있다. 앞에는 ‘근조謹弔’ 스티커를 붙인 채로. 사람들이 떠들며 집에서 세간을 들어내고 짐을 꾸린다. 7개월 동안 그 곳이 그렇게 시끌벅적한 경우를 본 적은 처음이다. 한 남자가 안을 두리번거리다 자물쇠를 채운다. 산책 한 바퀴를 더 돌고 오니 버스는 떠났고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했던 마당은 말끔히 치워졌다. 그런데 이상하다. 허전하지 않다. 지나치며 다시 뒤를 돌아본다. 할배가 짚고 다니던 낡은 나무 막대기, 그가 항상 앉아있던 의자는 계속 그 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