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마을, 천 개의 기억

2012년 11월 27일

도시에는 가족이 살고 가족들은 사진을 남긴다. 그럼 거꾸로 사진을 기반으로 가족의 기억을 되살리고 그 것들을 모아놓으면 하나의 도시에 대한 관념이 형성될까? ‘2012 서울사진축제’는 그런 과정을 생생히 보여준다. 사진들로 구성된 가족의 미시사微視史자료들을 통해 집, 골목, 거리의 추억들이 모여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변화무쌍한 모습이 그려진다. 여러 사진을 통해 구현되는 서울은 누군가에게 기회의 땅이요 소중한 삶의 터전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개발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확장해나가는 살아있는 괴물이기도 했다. 보통 시정 홍보라는 명목아래 무분별한 개발도 보기 좋게 포장하는 경우가 흔하다만 ‘2012 서울사진축제’는 가족의 따뜻한 기억, 악몽, 대도시의 자기 복제와 파괴, 확장 등 서울의 ‘유기체적’ 면모를 편향 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다시금 가족들의 사진첩을 뒤적이면서 웃음짓게 만들고 중력처럼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기억의 위력을 새삼 확인케 하는 사진전 아닌가 싶다.

<2012 서울사진축제> (11.21~12.30), 서울시립미술관

주酒 앞에서.

2012년 11월 24일

요즘 왜이리 어둡냐? 대뜸 엄마가 전화로 그럽디다. 글쎄, 좋은 일이 없으니까. 표정이라도 밝아야 좋은 일이 생기지. 전화를 끊고 생각해봅니다. 내가 항상 꾸부정한 얼굴을 하고 다니나? 기분좋은 일이 없는 건가? 아닐 겁니다. 미소를 짓는 일이 꽤 있습니다. 월요일 새벽에 발리에 도착하여 쏟아지는 별빛을 볼 때, 아침마다 커피를 내리고 한 모금 머금을 때, 거리를 다니면서 기억을 되살리는 음악과 마주칠 때, 낡은 차 시동이 한 번만에 틀어질 때, 치료해드린 환자가 고맙다고 사탕 몇 개라도 쥐어주실 때, 좋아라 하는 작가의 신작을 하루만에 받아볼 때, 산책하면서 떠돌이 개와 길고양이들이 무사함을 볼 때, 공보의라는 유예기간이 1년 넘게 남음을 확인할 때, 아직은 햇살이 따뜻하여 외투를 벗어야 할 때, 눈이 오기 전에 고개를 넘어 발리에 도착할 때.. 미소는 잠깐 나타날 뿐이지만 절 떠난 적은 없습니다. 어라? 일기예보를 보니 주말에 경북 산간에 눈이 내린다는군요. 이런 제길.. 잠시만, 아! 전 그래도 웃습니다. 이태원에서 맥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있으니까요.

나쁜 자석

2012년 11월 21일

옛날옛적에 자석들만 사는 나라가 있었답니다. 큰 문제가 있었죠. 자석들끼리 같이 만나고 야그를 하려 해도 서로 밀어내는 속성 때문에 모든 자석들은 혼자였습니다. 어느 날 한 자석은 다른 자석을 보고 한 눈에 반해버리지만 다가가질 못합니다. 그는 나쁜 자석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나쁜 자석이 되려면 힘이 빠져야 합니다. 자신이 힘을 잃도록 때려달라고 다른 자석에게 부탁할 수도 없었던 그는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집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이젠 다가갈 수 있어!”

10년 만에 만난 세 명의 친구. 그들은 자살한 옛 친구 고든과 그가 남긴 동화’나쁜 자석’을 회상한다. 음침한 구석이 있었던 녀석이었어. 가까이 하기 힘들었지. 이렇게 그들 가슴 속엔 나쁜 자석이 웅크려 있다. 어렸을 때 친했다곤 하지만 커가면서 상대방을 배신하고 기만과 은폐로서 서로를 밀어낸다. 해묵은 감정을 드러내고 대립은 극한까지 치닫는다. 그러는 와중에 갑작스런 동화와 같은 환상적인 결말..

‘나쁜 자석’에 실제로 나오는 배우의 숫자는 4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정된 무대 공간에서 동화와 현재, 과거를 드나들며 극도로 뽑아낸 놀라운 상상의 규모 덕분에 수십 명이 출연한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거기에 가슴 먹먹한 등장인물들의 고독까지 표현해내니 대단한 작품이요, 연출이다. 작품 전체에 도사리는 감정적 스트레스를 이겨내면 결말에 이르러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언제나 아무런 정보 없이 예매해두고 연극을 보러 다니다 마주친, 고독과 기억에 관한 동화 같지만 처절한 작품’나쁜 자석’. 더블 캐스팅이라는데 다른 캐스팅으로 또다시 보고 싶다. <나쁜 자석>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 2013년 1월 27일까지)

다르게 보기

2012년 11월 20일

유화는 흔히 물건들을 묘사한다. 캔버스에 물건들을 그리게 하는 것은, 물건들을 실제로 사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다른 방식으로 보기’의 저자 존 버거는 물건을 소유하는 것과 유화 속에 그려진 물건을 보는 것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과거에 유화를 주문한다는 것은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인증샷’ 이었음을 주장한다. 이 분 야그에 따르면 유화란 곧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이요,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미술형식이다. 결국 유럽의 유화 문화는 세상을 향해 난 창이라기보다는 벽 안에 소중하게 박아놓은 금고에 더 가깝다. 가시적인 사물들을 한데 모아 저장해둔 금고 말이다.

더 나아가 존 버거는 현대 사회의 광고가 유화의 이런 시각적인 언어에 깊게 의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광고 자체가 소비사회의 문화인 만큼 이미지를 통해 이 소비사회가 스스로에 대해 갖는 신념을 선전한다. 차이가 있긴 하다. 유화는 소유자가 만끽하는 ‘현재’ 물질적 순간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니 자연히 현재 시제로 그려져 있다. 반면 광고는 언제나 미래 시제를 사용할 뿐이다. “만일 당신이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될 수 없다.”라는 두려움을 유발시키고 이를 이용한다. 이 제품으로 이성의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삶은 행복하고 빛나는 것이 ‘될 것이다.’ 등등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40여 년 전에 쓰여진 글임에도 굉장히 급진적으로 느껴진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미술 감상 방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고 있으니까. 그리고 단지 미술 작품에만 머무르지만 않고 현대 광고문화까지 확장해내는 담론은 탁월하게 느껴진다. 이제 존 버거가 마지막 장에 걸쳐 전개하는 광고에 대한 통찰을 정리하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광고가 보여 주는 것들은 모두 장차 어떤 사람에 의해 획득되기를 기다린다. 획득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행동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고,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은 다른 모든 느낌들을 없애 버린다. .. 광고가 참조하고 인용하는 것들은 넓은 영역에 걸쳐 있는 반면, 광고가 제공하는 것은 좁은 범위 안에 한정되어 있다. 다른 모든 인간의 기능이나 필요성은 ‘획득할 수 있는’ 능력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동질화되고 단순화된 희망들은 정체불명이긴 하지만 강력하고, 물건을 살 때마다 반복되면서 마력적인 약속이 된다. .. 광고는 이런 문화의 생명이고-광고 없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동시에 광고는 이 문화의 꿈이다. 자본주의는 다수의 관심을 가능한 한 좁은 범위 안에 가두어 놓음으로써 그 생명을 이어나간다. 이것은 한때, 일단은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수탈로 달성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발전된 국가들에서 무엇이 바람직한 것이고 무엇이 바람직하지 않은가에 잘못된 기준을 부여함으로써 이를 달성하고 있다. – ‘다른 방식으로 보기’, 존 버거

철학자의 디자인 공부

2012년 11월 19일

우리에게 ‘디자인’이라는 말은 어떻게 다가올까? 우아하고 아름답고 남다른 취향 혹은 ‘나는 이런 걸 소유하고 있다’라는 과시 아니면 기업에서 제품을 팔기 위한 마케팅용 단어? 그럼 디자인이 단지 사물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장식 미술’과 다른 점은 무엇이지? ‘철학자의 디자인 공부’에서 스테판 비알은 단순한 장식 미술을 뛰어넘는 디자인의 효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 번째 디자인 효과는 ‘형태조화효과’다. 선의 우아함이나 윤곽의 섬세함, 입체의 순수함, 덩어리의 균형, 시각적인 유혹, 그래픽의 매혹이 없는 곳에, 한 마디로 형태의 조화가 없는 곳에서는 그 어떤 디자인도 생겨날 수 없다. 형태상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현실의 삶에서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충동적인 본능을 만족시키는 대용물의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더 잘 견뎌내고 황홀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 대용물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두 번째 디자인 효과는 ‘사회조형효과’다. 이 말은 사회 개혁 효과라는 의미로 새로운 예술 형식을 창조하는 동시에 삶의 사회적 형태를 다시금 주조한다는 뜻이자, 나란히 존재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디자인의 가장 본질적인 ‘목표’는 ‘자본을 넘어서’ 사회를 조각하는 작업을 하는 일이다. 삶의 틀을 개선하고, 미래의 커다란 문제들에 대처하여 시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디자인 효과는 ‘경험효과’다. 저자는 ‘아이폰’을 예로 든다. 아이폰 사용자들은 이 기기를 통해 인간과 기계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새롭고 짜릿한 그 무엇을 경험하고 정보와 맺는 관계, 콘텐츠 접근성, 디지털 정체성을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에 가담하게 된다. 결국 경험이라는 가치는 디자인 효과의 중심을 차지한다. 어떤 제품을 사용하면서 재미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나는 가장 평범한 행위 속에서도 쾌락의 발현을 경험하고, 이는 내 삶의 경험에 더 나은 존재의 질을 부여하게 된다. 이렇게 디자인은 매순간 존재를 매혹시키려는 근본적인 필요에 부응하고 있다.

작년에 대림 미술관에서 ‘디터 람스 디자인전’을 보고 디자인의 진정한 개념이 뭔지 무척 궁금했는데 이 책을 보니 조금은 정리가 되는 느낌이다. 디자이너의 시각으로 세상보기. 힘이 들긴 하겠지만 참 색다를 것 같다.

무궁화, 1623, 빙어 잡으러 가자.

다행이야. 그는 헐떡거리며 기차를 탄다. 내 옆에 앉은 그는 숨을 돌리고 나서 어디엔가 전화를 한다. 나야. 요즘 뭐하고 살아? 바로 본론으로. 크리스마스 이브에 뭐해? 그래? 너 나랑 그날 청계천에서 빙어나 잡지 않을래? (화면전환) 12월 24일에 얼어붙은 청계천에서 얼음낚시를 하는 노인. 84일째 수확이 없다. 칼바람에 굳어버린 입술 사이로 말 한마디가.. 희망을 버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그건 죄악이야. 죄 말고도 지금 문젯거리가 충분하니까. .. ‘노인과 바다’ 망상을 깨뜨리는 그의 목소리. 조신한 척 하지마! 너도 없는 거 다 알아! 잘 안 된다. 하지만 이별은 다정하게. 그래, 잘 있어. 그는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스토리를 샅샅이 뒤진다. 오해하지 마시라. 삼성 갤럭시S3의 크고 아름다운 LCD화면, 놀라운 LTE속도, 쾌적한 터치감! (간접광고 말투로) 덕분에 그가 여자들의 프로필 사진을 뒤적거리는 게 보고 싶지 않아도 눈에 들어왔으니까. 내가 그저 신경 쓰던 것은 가방 속에서 식어가는 맥주 캔이었다. 옳지! 그는 전화한다. 빙어 전략을 다시 쓴다. 2차 실패. ‘희망을 버리지마’ 전화한다. 3차 실패. 4차.. 아, 맥주가 미지근해질텐데. 그래도 외로움과 욕정의 격렬한 화학반응 옆에서 태연히 맥주를 깔 엄두가 차마 나지 않는다. 옆에 있자니 나도 괴롭고. 그래도 이 사람은 연락할 곳이라도 있구나. <함께 하는 고독은 암묵적으로 받아들인 지옥이다> 책을 들고 카페객차로 도망친다. 40분 정도 있다 돌아와보니 그는 얼굴을 가린 채로 졸고 있다. 다행이야. 이러면서 맥주를 깐다.

1년 전. 이 무궁화호 1623열차에서 만난 할배와 그림 하나가 생각난다. ( http://suhhyng.pe.kr/?p=1246 ) Harry Kent의 ‘Egon Schiele V’를 또 써먹다니. 그 할배는 잘 계시려나. 80대 노인과 20대 청년의 회한에 찬 얼굴이 그림 위에 아른거린다. 아, 그들 모두 뜨끈한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기를!

숨쉬러 나가다.

2012년 11월 18일

숨쉬러 나가고 싶다. 주택 융자금 갚느라, 가족한테 시달리느라 지쳐버린 보험 외판원 조지 볼링. 그에게도 행운이 찾아온다. 경마로 17파운드를 딴 것. 설레는 마음으로 뭘 할까 고민하다, 그래, 고향으로 돌아가자. 어렸을 때 자주 가던 연못에 가서 낚시나 하면서 푹 쉬는 거야. 아내에겐 다른 곳으로 출장 간다고 해놓고 기쁜 마음으로 출발! 과연 그는 숨쉬러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숨 쉰다.” 주인공을 짓누르는 경제적 상황, 전쟁에 대한 막연한 절망감(세계 2차대전 직전)을 벗어 던지고 자신이 하고픈 것을 하며 미약하나마 자유를 누리는 것이겠지. 허나 사회적 문제에 대해 직접 맞서든 외면하든 그는 이미 그 문제 안에 들어선 상태이다. 진짜 숨쉬러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숨쉬러 나가다’는 조지 오웰의 원작을 충실히 살린 2인극이다. 앞서 정리한 줄거리를 보면 굉장히 숨이 턱 막히고 암울할 것만 같으나 군데군데 조지 오웰의 블랙 유머가 날카롭게 파며 들어있다. 연극은 70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그 블랙 유머를 슬랩스틱에 가까운 과장된 동작으로 확 살린다. 그래서인지 보고 나서 텁텁한 느낌대신 조지 볼링에 대한 공감과 미소가 남는다. 원작을 보지 않은 이들에게도 충분히 와 닿게 각색하고 배우 두 명이 땀을 뻘뻘 흘리며 열연을 했기에 원작의 느낌을 더 생생히 재현한 것 같다. 과거의 향수를 향한 소시민의 일상 탈출기. 하지만 그를 윽박지르고 짓누르는 현실..

‘1984’, ‘동물농장’로만 조지 오웰을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이 될 만한 작품 ‘숨쉬러 나가다’. 원작 소설, 연극 둘 다 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대학로 예술극장 3관 , 2012년 11월 25일까지)

모르는 번호로 전화 오면 받지 맙시다.

2012년 11월 16일

모르는 번호다. 국번062? 안녕하세요, 광주 서부 경찰서입니다. 피싱! 그 동안 외워왔던 가짜 계좌번호를 알려줄 기회가 온 건가. 10월1일 성남에서 광주까지 버스 타고 가셨죠? 네.. 야그를 들어보니 그때 나랑 같은 버스를 탄 사람이 가방을 도둑맞았단다. 혼자. 가셨죠? 네. 명절에 혼자. 광주에 갈 이유가 있나요? 언어중추가 또 말썽이다. 혼자.라는 단어만 크게 들린다. 광주비엔날레 보러 간 건데요. 혼자.요?

전화를 끊고 기억을 되새긴다. (화면전환, 아련한 색감으로) 영양에서 안동 가는 버스.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영양에서 여중생이 가출을 했다고 합니다. 보신 적 있습니껴? 왜 나한테.. 혼자. 어디 가십니껴? 안동이요.. 군산의 어느 한적한 저수지로 향해 걷다가 검문. 여기서 왜 혼자. 걷고 있죠? 이 존재론적 질문에 대충 대답한다. 옥산 저수지 가는 길이에요. 왜 거길 혼자. 가죠? 걸으러요. 알고 보니 주위에 빈집털이 사건이 있었다더라. (공익광고 삽입) 주위에서 혼자. 서성거리는 수상쩍은 남자가 있으면 어서 신고하세요. 안전한 사회, 우리가 만들어 나갑니다.

1년 전에 경복궁 옆길에서 어느 경찰관이 내 존재에 대한 회의를 던진 이후( http://suhhyng.pe.kr/?p=565 ) 바뀐 게 없구나. 좋아하는 작곡가이자 만년 독신자 브람스는 말하셨지. 고독하지만 자유롭다. 아닌 것 같다. 고독한데다 자유롭지도 못하다.

혼자. 다니지 마세요. 귀찮은 일이 생길 겁니다.

그리고 모르는 번호로 전화오면 받지 마시길.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2012년 11월 15일

지구인들이 지구와 유사한 환경의 행성 ‘애스시’를 식민지 삼아 마구잡이로 벌목하고 환금 작물인 대마를 심는다.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리면서 잔혹하게 착취하는 와중에 아내를 잃은 원주민 셀버가 봉기를 일으키고 피바람이 불어 닥치는데..

어슐러 K. 르 귄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딱 감이 오지 않은가. 삼림을 밀어버리고 수익성 높은 작물을 재배하는 행위는 오늘날 동남아시아에서 기존의 환경체계를 허물어뜨리고 기름야자나무(바이오디젤의 원료)를 심거나 아프리카에서 벌목 이후 커피나무를 키우는 것과 겹쳐 보인다. 전혀 지속 가능하지 못한 농업 혹은 산업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읽힌다.

다만 소설에선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땅과 생태 순환을 되찾아 오겠다는 결의 아래 뭉쳐서 지구인들에게 저항을 했지만 현실 세계에선 그러기가 힘들다. 요즘엔 한 나라의 경제 체제가 다른 나라와도 깊숙이 얽혀 있어 단지 폭력으로만 예속을 벗어나기 부족하다. 그리고 외국을 타자 삼아 뭉친다 하더라도 외부에 협력하는 상층 계급의 존재처럼 정작 적은 내부에 있는 경우가 워낙 많기에 소설의 전개 방식은 단순해 보인다. 그래도 가상의 세계로서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게 바로 판타지 소설의 묘미이기에.. 소설을 읽으면서 한 구절이 눈에 박혔는데 수수하긴 해도 이 작품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것 같다.

“다양성 속에 삶이 있고, 삶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

한 마리 나비

2012년 11월 14일

고량주 아홉 잔이 연속해 뱃속에 들어간것이다. 그는 육체와 의식이 흐트러지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다. 흐트러진다는 것은 정확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의식은 한 마리 벌레 같아서 잠시 날개를 숨기고 있지만 이제 곧 아름다운 나비가 될 것이라고 느꼈다. 그것이 바로 정수리 숨구멍에서 목을 치켜들고 밖으로 기어나와 의식적으로 외피를 벗어버렸으므로, 이제 그의 몸은 마치 나비에게 버림받은 껍데기처럼 가벼워져 중심을 잃고 있었다. – ‘술의 나라’, 모옌

여태까지 읽어본, 필름끊기기 직전을 묘사한 구절들 중 가장 으뜸이 아닌가 싶다. 작가의 외모가 고룡을 떠올리게 했는데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어. 한 마리 나비가 될 때까지 술마시진 말아야지ㅋㅋ

마음대로 고르세요

2012년 11월 13일

우리는 날마다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무엇을 사고 먹고 무슨 색으로 염색할 것이며 어딜 여행할지, 더 나아가서는 진로까지 고민한다. 그런데 이 선택이라는 행위가 순수하게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일까? 단지 강압과 한계의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게 아닐까? 선택을 제약하는 요소들은 ‘마음대로 고르세요’에 따라 분석해보면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속한 사회의 문화, 집단의 압력, 상급자의 권위, 분명치 않은 옛 기억, 경제적인 궁핍, 뇌의 반사 시스템 등에 따라 의사 결정 과정이 굴절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어떤 이가 잘못된 선택을 하면 사람들은 무심히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실패하였을 때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핑계로 자신에게 비난의 면죄부를 주는 데에는 탁월하다. 이런 악순환을 조금이나마 막고 제대로 된 선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저자 켄트 그린필드는 선택의 기초체력을 기르려면 ‘지적공감’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감이란 상대방에 대한 동정이 아닌 당면한 사건에 숨겨진 이야기의 특수성을 듣는데 전념하는 것이다. 자신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한계와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제약에 눈뜨려고 해야 지적공감을 조금이라도 발휘할 수 있다.

저자는 그 때 닥친 상황의 위력을 인식하고 자신의 비이성적인 성향을 인정하며 무심코 행하는 습관을 유념하고 문화의 영향을 인식하는 능력을 개발해야 그나마 선택의 미사여구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많은 사람이 현명한 선택을 하도록 이끌어주기 위한 방안도 제시한다. 경제적 궁핍이 억압의 기본 수단이 되지 않도록 힘쓰고 정치적, 문화적 이의 제기와 다양성을 권장하기. 개인의 성향을 바꾸기도 어려운 일인데 참 머나먼 목표로 느껴진다. 그래도 진정한 선택이 얼마나 신기루 같은 것이고, 선택이라는 미사여구가 어떻게 우리를 잘못 인도하고 있는 지만 인식해도 매우 큰 변화 아닐까? 글을 마무리하며 카프카의 날카로운 글을 슬쩍 끼워둔다.

“그는 자유로우면서도 안정된 지상의 시민이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지상 공간을 자유로이 활보하기에 충분한 길이의 쇠사슬에 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길이는 그가 지상의 경계를 넘어설 수는 없는 길이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유로우면서도 안정된 천상의 시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는 지상의 그것과 유사한 길이의 천상의 쇠사슬에 매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지상으로 가려고 하면 천상의 사슬이 그의 목을 죌 것이고, 그가 천상으로 가려고 하면 지상의 사슬이 죄어올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느끼고 있다. 그렇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것을 맨 처음 속박당할 때 일어난 한 가지 실책 탓으로 돌리기를 거부하기까지 한다.” – 카프카

과연 쇠사슬을 가볍게라도 할 수 있을까?

죽음과 소녀

그래, 바로 그 목소리야. 파울리나는 차가 고장난 남편을 데리고 온 남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칠레 군부독재 시절에 자신을 고문한 의사임을 확신한다. 그녀는 바로 남자를 결박하고 자백을 요구하지만 그가 고문관 이었는지 모호하다. 눈이 가려진 채로 목소리만 들었으니까. 파울리나, 이제 그만. 어디선가 목소리가 속삭인다. 긴장감 속에서 고문당했을 때 들었던 슈베르트의 곡들이 흐른다. 어서 말해. 자백하라고. 급기야 군부가 그녀를 고문하는 것과 그녀가 남자를 심문하는 것이 겹쳐 보인다. 이 세상이 가해자나 피해자나 원래 비슷한 존재라는, 지옥임을 주장하려는 건지. 파울리나, 용서하고 잊자. 그녀는 목소리를 향해 총을 겨눈다. 그녀가 총을 겨눈 상대는 그녀의 양심이었을까 아니면 아직도 지속되는 군부의 은폐 시도였을까? 과연 그녀는 슈베르트의 곡을 웃으면서 들을 수 있을까?

잔혹 행위에 대한 진상 규명 없이 ‘헛소리다, 잊어라!’를 외치는, 당당한 가해자들과 청산되지 않은 과거를 안고 사라지는 이들. 칠레의 ‘더러운 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우리나라와 닮은 점이 정말 많다. 3명의 배우와 6개의 탁자로 극을 팽팽하게 이끌어 가는 참신한 연출은 참으로 칭찬해줄 만 하나 내용은 쓰디 쓰구나. 원작인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 ‘죽음과 소녀’도 읽어 보고 싶다. 파울리나는 과연 용서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죽음과 소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2012년 11월 17일까지)

쟁기로 간 들판

2012년 11월 11일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이 북적댄다. 컨베이어 벨트처럼 밀려 그림을 봐야 하는 꼴이라니. 20초. 자, 이제 다음 그림! 전시실 전체 조명은 어둡고 3개의 전등이 각각의 그림들을 비추고 있다. 번들번들한 보석이나 고가 핸드백을 보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어디선가 아이가 운다. 하. 입장권 가격이 얼마였더라? 그러다 한 작품 앞에 멈춰 섰다. 아까 지나친 파리 시기의 그림들이랑 다르네. ‘쟁기로 간 들판’ 1888년 아를. 강렬한 햇빛 아래 밭에서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는 순간을 고흐가 부글부글 거리는 심정으로 그려낸 것만 같다. 화가의 연대기에서 중요한 전환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본전 생각 따위는 쏙 들어가고. 다시 되돌아가서 보고 세 번 보고..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다가왔던 ‘쟁기로 간 들판’. 내 마음도 그림만큼이나 뜨거워 봤으면. 내년 봄날에 다시 한 번 보러 가야겠어. <반 고흐 in 파리> (2013.3.24까지)

돌연변이의 왕국, 다발 킴

2012년 11월 5일

미술관을 드나들다 보면 그린 이의 망상이 단지 작품 안에만 머물러 있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보는 이를 자신의 세계로 마구 빨아들이는, 흔치 않은 작품이 있다. 지난 주말에 본 다발 킴의 드로잉은 후자의 경우로 넣어둬야 할 것 같다. 다발 킴의 그림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물의 구성 방식을 엎어 버린다. 가령 동물이 움직일 때 연상되는 근육 등의 해부학적 구조 대신 자신의 그로테스크한 세계(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키는)를 삽입한다. 장난스럽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치밀하고 체계적인 자의식의 그림을 펼쳐놓는다. 특히 고전 명화들을 비튼 작품들로 이루어진 벽면은 흡사 ‘다발 킴의 머릿속’ 박물관에 온 듯한 느낌마저 준다. 별 정보 없이 들른 소마미술관에서 얻은 수확인 다발 킴의 드로잉들. 나중에 다른 주제로 개인전을 열 때 꼭 가보고 싶다.

그림은 ‘Sweet Society’. <돌연변이의 왕국> 소마미술관. (2012.11.2~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