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拔齒

2012년 8월 31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김수영은 멀쩡한 생니를 하루에 하나씩 흔들어 뽑았다고 한다. 이빨을 흔들면 통증이 오고, 통증이 오면 아직 살아 있구나, 살아 있구나, 매일같이 사람이 죽어나가는 걸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던 시절을 그렇게 견뎠다고 한다. 자유당 시절 그는 이 버릇을 어찌하지 못하고 취하면 가끔씩 틀니를 빼 술상 위에 내던졌다고 한다. 다음 날이면 사라진 틀니를 찾아 술집을 기웃거리는 그의 아내를 볼 수 있었다는데, 한번은 술통 속에 들어가 딱딱딱 술통 벽을 치며 울고 있는 틀니를 찾아 온 날이 있었다고……

새들 중엔 자신의 깃털을 뽑는 새들이 있다.
날지 못할지언정 깃털이라도 뽑아 새는 날개를 증명한다.

-김수영의 拔齒, 손택수

집에 도착한 계간지 훑어보다 눈에 걸리는 시라서..

몬테코어

2012년 8월 30일

소설 “몬테코어”. 내 거친 분류에 따르자면 이 작품은 ‘아버지에 대한 회상’ 범주에 들어가지만 그 회상의 방식이 매우 독특하다. 작가가 자신을 타자로 돌려놓고 자신에게 고백하는 글과 아버지의 오래된 친구의 이메일을 바탕으로 작품이 구성되어 있다.

작가이자 알제리계 스웨덴인인 아들에게 아버지는 자신이 쓰던 언어를 버리고 우스꽝스러운 스웨덴 계 이름으로 바꾼, 변절한 알제리인이자 가족을 버린 무책임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오래된 친구(그렇게 주장하는) 카디르는 이메일로 반박한다. 아버지는 아랍계 이민자에 대한 노골적인 편견을 이겨내기 위해 이름을 바꾸고 아들에게 철저한 스웨덴어 교육을 시켰다. 하지만 아들은 완전히 ‘스웨덴인’도 아니고 ‘아랍인’도 아닌 제3의 어떤 자였으며 아버지는 아들에 치이고 바깥에 치이는, 안팎으로 고립된 외로운 이였다.

스웨덴의 다문화정책과 1990년대의 경제위기의 충돌 덕분에 외국인에 반감이 높아지자 신나치, 백인우월주의자의 테러가 발생하고 아들은 이에 대항하고 아버지는 사회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도망치듯이 스웨덴을 떠난다. 작가의 가족사 야그인가? 여러 면에서 모호한데 그 중 하나는 바로 아버지의 친구인 카디르의 존재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아버지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어 아버지 그 자신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게다가 작가 자신의 기억도 중간중간 환상에 가까운 대목이 많아 윤색의 느낌이 짙다. 두 명의 분명치 않은 회상이 현실과 맞물리면서 작품 전체에 흐릿함을 더한다.

이 소설을 단지 아버지와 아들의 엇갈린 관계를 다룬 것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게 현재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다문화정책의 파열음, ‘주류 문화’와 ‘이민자 문화’의 충돌은 이제 남의 일이 아니게 되었지.. 주류의 시각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사회의 단면을 재치있는 구성으로 그려낸 작가의 이름, 요나스 하센 케미리를 기억해둬야겠다.

‘아버지에 대한 회상’ 범주(최근 걸로):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사물의 안타까움성” 디미트리 베르휠스트, “W또는 유년의 기억” 조르주 페렉.

셜록 홈즈가 틀렸다.

2012년 8월 29일

한글을 추리소설로 익히고 유소년 시절 내내 코넌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을 읽어대서 그런지 이런 책 제목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셜록 홈즈가 틀렸다.” 뭐라고?

저자 피에르 바야르는 “바스커빌의 개”의 홈즈의 수사법을 관찰-비교-역추론으로 정리한다. 현실이 잠재적으로 품고 있는 무한한 기호의 장場 안에서 선택과 명명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선별된 ‘단서’들. 바로 이 과정에 대한 태클로 ‘추리 비평’이 시작된다. 텍스트에서 제시된 명제들은 물질적으론 닫혔지만(안정된 수의 진술이 담겨 있음) 결코 ‘주관적 닫힘’(망상에 대한 방책)을 겸하지 않는다. 특히 문학 텍스트가 낳는 세계가 불완전한 세계임을 고려한다면 다르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문학이 표현한 세계는 우리와 무슨 관계를 맺고 있을까? 단지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건가? 피에르 바야르에 따르면 코넌 도일에게 셜록 홈즈는 가상의 존재 이상이었다. 애정을 기울이지 않고 창조한 홈즈 때문에 자신의 다른 작품들이 묻히게 되고 “마지막 사건”에서 홈즈를 없애 버리지만 광기에 가까운 독자들의 집단적인 항의에 떠밀려 다시 살려낸다. 그 ‘부활’의 작품이 바로 “바스커빌의 개”이다. “셜록 홈즈가 틀렸다”는 작가가 애증을 가졌던 탐정 캐릭터의 수사를 전면 재검토한다.

‘재수사’의 부분이 이 책의 백미라 여기서 야그를 멈춘다. 다만 피에르 바야르가 제시하는, 작가와 독자가 문학작품 속 인물과 맺는 관계에 주목하여 소설을 다시 읽는 방법은 다른 문학 작품을 접할 때에도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같은 저자의, 독서 자체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과 추리 비평 연작 중 하나인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도 같이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서평http://suhhyng.pe.kr/?p=879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서평http://suhhyng.pe.kr/?p=734

Play Dead

2012년 8월 22일

추천을 받아 Bjork의 음반을 듣고 있는데 “Play Dead” 의 가사가 자꾸 귀에 걸린다.

darling stop confusing me // with your wishful thinking // hopeful embraces // don’t you understand? // i have to go through this // i belong to here where // no-one cares and no-one loves // no light no air to live in // a place called hate // the city of fear // i play dead // it stops the hurting // i play dead // and hurting stops

죽은 척하기. here where no-one cares and no-one loves no light no air to live in.. 삶의 알짜배기 핵이 남아 있지 않은 순간을 말하는 거 아닌가? 쇼펜하우어는 꽤나 끔찍한 비유로 이 상태를 표현한다. <인간의 삶은 살아 있는 배우들의 연기로 시작되어 같은 복장을 한 자동인형들의 연기로 끝나는 연극 공연과 흡사하다> 슬라보예 지젝이 즐겨 쓰는 SF용어, “언데드<죽진 않는 존재>”인가? Play dead를 여러 번 외치지만 노래의 주인공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죽을 수 있지만 그래도 삶은 계속 될 테니까.

태초에 빛이 있었으니.

2012년 8월 21일

Before the word there was light, after the word there will be light. – 백남준, 1992년작.

 

소마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보고 끄적인 자유 연상의 메모.

말라르메나 이태백 같은 시인의 ‘난해한 시’ 는 번역에서도 여전히 모호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의미와 크고 작은 의미의 차이들은 깜박거리는 불빛으로 표시될 것이다. – ‘인공지능 대 인공신진대사’, 백남준

여러분이 보는 것은 60헤르츠 파동의 신비로운 섬광일 뿐이다. 노버트 위너의 수수께끼 같은 경구인 “메시지를 지닌 정보는 메시지가 없는 정보와 동일하게 중요하다.”를 예술적인 방법으로 보여준 셈이다. – ‘커뮤니케이션-예술’, 백남준

어둠인지 빛인지 // 광막한 어스름의 깊은 합일 속에 // 긴 메아리 멀리서 잦아들 듯 // 색과 소리와 향이 서로 상응하네 – ‘상응’ 중에서. 보들레르

안철수의 생각

2012년 8월 13일

2012년 7월 19일 1쇄. 7월 31일 22쇄 발행. 첫 장부터 주눅들게 만드는 수치가 나온다. 아니 도대체 무슨 책이길래? “안철수의 생각”. 글자 그대로 명망있는 전 기업가이자 교수의 인터뷰라고 볼 수 있고 아니면 예비 대선 후보의 출사표로 읽을 수도 있겠지. 전자라 치면 상당히 재미없는 대담집이지만 저 놀라운 판매 수치를 보아하니 구매자의 대부분은 ‘출사표’로 받아들인 게 아닐까.

뭐가 재미없냐고? 책을 들고 아무데나 던지더라도 완벽히 유지될 것 같은 평형. 책 내용이 이렇다. 일단 질문하면 현재 사태에 대한 간단한 분석을 하고 그의 ‘생각’은 원칙, 상식, 소통으로 귀결된다. 그걸 트집잡는 건 아니다. 허나 극렬한 논쟁이 될만한 사안을 한 두 페이지로 정리하고 넘어가거나 반대되는 두 가지의 입장을 절충하는 행동은 책에서나 가능하잖아.

아직도 그의 ‘생각’을 잘 모르겠다.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시하고 시장경제를 옹호하며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이 시대의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복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외치는데 이념적 저항감을 느낄 한국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걸 위한 구체적인 ‘선택’은 이 책에서는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2012 JIMMF : 모렌테

2012년 8월 10일

중3때 플라멩코 음반을 들은 적이 있다. 손뼉치기와 발구르기의 장단 위에서의 흐느낌.. 굳이 표현하자면 판소리와 흡사한 느낌이랄까. (영화 예고편 :http://youtu.be/yjn0Z5re5OM )

2012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Morente”라는 영화를 보다. 플라멩코 가수 엔리케 모렌테는 피카소의 ‘게르니카’ 를 보고 노래로 읊조린다. 스페인 내전 때 독일군에 의해 폭격을 당한 도시, 게르니카. 극장 안에서 많은 이들이 귀 기울이며 장단을 같이 한다.

신나는 춤사위를 뒤로 하고 공옥진 여사를 떠올리다. 말년에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녀는 마침내 무형 문화재로 인정받고 나서 세상을 뜬다. 장관의 말 한마디에 그제야 국가에 의해 인정받았던 예술인.. (http://goo.gl/KXbJB )

전통적인 예술을 현재에 맞춰 변용하는 건 인정받기 힘든건가. 안달루시아에서 태동한 플라멩코는 저렇게 지금 현실과 같이 호흡하는데 우리 판소리는 안되는 걸까.. 특유의 망상땜에 끄적인 글이다만 뭔가 씁쓸하다.

의자놀이

2012년 8월 9일

쌍용자동차 사태를 다룬 공지영 작가의 르포르타주, ”의자놀이”. 긴말없이 그저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평은 아래 인용문으로 대신한다..

마틴 니묄러 “그들이 왔다”
제일 먼저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지만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지만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지만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지만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술잔.

2012년 8월 5일

그는 왜 거기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습관처럼 목이 말라 펍에 들어갔거나 오지 않는 이를 기다리느라 그랬거나 해를 피해 앉아 있을 곳이 필요했거나. 자리에 앉아 거리를 응시한다. 뭔가 이상하다. 사람들이 나타나고 사라지고. 장면이 반복된다. 어지럽다. 목을 조르는 듯한 무위와 무력감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기에. 하지만 안도한다. 잔에 담긴 맥주의 높이가 점점 낮아져서. 지금 상황에서 의도대로 되는 건 술잔뿐이지. 어쩔 수 있나. 들고 마시고 내릴 수 밖에. 그렇게 보잘것없는 위안은 바닥을 드러내고 빈 술잔은 곧 되풀이되는 풍경에 합류한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숨막히는 거리로 뛰어든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잘 모르겠다.

숨막히는 태양아래 서울을 돌아다니다 들어간 펍에서 멍때리면서 거리를 쳐다보는 어느 외국인을 보고.. 내 감정을 이입하면서 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