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명덕_시작과 시작

2012년 10월 31일

작년 대림미술관에서 “주명덕 사진전”을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흑백의 기록으로 이런 정감과 여운을 줄 수 있다니. 비치된 사진집 ‘섞여진 이름들’을 보며 이건 꼭 구해야지 한 게 벌써 1년이 넘어버렸다. 절판된 지도 오래고 중고로조차 구할 수 없으니 답답하더라.

인터넷 기사로 주명덕의 포토에세이 ‘섞여진 이름들’이 전시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주말에 바로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으로 달려갔다. 1층엔 한 순간에 스쳐 지나가는 빛의 흔적, 확대된 벽의 모습들을 촬영하여 새로운 느낌을 주긴 했지만. 죄송합니다, 전 이걸 보러 온 게 아니라서요.

2층에는 한국전쟁 이후 버려진 혼혈 고아들의 모습을 기록한 ‘섞여진 이름들’, 기지촌을 촬영한 ‘운천’, ‘용주골’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국적인 외모의 고아들이 한글을 배우고 운동을 하거나 울거나.. 한국에서 혼혈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했는지를 찬찬히 보여주면서 마지막엔 의문을 던진다.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평범한 사진 기록을 넘어서 생각을 하게 만드는 힘, 그게 바로 주명덕 작품의 매력인 것 같다.

1층으로 내려와 추상화에 가까운 사진들을 보면서 조각가 김종영의 말을 떠올린다. “인생은 한정된 시간에 무한의 가치를 생활하는 것이고, 예술은 한정된 공간에 무한의 질서를 설정하는 것이다.” 2층의 초기작들이 분명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면 1층의 새로운 작품들은 사진이라는 한정된 틀과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로서 무한의 질서를 보여주려 한 게 아닐까?

주명덕의 60, 70년대 초기작과 최근의 ‘초기작’을 한 번에 감상할 수 있는 <주명덕_시작과 시작>.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 2012년 11월 25일 까지 전시됨)

사진들을 보면서 왜이리 입에서 시와의 ‘오래된 사진’이 맴도는지..
http://youtu.be/CQ_2iVA6WPs

희망의 배신

2012년 10월 25일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2000년 이후로 화이트칼라 직종의 실업률은 높아지고 중산층의 몰락은 점점 가시화되고 있다. 만사를 ‘올바르게’ 해온 사람들인데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노동의 배신”의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이런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직접 취업전선에 뛰어든다. 그런데 처음부터 일이 꼬여버린다. 기업의 내부에서 위기에 몰린 중산층을 취재하는 게 목표였는데 일단 취직이 되야 말이지. 구직 활동을 하는 동안 저자는 기막힌 현실을 만나게 된다.

구직을 한다는 건 곧 자기자신을 상품으로 파는 것이었다. 우선 미심쩍은 인성검사를 통해 기업에 어떻게 비춰지는지 분석을 하여 결점으로 판단되는 모습을 고쳐야 한다. 외모, 말투, 성격,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말이다. 직업 코치의 도움을 받았건만 구직에 여전히 실패한다. 이젠 인맥 쌓기로 방향을 틀어보자. 어쩌나. ‘네트워킹’ 행사에 나가 봤더니 다들 실직자 혹은 해고 직전의 직장인들뿐 인데 무슨 도움을 받을 수 있겠나. 교회를 가보자. 모든 짐을 신에게 넘겨 봐도 여전히 취직은 되지 않는다. 6개월이 지나고 도처에서 미끼가 날라온다. 다단계와 프랜차이즈의 마수!

저자가 구직 활동을 하면서 소름 끼치는 관점을 접한다. <경기 침체, 부동산 시장 등으로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하지 마라. 바뀌어야 하는 건 세상이 아니라 바로 ‘너’다> 바닥에 추락한 이에게 모든 문제는 전적으로 네가 만든 것이라고 하는 건 정말 잔인하지 않은가? 이제 사람은 생산 방정식의 한 가지 변수에 불과한 ‘물건’으로 여겨지고 그 ‘물건’은 손익 숫자에 따라 언제든지 내버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버려지지 않으려면 사실과 논리와는 상관없이 자기 감정을 버리고 순응으로 자신을 마비시켜야 한다.

“희망의 배신” 이 책은 결국 구직 실패기, 몰락한 미국 중산층에 대한 보고서가 되어버렸다. 이 풍경이 낯설진 않다. 바로 우리나라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저자는 언제든 처분 가능한, 그리고 이미 처분당한 회아트칼라 노동자들이 뭉쳐 자신들의 존엄성과 가치를 지킬 것을 역설한다. 과연 그런 각성의 순간은 언제쯤 올까?..

 

같은 저자의 ‘배신’ 시리즈
노동의 배신 : http://suhhyng.pe.kr/?p=1059
긍정의 배신 : http://suhhyng.pe.kr/?p=751

동료애

만약 동료를 내 형제라고 여긴다면 정말로 그들을 사랑하게 될까? 사실 동료애는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인내하고 참아내는 포용의 문제이며, 동료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풀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이다. 이를 효과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비롯한 타인을 모두 이 행성의 나그네, 즉 여행 중에 만난 친구로 보는 게 가장 좋다. 여행 중에는 누구나 쉽게 형제 같은 마음으로 친해질 수 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인터뷰를 보니, 그도 우리 인간을 가리켜 “살면서 만나는 손님” 이라고 말했다. – “부두에서 일하며 사색하며”, 에릭 호퍼

이제 반.

2012년 10월 23일

여행 가방 앞 주머니가 볼록 튀어나와 열어보니 뭔 표가 끊임없이 나온다. 버스표, 기차표, 배표, 영화표, 미술관표…. 오늘 책 읽는 게 물려갈 참이라 이김에 올해 여행한 기록이나 정리해보자. 큭. 웃음이 나온다. 당신 취미는 뭔가요? 누군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음악듣고 영화보고 책읽고 이런저런 미술관 가고, 뭐 그런 거 좋아해요. 취미만 놓고 보면 상당히 정적으로 보인다만. 장소는 제각각이다. 부산, 제천, 전주에서 영화를 보고 통영, 평창에서 음악을 듣고, 전국의 미술관을 돌고. 책은 버스, 기차, 배 위에서 읽고.. 몇 주 전에 신발을 새로 사면서 투덜거렸지. 무슨 신발이 4개월 만에 닳는 거야. 그럴 만하다. 누군가는 날 보고 지구온난화의 주범이라고 했었지. 그럴 만하구나. 내가 책, 술에 돈을 제일 많이 쓰는 게 아니었다. 교통비였다. 그럴 만하네.

공보의 된지 1년 반이 지났다. 딱 반이 남았다. 더 읽고 걷고 보고 들어야지. 술은 좀 줄이고..

data.matrix [nº1-10]

2012년 10월 22일

나에겐 음악을 들을 때 분석하며 듣는 습관이 있다. 지나치는 곡도 무슨 이름인지 알아야 하고 무슨 악기를 쓰는지 가사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등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편집증에 가까운 버릇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료지 이케다의 “data.matrix [nº1-10]”를 보고 들으면서 순식간에 무장해제되었다. 치직거리는 화이트 노이즈 위에 무작위로 나오는 사인파들의 조합과 영화 매트릭스에서 볼법한 픽셀 덩어리들. 뭔가 반복되었다는 걸 알아차리기도 전에 소리의 패턴은 바뀌어서 분석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스쳐 지나가는 시각화된 데이터의 양에 압도된다. 그런데도 정제된 소음 덩어리 속에서 점점 편안해진다. 음악 이전의 음이 바로 이런 걸까? 다른 음악을 들을 때 오, 감동이야! 할만한 요소가 이 설치 작품에는 전무하지만 그 자리에서 매료되었다.

갈 시간이다. 10개의 모니터 앞에서 계속 서성거리다 미술관을 나와 인사동으로 걷는다. 엄청난 소리가 나를 덮친다. 쌍용차 노동자를 살려내라! 종북좌파를 척결하라! 서울패션위크! 하나님을 믿으세요! 중국은 파륜궁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라! 백혈병 환자를 도와주세요!

잠시 무균질의 소리를 듣다 나왔을 뿐인데 세상의 폭음에 어질어질해진다. 아, 내가 “data.matrix [nº1-10]”를 접하며 그토록 편안해 했던 것은 그 소리 안에 인지할 수 있는 메시지가 없었기 때문이구나. 미술관에서 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소음은 기묘하게 아름다웠다. 그것은 감정이 씻겨진 아름다움이었고 격렬함이 거세된 아름다움이었다.

data.matrix [nº1-10]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서울시립미술관 3층. 2012년 11월 4일까지 전시됩니다~ 이걸 라이브로 연주한 버전도 있군요..;; 느낌은 다르지만 강추! http://youtu.be/k3J4d4RbeWc CD발매버전 http://youtu.be/F5hhFMSAuf4

눈물

2012년 10월 17일

나는 매양 모르겠네. 소리란 똑같이 입에서 나오는데, 즐거우면 어째서 웃음이 되고, 슬프면 어째서 울음이 되는지.

어쩌면 웃고 우는 이 두 가지는 억지로는 되는 게 아니다, 감정이 극에 달해야만 우러나는 게 아닐지. 나는 모르겠네, 이른바 정이란 어떤 모양이건대 생각만 하면 내 코끝을 시리게 하는지. 그래도 모르겠네, 눈물이란 무슨 물이건대 울기만 하면 눈에서 나오는지. 아아, 남이 가르쳐주어야만 울 수 있다면 나는 으레 부끄럼에 겨워 소리도 못 내겠지. 아하, 이제야 알았다.

이른바 그렁그렁 이 눈물이란 배워서는 만들 수 없다는 걸.

-“사장士章 애사哀辭” 중에서, 연암 박지원

까마귀

2012년 10월 16일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깃털보다 더 검은 것이 없다. 그런데도 홀연 젖빛 흐르는 금빛깔이 번지는가 하면 다시 석록빛깔로 반짝이기도 하고, 해가 비추면 자줏빛이 튀어 올라 눈에 어른거리다가 비췻빛으로도 바뀐다. 그렇다면 내가 저 새를 ‘푸른 까마귀’라고 불러도 될 게고, ‘붉은 까마귀’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저 새에게는 본래 일정한 빛깔이 없었으니 내가 눈으로 먼저 그 빛깔을 정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눈으로만 정했으랴. 보기 전에 먼저 마음으로 정했지 않은가.

까마귀를 그저 검은색이라고만 해도 충분한데 또다시 까마귀로써 천하의 모든 색깔을 묶어두려 하느냐고? 까마귀가 정말 검기는 하다. 푸른 빛과 붉은 빛이 그 검은 색깔 안에 들어 있었던 줄을 누가 알았으랴. 그러나 검은 물체를 일러 ‘어둡다’ 함은 비단 까마귀 색깔만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검은 빛깔이 무엇인지도 몰라서이다. 물은 검기에 능히 비출 수가 있고, 옻칠도 검기에 능히 거울이 됨을 모르기 때문이다. 반드시, 빛깔이 있는 모든 사물에는 빛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며, 형체가 있는 모든 물체에도 맵시가 있기 마련이다.

-“연암집”, 연암 박지원.

MB의 추억

2012년 10월 15일

‘이게 개봉이 될까요?..’ 전주영화제에서 시네토크 중 김재환 감독이 조심스럽게 한 말이다. 대선 전 영화관에서 상영되면 미칠 파장이 꽤 클 거라 그렇지.. 근데 개봉이 확정되었다. “MB의 추억”. 포스터에서 알 수 있듯이 ‘주연’은 현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감독은 2007년 대선 후보의 재래시장, 거리연설, 단체율동(?), TV광고에 이르기까지 선거 전에 범람했던 이미지와 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그리고 현재와 대비시킨다. ‘단순히 반한나라당, 반MB 정서로 만든 게 아닙니다. 5년 후엔 근혜의 추억 혹은 철수의 추억이 나오지 않겠어요?’ 이 영화는 유권자뿐만 아닌 후보들에게도 경각심을 던져준다. 무책임하게 던진 공약은 기록되고 이렇게 공개될 것이라는 경고..

자칭 ‘정산’ 코미디인 “MB의 추억”을 선뜻 추천하긴 힘들다. 새누리당 지지자는 쳐다보지도 않을 거고 야당 지지자들 중 한 시간 넘게 그 분의 얼굴과 음성을 견뎌낼 사람이 있을지도 의문이니까. 허나 거슬리는 비위를 잠시 진정시키고 영화를 본다면 감독의 전 작품인 “트루맛쇼” 보다 찐한 재미와 신랄함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2012년 10월 18일 개봉!
예고편 : http://youtu.be/eqr0QyOywbo

서칭 포 슈가맨

2012년 10월 14일

음반을 냈건만 팔리진 않고 콘서트도 실패하고 결국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가수. 그런데 어쩌다 그 음반이 다른 나라로 흘러 들어가 모든 사람이 애청하고 저항 가수들의 우상이었으며 심지어 죽었다는 소문이 퍼져 전설의 존재가 되었다면?

영화 “서칭 포 슈가맨”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실화이다. 미국 가수 시스토 로드리게즈의 음악에 열광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람들은 정작 미국인들이 그를 잘 모른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몇몇 음악 평론가들은 로드리게즈를 추적한다. 살아는 있을까? 뭐하고 살까?

황량한 도시 디트로이트를 배경으로 노래한 로드리게즈.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한 실패한 가수로 참 우울할 법도 하건만 낙담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막노동을 하면서 세 딸을 키워내면서도 기타를 놓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걸려온 전화. 아, 당신이군요! 당신은 남아공의 우상입니다! .. 네?

제천에서 보고 어제 건대에서 또 보고.. 볼수록 기분 좋아진다.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살아갈지라도 나에게 열광하는 딴 세상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거. 상상만 해도 근사하지 않은가? 허나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젊었을 때의 실패에 흔들리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로드리게즈의 자세이다. 어쨌든 삶은 지속되니까..

달콤한 동화와 텁텁하긴 해도 끈질긴 삶이 공존하는 영화 “서칭 포 슈가맨”. 올해 본 작품 중 적극 권하고 싶은 영화이다. 많이들 보러 가시길~

엿먹어라.

2012년 10월 12일

새벽 걷기를 마치고 식사대신 에스프레소 한 잔, 그리고 엿을 먹는다. 달달한 여운이 입 안에서 채 지워지기 전에 갑자기 의문이 생긴다. 이렇게 맛난 엿이 대화에 끼어들면 이상해지는 이유는 뭘까? 기분 엿 같다. 엿이나 먹어. 빅엿 드세요. 느낌이 좋지 않다. 심지어 Fxxx you 이런 욕에 대한 번역에도 꼭 엿이 들어간다. Yeot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가설을 세워본다. 엿을 만드는 과정이 욕 나올 정도로 힘들어서, 혹은 엿 자체의 끈적끈적한 식감 때문에, 아니면 엿에 저질과자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는 건가. 아아. 언제부터 누가 엿을 엿 먹였는가? 아침부터 브레인스토밍..

  1. 예전에는 단맛을 내는 과자가 엿이 유일했지만 여러 과자가 들어오면서 그 위상이 떨어지고 비속어의 대상이 되었다.
  2. 1964년 서울 중학입학시험에서 엿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문제가 출제되었다. 정답은 ‘디스타아제’ 였는데 일부 수험생들이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고 반발하였다. 학부모들은 교육청으로 몰려가 시위하면 무즙으로 만든 엿을 내밀며 “엿먹어라” 이랬단다.
  3. 좀더, 아니 많이 거슬러올라가서 엿이라는 단어는 남사당패가 쓰던 은어로 여자의 성기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상소리로 ‘○먹어라’에 엿이 들어간 것.

누가 범인일까?

시저는 죽어야 한다.

2012년 10월 9일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거둔 수확. “시저는 죽어야 한다.”

이탈리아의 어느 교도소. 강력범 재소자들이 셰익스피어의 “시저”를 연습한다. 그들은 대사를 읽으며 자신의 상황과 동일시하고 감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각자의 과거사를 떠올리며, 혹은 그들간의 실제 관계와 연관시켜 티격태격하며 리허설을 진행한다.

감옥에서 이뤄지는 리허설은 죄수들의 세계와 “시저”의 세계가 연결된 순간을 보여준다. 작품에 깔려 있는 음모, 살인, 배신을 내면화한 그들은 곧 시저이고 브루투스였으며 카시우스였다. 이 광기에 가까운 가상 공간은 단 한 번의 공연으로 닫히고 죄수들은 감방으로 돌아가지만 연극으로 감옥의 벽을 넘어선 경험은 각자의 가슴 속에 새겨지고 그 재미를 알아버린 그들은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예술을 알고 나니 이 작은 방이 감옥으로 여겨지는구나!>

영화는 작품 속에 자신을 온전히 던지고 그 안에서 허우적대는 <야수적 독서법>(1)을 제시한다. 희곡의 대사가 죄수들이 품고 있는 내면의 기억과 “시저” 사이에 가능한 최대한의 일치를 이루는 변형을 겪듯이 우리도 그렇게 읽어보면 어떨까? 텍스트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의 불확실성, 광기와 대면할 위험은 있지만 말이다.(2) 그래도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영화의 죄수들처럼 이 세상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답답한 이 세계를 초월하고 돌아보게 하는 문학의 힘! 이 영화가 보여주려 한 게 아닐까 싶다. 흑백 장면을 넣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물흐물하게 만든 기법도 절묘했고 출연한 이들이 실제로 죄수였다는 거에 정말 놀랐고.. 휴, 이 영화가 한국에 정식 개봉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1) 살인자의 건강법, 아멜리 노통브
(2)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

흘러라 내 눈물, 경관은 말했다.

2012년 10월 4일

전세계적으로 단일화된 경찰기구가 통치하는 미래. 제이슨 태버너는 잘나가는 TV스타였다가 졸지에 모든 신분증 데이터가 삭제된,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 경찰에게 쫓기고 누구한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딱한 상황.. 이게 바로 “흘러라 내 눈물, 경관은 말했다.”의 시작이다.

그래도 사람인데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거 없다. 제이슨은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숨쉬는 거 빼고 거의 모든 종류의 자유에 제약을 받는다. 위험분자로 낙인 찍혀 도청기와 위치 발신기를 삽입당하는 신세다. 한나 아렌트 말대로 인권이 시민권을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민권이 인권을 기초하며, 국가나 제도가 보장하지 않는 자연적 권리란 존재하지 않는 건가?(1)

SF소설의 극단적인 설정대로 나한테 부여된 주민등록번호가 없다면 지금의 나처럼 살 수 있을 것인가.. 아닐 걸. 아무것도 보장받지 못하는 ‘헐벗은 존재’에 가깝겠지. 난민처럼 말이야. 필립 K. 딕의 생생한 악몽을 읽다가 웬 인권에 대한 고민이람..

(1)   전체주의의 기원, 한나 아렌트

The Tenth Sentiment.

어둠 속에서 모형기차가 서서히 움직인다. 기차에선 불빛이 나온다. 철길 주변엔 사람들, 숲, 원전, 시계 등이 놓여있다. 불빛은 무심하게 그 모든 것들을 비춘다. 수많은 그림자들의 변화를 보고 있노라면 기묘한 환상에 빠져든다. 밝음과 어둠뿐인 벽의 여백에 나를 투영한다. 기차는 터널로 들어간다. 이따금 빛이 보이지만 사라진다. 끊어질 듯한 빛은 터널을 나와 소생한다. 이제 종착지에 가까워졌다. 불끈불끈 솟아오른 빌딩 숲 사이에서 여정을 마무리하는가 싶더니. 기차는 왔던 길을 빠른 속도로 되돌아간다. 내 기억도 사라진다. 묵직하게 다가왔던 그림자들이 가볍게 날라간다. 혼자 서있는 사람 모형의 단말마를 끝으로, 다시 어둠이다.

료타 쿠와쿠보의 “The Tenth Sentiment” 최근에 본 설치 작품 중 가장 조용하면서도 강렬하다. 아무런 정보 없이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몇 대 얻어맞은 느낌이릴까. 그러면서도 여러 번 반복해서 보게 된다. 유투브 영상도 곁들이지만 직접 보는 것보다 밋밋하다. 11월 4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된다니 많이들 보러 가시길. – 2012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 2012”

http://youtu.be/8EBF0qOKp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