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

2012년 9월 26일

여행하고 나서 다른 이들에게 경험담을 털어놓고 싶다. 아주 멋지게 말이다. 그런데 말하기도 전에 막히고 만다. 내가 평생 살아온 곳도 잘 모르는 주제에 여행가서 기껏 안내서에 나온 명소들만 둘러봤을 뿐인데. 겁먹지 말고 피에르 바야르의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을 읽어보자.

어떤 장소에 대해 말하기. 일단 그 장소가 야기하는 수많은 이미지들 중 몇몇을 선별해야 하고 그 중에서도 어떤 이미지를 부각시켜야 한다. 이 선별작업은 ‘실제 세계’ 에 대비되는 나만의 ‘상상의 나라’를 탄생시킨다. 이제 이야기의 성패는 얼만큼 공동의 상상의 나라를 조성하느냐에 달려 있다. 다양한 수용자들에게 몽상을 야기하고 각자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공감을 얻어내야 한다. 장소들 하나하나에 자신의 일부분을 담고 있으면서도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는, 지리적 장소를 관통해버리는 시각이 필요하다.

아니, 그럼 현실이랑 동떨어지게 되지 않을까? 이런 우려는 하지 말자. 직접 여행하지 않고 쓴 게 분명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상상력 넘치는 사모아 여인의 증언에 근거한 마거릿 미드의 저서를 가치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동방견문록”은 수많은 여행가들에게 영감을 줬으며 마거릿 미드의 연구는 여러 나라들에서 청소년들의 교육에 관한 논쟁을 야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요컨대 이야기 안에 담긴 담론을 촉발시키는 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행하고 나서 다른 이들에게 경험담을 털어놓기. 이는 곧, 타자를 여행하게 하여 두 내면의 나라의 만남을 조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아의 내밀한 곳을 거쳐 타자로 나아가는 길을 추구하는 것으로서의 문학적 행위이다. 무엇보다도 귀를 기울여야 할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며 타자들을 내면의 나라로 끌어들이고자 한다면, 바로 자기 자신을 기술하고 재건하는 일에 뛰어들어야 한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되냐고? 이야기를 지배하는 것은 목소리가 아니고. 귀이니까..(1)

(1)   “보이지 않는 도시들”, 이탈로 칼비노

2012년 9월 20일

아보긴과 의사는 얼굴을 마주보고 서서, 화난 상태에서 서로에게 지독한 모욕을 주길 계속했다. 그들은 평생 동안 한 번도, 심지어는 헛소리라도, 그처럼 그릇되고, 잔인하고 어리석은 말을 내뱉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 두 사람에게선 불행한 사람들의 에고이즘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불행한 사람들이란 이기적이고, 심술궂으며, 불공평하고, 잔인한데다가, 어리석은 사람들보다도 서로를 이해할 줄 모르는 법이다. 불행은 사람들을 화해시키지 않고 떼어놓으며, 사람들이 동일한 슬픔으로 결속되어야만 할 것처럼 여겨지는 부분에서도, 비교적 행복하고 만족한 사람들에게서보다 훨씬 더 많은 불공평함과 잔인함을 낳는다. – “적”, 안톤 체호프

병에 걸린 줄 알았던 아내가 도망간 아보긴과 방금 아들의 시신을 수습한 의사. 체호프는 그 둘이 대립하는 장면을 건조하게 서술한다. 이 부분이 계속 기억에 남는 이유는. 할머니가 치매의 친구가 되기 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과 비슷해서다. 불행한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단다. 자기 경험이 제일 슬퍼 보이거든. 체호프의 단편을 그저 들쳐본 것뿐인데 자유연상이 시작된다. 밀란 쿤데라도 이렇게 야그하셨지.

자아의 토대는 사유가 아니라 고통, 즉 감정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감정인 것이다. 고통을 당할 때는 고양이조차도 상호 교환이 불가능한 자신의 유일한 자아를 의심할 수 없다.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세상은 흔적 없이 사라지며, 우리들 각자는 자기 자신과 홀로 남는다. 고통이야말로 자기중심주의의 위대한 학교인 것이다. – “불멸”, 밀란 쿤데라

김부식과 일연은 왜?

2012년 9월 19일

다시 읽기, 혹은 다르게 읽기. 책 자체가 고정된 텍스트가 아닌 유동적인 오브제임을 인정한다면 꼭 필요한 행위이다. 역사서에 그런 관점을 적용해보면 “김부식과 일연은 왜?” 같은 책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저자인 김부식과 일연도 원래 있던 자료를 읽고 각자의 정치적, 사회적 입장에 따라 일화들을 선별하고 책을 썼을 테니, 그들의 프리즘을 걷어 낸다면 사뭇 다른 야그들을 음미해 볼 수 있다.

삼국사기의 편제를 보면 철저히 남자, 신라, 충절에 관한 이야기를 앞에 놔두고 있다. 고려의 남성, 김부식이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힌트를 던져준다. 반면 삼국유사는 기이하고 신화적인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일연이 승려였던 만큼 불교의 영험이 살아 숨쉬는 신비한 이야기들을 우선 거두어서 김부식의 역사 인식과는 대립된다. 여기서 고려 후기의 시대적, 사상적 분투가 느껴진다.

둘 사이의 관점의 차이는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야그(설씨녀와 호녀)에서는 완화된다. 일연과 김부식 둘 다 도덕적, 종교적 수사로 찬미하는 듯하면서도 국가-가문-가장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삶을 가두기 시작한 중세적이고 남성적인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내보인다. 규범화를 위해 이야기를 손질하고 엄청난 오독도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시각들을 염두에 두고 역사서를 본다면 미처 알지 못한, 개인들이 살아 숨쉬는 야그들을 만나게 된다.

“김부식과 일연은 왜?” 는 박제된 듯한 독법을 피하고 자유로운 담론을 제시하고 있다. 어렵긴 하지만 참으로 근사한 ‘읽기’ 아닌가..

2012년 9월 18일

2012년 9월 16일,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아, 꿈이었으면. 해방 이후 춘원 이광수는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을 피해 낙산사에 은거하면서 글을 쓴다. 삼국유사 중 “조신의 꿈”을 재해석한 작품 “꿈”. 낙산사의 수도승 조신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파계한다. 춘원 이광수도 비슷한 심정이었나? 아니면 수많은 젋은이를 사지로 내몰았던 행위에 대한 변명인가? 단지 한 순간의 유혹, 위협에 넘어간 것 뿐이라고. “꿈”에서의 조신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살인을 하게 되고 번뇌에 휩싸인다. 이광수인지 조신인지 경계가 흐릿해진다. 하지만 조신은 고통의 절정인 순간 잠에서 깨어나고 춘원은 그게 현실로 유지된다. 아, 꿈이었으면.

국립극단의 삼국유사 프로젝트 중 첫 번째 “꿈”. 고전, 그것을 변주해낸 작품, 작가의 삶을 동시에 연극으로 다시 읽어내고 있다. 춘원 이광수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듯한 결말. 나에겐 괜찮게 느껴졌다. ‘우리의 내면의 삶에 대한 우리의 경험, 우리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거짓말이고, 진실은 외부에, 우리가 하는 행동 속에 있으니까.’(1) 다만 여기에 원효, 의상대사의 에피소드와 자연의 유구함을 강조하는 듯한 음향 처리 등을 삽입하여 약간 산만해졌다. 존재감 넘치는 강신일(이광수 역)의 연기라면 차라리 선 굵게 나가는 것도 괜찮았을 텐데. 그래도 신이神異한 에피소드로 가득한 삼국유사를 현재와 연결시켜 연출한 것이니 만족한다. 이제, 다음 작품인 수로부인의 일화를 배경으로 한 “꽃이다”가 기다려진다.

(1) 폭력이란 무엇인가, 슬라보예 지젝

잔혹한 출근.

2012년 9월 17일

어젯밤 운전하다 차 시동이 꺼져버렸다. 차를 산골짜기 어딘가 밀어넣고 걷다가 찾은 외딴 모텔에서 하룻밤.. 날 밝자마자 서비스센터로 차 견인. 부품있는 데로 다른 곳 찾아다니다가 포기. 출근을 해야 한다! 영주에서 기차타고 안동가서 버스타고 영양에서 갈아타면 발리.. “잔혹한 출근”이라는 어떤 영화 제목이 생각나는 월요일 아침이다.

고백

2012년 9월 15일

사랑받는 자의 위치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지극히 폭력적이고 외상적인 사건이다. .. 사랑에 대한 라캉의 정의(“사랑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주는 것이다”)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라는 말로 보충되어야 한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예기치도 않게 열정적 사랑을 고백하는 아주 일상적인 경험에서 확인되지 않는가? 이에 대한 최초의 반응으로, 가능한 긍정적인 응답보다 앞서 일어나는 것은 외설적이고 난폭한 어떤 것이 침입했다는 느낌이다. .. 사물로서의 타자가 지닌 이 심연에서 우리는 라캉이 ‘정초적 말(founding word)’로 의미한 것, 즉 한 사람에게 어떤 상징적 타이틀[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을 부여하고 상징적 동일성을 구성함으로써 그, 그녀를 공언된 존재로 만들어주는 진술을 이해할 수 있다. .. 내가 누군가에게 “당신은 내 주인이다”라고 말할 때 나는 특정한 방식으로 그를 대할 의무를 스스로 지며, 마찬가지로 그에게 나를 특정한 방식으로 대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기”, 슬라보예 지젝

어느 섬의 가능성

2012년 9월 7일

소설들을 읽다 보면 심란한 작품들을 보게 된다. 미셸 우엘벡의 작품들이 그러한데, 특히 “어느 섬의 가능성”이 강렬하다. 그 특유의 냉소주의로 ‘인류는 답이 없다.’라며 소설 속에서 현재 인류를 멸망시키고 신인류를 등장시킨다. 그렇게 모든 가치관을 찢어발기다가 마무리는 원점으로 복귀한다. 플라톤의 “향연” 중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반쪽인 대상을 만나게 되면, 놀랍게도 그들은 격렬한 애정, 신뢰, 사랑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들은 더는 잠시라도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 서로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말하지 못하면서도 평생을 함께 사는 사람들이 그렇다. 왜냐하면 상대방과 함께 있는 것에 그토록 큰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것이 오로지 감각적인 쾌락만은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둘 모두의 영혼은 말할 수 없지만 짐작하는, 그리고 짐작하게 하는 다른 것을 욕망하는 것이 분명하다. .. 그 이유는 우리의 옛 본성이 우리가 완벽한 하나를 이루는 그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욕망, 사랑이라 불리는 모든 것에 대한 추구이다.’

감시사회

2012년 9월 4일

뉴스를 보다가 눈에 띄는 게 있다. “문경시, CCTV통합관제센터 협약식 개최”,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강력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문경시, 문경경찰서, 문경교육지원청이 CCTV통합관제센터 착수 보고회를 가졌습니다.’ ‘통합된 24시간 CCTV를 통해서 치안의 공백을 채울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 두 달 전 쯤에 읽은 “감시사회” 중 한 귀퉁이, ‘일상적 감시를 의심하라.’가 생각나서..

 

‘흔히들 CCTV가 범죄 예방의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영국의 경우를 살펴볼까요?  영국은 CCTV가 많기로 소문이 자자한 나라죠. 실제로 전 세계 CCTV의 20퍼센트 정도가 설치되어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영국의 내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에 400만 개의 CCTV가 설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 지난 10년 동안 CCTV 설치에 공금 4000억 원이 투자되었다고 하고요. 놀라운 것은 CCTV를 통한 범죄 적발률이 너무 저조하다는 겁니다. 통계를 내봤더니 CCTV 1,000개 설치하면 1년에 한 건의 범죄를 적발한다고 합니다. 한 건의 범죄 적발을 위해서 4,000만 원을 투자한 셈이니, 너무 비효율적이죠. 연봉 4,000만원을 주고 경찰관 한 명이 적발해낼 수 있는 범죄가 설마 1년에 한 건보다는 많겠죠?

영국은 CCTV의 나라답게 CCTV의 연구도 활발합니다. 그런데 연구조사 결과를 종합해보면 CCTV와 범죄 예방은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CCTV를 설치했을 때 범죄가 줄어든 경우도 있었고 늘어난 경우도 있었습니다. 반면, 대개 가로등 개수를 늘리거나 조도를 높이면 범죄가 줄어든다는 것은 어느 정도 입증이 되었구요. ..  물론 CCTV가 계획범죄를 줄이는 데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반면 의도하지 않은 범죄, 충동적인 범죄를 줄이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하고요. CCTV가 범죄를 결심하는 것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는 있어도 범죄 욕구를 아예 없애는 것은 아닙니다.’

일요일 저녁, 그들.

2012년 9월 3일

일요일 저녁 관사에 들어선다. 니 왜이리 일찍 왔노, 일없었나? 형은요? .. 이심전심, 염화미소, 아니 썩소. TV앞에 둘이 나란히 앉는다. 할 말이 없다. <같이하는 고독은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지옥이다>(1) 그가 냉장고를 연다. 야. 네? 이거 오래된 거지? 네? 오래 두면 상한데이. 빨리 묵자. 그가 가리키는 것은 지난 목요일에 사둔 병맥주였다. 형, 저 이번 주에 금주하려고요. 내 슬픈 이야기 들려줄게, 어느 집안 첫째 딸 이름이 금주고 둘째 딸은 금년인거라. 아아 그 두 명과는 절대 맺어질 수 없었더라. 그도 나도 슬펐다.. 그것은 바로 음주, <고독협동조합>(2)의 시작이었다.

(1)   어느 섬의 가능성, 미셸 우엘벡
(2)   스와보미르 므로제크의 단편집 “코끼리” 중 단편 이름.

안녕, 신발.

2012년 9월 2일

신발 밑창에 구멍이 뚫려 짜부러진 아코디언 같은 처량한 소리가 난다. 어린이날에 산 건데. 이번엔 4개월도 못 갔구나. 튼튼하고 질겨 보였는데. 워킹화 너마저. 혹시나 해서 청바지를 살펴본다. 3개월은 버틸 수 있겠어. 언제나 신발과 바지의 교체주기에 신경을 써야 하니. 내 영혼은 자동차? 연료는 알코올? 나는야 워킹 머신. 하루에 8km, 8x30x4. 오, 960km를 걸으면 신발이 닳는군! 알아 봤자 별 도움 안 되는 수치다. 신발을 털 때 나오는 모래먼지의 출처들. 서울 여기저기, 성남, 대전, 양평, 제천, 안동, 영주, 영양, 울진, 영덕, 포항, 울산, 강릉, 평창.. 어이쿠, 수고하셨습니다. 안녕, 신발.

퍼즐.

2012년 9월 1일

퍼즐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하나의 퍼즐 조각을 다른 조각에 연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며, 이 점에서 퍼즐의 기술과 바둑의 기술 사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먼저, 조각들은 오직 짜맞추어졌을 때만 파악 가능한 어떤 형태와 의미를 얻게 된다. 따로 떼어 관찰하면 퍼즐 조각 하나하나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하나의 조각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자 불투명한 도전일 뿐이다. 하지만 이 조각을 이웃하는 다른 조각 하나와 연결시키는 데 성공하면, 그 조각은 곧바로 사라지면서 조각으로서의 존재를 멈추게 된다. 영어로 ‘퍼즐puzzle’-수수께끼-이라는 말이 아주 잘 나타내듯 이 조각들을 맞추는 데 수반된 강도 높은 어려움 역시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그럴 이유가 아예 없었던 것처럼 나타난다. 기적적으로 연결된 두 조각은 이제 하나의 조각 역할을 하게 되고, 다시 새로운 실수, 망설임, 혼란, 예상의 출발점이 된다. – “인생사용법”, 조르주 페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