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건 부두로 가는 길.

2012년 6월 30일

중산층은 ‘속물’ 이라는 말에서 그쳐버린다면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속물근성이란 것이 일종의 이상주의와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다. .. 계급적 편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지만, 동시에 누구나 ‘자신’ 은 무슨 신기한 수가 있는지 그런 편견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한다. 속물근성이란 다른 모든 사람들에서는 확인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만큼은 예외인 악덕이다. .. 우리 모두 계급 차별을 맹렬히 비난하지만 그것이 정말 없어지기를 진지하게 바라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와 맞닥뜨린다. 그것은 모든 혁명적 소신이 갖는 힘의 일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은밀한 확신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 유감스럽게도 계급 차별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아무 진전도 있을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이 없어지기를 바랄 ‘필요’ 는 있되, 그만한 대가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 하는 한 그 바람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p200~217

“노동의 배신” 서평 쓰면서 연상 독서의 한 과정으로 뒤적거린 조지 오웰의 “위건부두로 가는 길”. 많은 세월이 지났건만 통찰력있는 문장들이다. 아래 발췌는 가장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다.

연합해야 할 사람들은 사장에게 굽실거려야 하고 집세 낼 생각을 하면 몸서리쳐지는 모든 이들이다. .. 해고당하는 꿈을 자주 꾸는 모든 은행원은, 파산 직전을 오가는 모든 가게 주인은 본질적으로 같은 처지이다. 그들은 침몰하는 중산층이며, 그들 대부분은 세련됨이 그들을 띄워주는 부표인 양 세련됨에 매달린다. P306~308

노동의 배신

2012년 6월 29일

‘열심히 일해야 남보다 앞선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이렇게 살 수 있는 거야.’ 이처럼 ‘열심히 일하는 것’ 이 성공의 비결이라는 야그를 많이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일을 해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을 해도 점점 더 가난해지고 빚만 늘어갈 수 있다는 야그는 들어보았는가?

“노동의 배신”에서 칼럼니스트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한 가지 실험에 뛰어든다. 비숙련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만으로 실제 생활이 가능할까? 목표는 간단명료하다. 진짜 가난한 사람들이 수입과 지출을 맞출 수 있는지 시험해보는 것. 그녀는 웨이트리스, 물품 정리, 슈퍼마켓 계산원, 청소 대행 업체, 요양원 간호사 보조 등등 온갖 직업을 전전하지만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리 뼈빠지게 일해도 집세에 비해 임금이 너무 낮아 생활이 불가능했다. 집을 포기하면 차 안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하고 당장 내일이 급하니 몸이 아파도 일을 쉬지 못한다. 그럼 돈을 더 많이 주고 집세가 낮은 곳으로 이사하면 되지 않은가? 저소득 노동자들은 ‘경제적 인간’ 과는 달리 이동수단의 제한도 크거니와 조언을 구할 곳도 없고 오직 구인 광고를 통해서만 정보를 접한다. 물리학의 몇몇 명제가 그렇듯이, 빈곤 속의 삶도 시작 조건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또 다른 의문. 노동자들이 이직하는 것이 어렵다면 왜 직장에게 개인적 혹은 집단적으로 더 나은 대우를 요구하지 않는 걸까? 작가의 경험담을 들어보자면 바로 핵심은 기만과 인격모독에 있다. ‘우리’는 동료이니 인내를 가지고 일하라, ‘우리’는 하나다 라는 말을 계속 주입하고 갑자기 가방을 뒤지거나 약물검사를 시행하여 스스로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을 찍는다. 가난이 범죄가 되는 순간이다.

예전에 일어난 홍익대 청소 노동자 사태, 은마 아파트 청소노동자의 감전사가 떠오르기도 하고 지하철 첫 차를 탈 때마다 마주친 꾸벅꾸벅 조는 할머니들이 생각난다. 10년 전의 미국 사회의 한 단면을 그린 르포이지만 왜이리 지금 한국과 겹쳐 보이는지.. 그들의 기운, 건강, 생명의 일부 덕분에 내가 이렇게 편하게 살고 있잖아. 저자는 죄책감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한참 모자라다고 말한다. ‘우리가 느껴야 마땅한 감정은 수치심이다.’

야만스러운 탐정들.

2012년 6월 27일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교차되는 시선들. 같은 상황을 겪었더라도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르다는 걸 통해 사건을 다양한 색깔로 그려낼 수 있는 기법이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앞서 말한 기법이 극단적으로 확장되었다. 무려 8개 국가 40명의 화자가 수십 년간에 걸쳐 두 명의 무모한 시인에 대해서 야그한다. 아르투로 벨라노와 율리세스 리마. 그들은 기존의 문학에 반항하며 ‘내장사실주의’를 주창한다. 문학은 밑바닥 현실까지 드러내야 한다!

‘시의 불행한 운명은 온전하게 시를 향유하는 사람에게 늘 위험이 따른다는데 있으며, 시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강렬한 감정이 꼭 필요하긴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절제하면서 음미해야 한다는 그녀의 생각을 말해주고 싶었다.’(1) 그들은 위험에 대해서 연연하지 않고 앞서 ‘내장사실주의’를 지향한 세사레아 타나헤로라는 시인의 자취를 찾는데 전념한다. 삶의 의미가 그것에 달려있다는 듯이. 읽히지도 않는 시를 그렇게 미련하게 추적해야만 했을까?

‘어떤 시를 변호할 수 있는 주장 같은 건 없다. 시는 살아남음으로써 스스로를 변호하거나 옹호할 여지가 없거나 둘 중의 하나다.’(2) 아르투로와 율리세스는 이런 관점을 거부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환멸뿐이다. <청춘은 사기극이다> 격변하는 사회에 이리저리 치이다 점점 사라져간다. 존재와 열정 모두다. 40명의 화자에 의해서 그려지는 모습은 이렇다. 하지만 불완전하다. 1968년 멕시코 학생운동, 1973년 칠레 군사쿠데타, 1979년 니카라과 혁명, 스페인 프랑코의 독재. 굉장히 개인적이면서도 정치적이며 편견에 치우칠 수 밖에 없는 증언들.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지? ‘거대한 드라마들, 부피 큰 소설들의 연속이지만, 결국 그 본질적 주장은 너무나 많은 페이지들로 인해 정신이 산만해진 우리가 가까스로 읽을 수 있는 충동적 단락의 뒤범벅 속에 파묻혀 있는 몇 안 되는 단어들로 요약이 되지. 그것들은 때로는 대화 속에, 때로는 주석 속에 숨겨져 있는데, 가끔은 제목 속에조차 숨겨져 있지.’(3) “야만스러운 탐정들”. 미래가 사라진 야만의 시대 속에서 돌파구를 탐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삭임들..

삶과 문학의 관계를 이렇게까지 파헤칠 수 있는 건가. 1000페이지 동안 작가의 고백이 진하게 묻어 나온다. <문학은 결백하지 않다> 어둡거나 가볍거나 처절한 문장들. 인터뷰 한 구절로 글을 마무리 하고 싶다. 웬지 로베르토 볼라뇨의 진심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아서. ‘당신에게 가장 큰 회한은?.. 너무 많습니다. 나는 항상 회한과 함께 잠자리에 들지요. 내 회한은 글을 쓸 줄 알아서 나랑 같이 글도 씁니다.’(4)

 

(1) 제인 오스틴 “설득”
(2) 조지 오웰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
(3) 알베르토 망구엘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
(4) 작가와의 인터뷰 2000년 3월 19일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

한 사건에 대한 여러 시선을 담은 작품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 을 비롯하여 러셀 뱅크스의 “달콤한 내세”, 동일 인물의 시점 바꾸기를 실험한 폴 오스터의 “보이지 않는” 르포, 탐정소설이 결합된 리카르도 피글리아의 “인공호흡” 등등

탄식의 다리.

2012년 6월 25일

아, 형. 미안. 여기 있으려니 막 욕이 나오네. 동서울터미널에서, 사촌이 내뱉듯이 말한다. 복귀할 때마다 여기서 양구 가는 버스를 탔어. 언제쯤 다시 나올 수 있을까. 바로 이 계단에서 담배 엄청 폈지. 큭. 출근하기 위해 300km를 가야 하는 내 심정과 비슷하구나. 네 울림은 더 깊고 어둡지만. 버스가 출발한다. 올림픽 대교가 보인다. 안녕. 눈이 감긴다.. 아, 형. 설마 나랑 비슷한 생각한 거야? 언젠가 사촌과 동네 뒷산을 탄 적이 있다. 무더운 숲 속을 헤치다 난데없이 큰 다리가 나오고 그 아래로 시원하게 차들이 질주한다. 나와 사촌은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사촌이 말을 꺼낸다. 나랑 비슷한 생각한 거야? 어라. 몸이 기울어지네. 버스가 중앙고속도로에 진입하는구나.. 여긴 바로 탄식의 다리입니다! 아하하. 왜 그런 이름이냐구요? 다리 왼쪽은 법원이고 오른쪽은 감옥입니다. 판결을 받은 죄수가 감옥으로 들어가기 전에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베네치아의 풍경을 저 다리에서 본다 해서 “탄식의 다리” 라는 이름이 붙여졌죠. 어라. 웬 뽕짝이. 눈을 뜬다. 기사님이 틀어 놓은 거구나.. 아, 형. 생각나? 육군훈련소에서 야외 훈련 받으려면 매번 통과해야 했던 다리가 있었잖아. 맞아. 훈련 받으러 6km이상 걸어가야 했지. 그 아래로는 천안논산고속도로가 있었고. 맞아. 그 아래로는 차들이 시원하게 다녔지. 가슴 시원하게. 맞아. 나랑 비슷한 생각했구나. 여길 탄식의 다리라 부르자구! 논산의 그 다리도. 탄식의 다리? 그건 말이지.. 영주 터미널입니다! 차로 걸어간다. 이쯤 되면 막 욕이 나오면서 내뱉듯이 말하겠지. 빌어먹을. 또 산길 80km를 들어가야 돼. 그런데 이번엔 웃음만 나온다. 버스 안에서 졸다가 초딩 때 간 유럽여행과 몇 개월 전과 불과 3시간 전 기억이 칵테일처럼 섞이다니. 자면서도 다리로 브레인스토밍이라니. 큭. 이 길 위에서도 누군가의 한숨, 담뱃재, 눈물이 있었겠지?

취야.

2012년 6월 21일

갑자기 술을 마시고 싶었다. 같이 사는 의과 형을 유혹했건만 이 분 단호하다. 7월 바닷가 출격을 목표로 다이어트하시는 중이라서. 그 심정 뼈저리게 아는 처지라. 단념하고 하이트 캔을 깐다. 물론 형 앞에서. 넘어올 것 같다. 칼로리를 묻는다. 131칼로리이에요. 시원하게 한 잔 하시죠. 맥주캔을 흔든다. 그 흔들리는 눈빛을 보았다. 이러는 내가 싫다. 그 심정 뼈저리게 아는 처지라. 그래서 냉장고에서 갓 꺼낸 캔을 개봉한다. 아니 왜 벌써 까노. 그냥. 제가 마시려구요. 잘 빠진 산토리 프리미엄 몰츠 유리잔을 씻어서 무심히 내놓는다. 니가 마실끼가. 네. 하지만 형이 드신다면. 아니다. 정말 멋진 분이다. 응원해야지. 그 심정 뼈저리게 아는 처지라. TV에선 6.25특집으로 미국기자가 해병대 정신을 칭찬한 내용을 반복한다. 전쟁이란 건 참 복잡하고 비참한 일인데. 왜 자꾸 한 명의 외국 기자 야그를 되풀이하는 거지? 형. 벌써 6.25네요. 그러게. 일년의 반이 지나갔어요. 좀있으면 그 날, 12월 24일이 오겠죠? 휴. 남은 6개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어야 할텐데. 그 심정 뼈저리게 아는 처지라. 제가 그 날 발리를 지킬 테니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래요. 형. 드시죠. 한 잔만 마시면 괜찮겠지? 당연하죠. 전 살 빼고 술 마시기 시작했어요. 맥주가 떨어졌다. 저녁도 부실하게 먹었는데 막걸리나 마실까요? 제발. 날 유혹하지 말아다오. 한. 잔. 만 드세요. 나 잔다. 방 안으로 들어가신다. 멋진 분이야. 그 심정 잘 알죠. 근데 전 술을 마시고 싶었거든요..

휴. 대전에서 본 이응노의 “취야”. 저 그림처럼 술마시며 오랫동안 야그할 수 있었으면.

바람 소리.

2012년 6월 20일

오키나와의 한 마을에는 전설과 같은 야그가 내려오고 있다. 절벽 동굴에는 해골이 놓여져 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운가미(두개골)에서 구슬픈 소리가 난단다. 본토의 방송국에서 취재하고자 사람을 보내고 토박이인 세이키치가 극렬히 반대하면서 일이 꼬인다.

메도루마 슌의 “바람소리”. 이 작품은 토박이 ‘세이키치’와 기자 ‘후지이’의 과거와 현대를 대비시킨다. 두 명 다 전쟁의 피해자이다. 세이키치는 미국의 오키나와 상륙 당시 동굴로 피난가야 했었고 후지이는 살아 남은 가미가제 대원 중 하나였다. 그럼 해골은 누구일까? 라는 궁금증을 중심으로 하여 작가는 치밀하게 이야기를 채워 나간다.

일단 오키나와 전투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기사 참조 :http://goo.gl/YRrN6 ) 굳이 이 소설을 분류하자면 전후戰後문학에 넣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의 문학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메도루마 슌은 무의미한 희생을 겪어야 했던 오키나와 사람들의 아픔을 드러내려고 했으니까.

매번 하던 대로 1인 브레인 스토밍을 시작~ 일본과 같이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의 전후문학을 뒤적거린다. 이탈로 칼비노의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 벱페 페놀리오의 “사적인 문제”. 당시 파시즘의 광기 속에서 개인의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던 작품들이다. 흠. 이와 비슷한 독일 소설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네. 아래 글은 이탈로 칼비노가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에 붙인 서문 중 한 글귀이지만 메도루마 슌의 “바람소리”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 같아서..

“이 작품은 이렇게 완전한 소외의 의미에서 탄생했다. 순수한 고통과 상상과 과시가 조금씩 뒤섞인 소외였다. 오늘날 이 책에서 인정해주고 싶은 가치가 있다면 이것이다. 바로 ‘지나치게 젊은’ 사람의 궁핍함과 소외되고 거부된 사람들의 궁핍함이 결합되어 있는, 아직은 감춰져 있지만, 생명력의 이미지이다.”

세상의 마지막 밤.

2012년 6월 19일

헬게이트가 열린다! 많은 게이머들이 디아블로 3의 출시를 기다리며 외친 말이건만 난 이거 들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소설을 다시 꺼내 들었다. 뜬금없네? 아냐. 들어보라니까. 로랑 고데의 “세상의 마지막 밤”. 지옥 같다.. 라는 표현을 쓸 때 무슨 이미지를 떠올리는지? 불바다, 끊임없는 고통? 그럼 이미 삶 자체가 ‘지옥’ 같은 사람에게 지옥이란? 소설에선 ‘죽음과 삶이 포개어져 있다.’ 라는 표현이 나오지. 정말 아끼는 이가 죽어서 그 기억을 평생 가슴 속에 담고 살거나, 혹은 사는 의미를 잃어 버려서 죽음과 다름없는 나날이 이어지거나. 주인공 마테오의 상황이 딱 그래. 자신과 상관없는 갱들간의 총격전에 휘말려 아들을 잃었어. 나폴리를 뒤져 총을 쏜 놈을 찾아내 죽이려는 순간 망설이고 원수를 풀어준 거야. 아내는 분노하여 그를 떠나고. 미치광이 교수와 파문 직전의 신부를 만난다. 아들을 구해야 돼. 어떻게? 교수가 알려준다. 바로 오늘이야.

헬게이트가 열린다! 지옥으로 내려가면 아들을 되살릴 수 있어. 이제 그는 떠난다. 세상의 마지막 밤에 지옥으로. 연상되는 야그가 있지 않아? 오르페우스가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되살리려고 지옥으로 내려간다는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에겐 하데스를 홀릴만한 음악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지만 마테오는 이건 뭐 맨몸으로 나이트메어 난이도에 뛰어든 거라니까. 사실 난 지옥을 믿지도 않는다. 게다가 냉정한 문체를 좋아한다. 하지만 신화에 잔혹한 복수극의 색깔을 입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미묘하게 그려내는 작가 덕분에 몰입해서 읽었지. 게임 출시 소식에 다시 읽었고. 하지만 아직도 구분이 되지 않는다. 마테오가 겪은 그럼직한 현실과 상상으로 그려낸 시적인 지옥의 장면. 뭐가 더 끔찍한 거지? 뭐긴. 그게 바로 오늘이야.

우리였던 그림자.

2012년 6월 18일

전두환 전 대통령을 포함한 5공 핵심 인사들이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퍼레이드에 참관해 ‘사열’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육사발전기금측은 지난 8일 육사에서 육사발전기금 200억 달성 행사가 있어, 전두환 전 대통령과 부인 이순자 여사,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이 참석했으며, 매주 금요일 진행되는 육사 생도 퍼레이드도 참관했다고 밝혔습니다. – YTN

마침 읽고 있던 책과 내용이 닿아 있어서 그런가 더 충격적이었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우리였던 그림자”. 칠레의 군부독재를 몸으로 겪어낸 이들의 무용담이기도 하면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유토피아를 그려낸 작품이다. (루이스 세풀베다가 피노체트의 죽음에 붙여 쓴 글 참조 : http://goo.gl/3lnxz ) 강풀의 웹툰 “26년” 과 비교해볼 수도 있겠다. “그림자”가 훨씬 유쾌한 템포의 문체이긴 하지만 결말은 씁쓸하다는 점에서 비슷하지.

이런저런 생각 중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을 떠올린다. “우리였던 그림자”는 피해자들의 야그를 다룬 거라면 “칠레의 밤”은 군부독재에 영합한 이들을 ‘글’ 로서 끈덕지게 처단한다. 피노체트에게 협력한 주인공의 자조섞인 한 마디. ‘칠레에서는 이렇게 문학을 하지. 하지만 어디 칠레에서만 그런가. 아르헨티나, 멕시코, 과테말라, 스페인, 프랑스, 독일, 푸르른 영국과 즐거운 이탈리아에서도 그런걸. 문학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아니 우리가, 시궁창에 처박히기 싫어서,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게들 한다고.’

산골짜기에서 칠레 작가의 소설을 보며 공감하다니. 딴 나라 일이 아니다. ‘역사 바로(?) 세우기’ 는 현재 진행 중이다. 역사 청산은 커녕 다들 포장하느라 바쁘다. ( http://goo.gl/GySYI http://goo.gl/vXweO ) 요즘엔 기억상실증도 전염병이 되어 버렸어.

항상 책 읽다 난데없이 이것저것 덕지덕지 이어 붙이면서 콜라주가 시작된단 말이지. 하하.

무슨 커피가 제일 맛있을까.

2012년 6월 14일

찬장을 연다. 뭐 마시지. 케냐 피베리? 여러 종류의 커피들 중 고민하다 피식. 고딩 때는 캔커피 한 잔이면 충분했지. 설탕 중독이었을 거야. 멕시코 알투라? 몇 년 전부터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고 생산지 따지며 커피를 마시게 되었어.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급기야 생두를 사서 볶기도 하고. 수북히 쌓인 커피 껍질을 치우면서 후회하기도 하고. 이디오피아 시다모? 더치 커피를 만들기 위해 페트병 두 개를 연결해서 물방울 떨어지는 속도 가지고 고민했지. 인도네시아 블루문? 쓸데없는 자부심. 내 커피가 제일 맛있어. 내가 볶고 갈아서 내린 커피. 나만의 커피. 과테말라 SHB? 지구 건너편에서 사람들이 저임금으로 죽어라 따고 껍질 벗기고 해서 생산된 커피. 반半 노예들이 생산한 커피. 브라질 산토스? 뭔 상관이야. 사치 좀 부리면 안되나. 있어 보이잖아. 커피 마시면서 아는 척 좀 하고. 다만 아는 척에서 끝낼 줄 몰라 문제라는 거. 콜림비아 수프리모? 무슨 커피가 제일 맛있을까. 이 원두는 어쩌구 저 원두는 저쩌구. 예멘 모카? 에스프레소나 마시자. 밤 중에 홀로 한 잔 들이키며 깨닫는다. 그래. 누군가와 수다 떨면서 마시는 커피가 젤 맛있는 거야. 하하.

오몬 라

2012년 6월 13일

옛날 사람들은 달을 보면서 어케 생각했을까? 1902년 영화 “달나라 여행”만 보더라도 달은 온갖 환상이 담겨진 대상이었다. 대포로 달에 가질 않나, 달에 신기한 종족들이 살고 있고.. 작년 칸 영화제에서 공개된 핸드메이드 칼라 복원판을 함 보시길.
( http://youtu.be/PZF92i6mJwQ )

이 영화를 떠올리게 된 건 소설 “오몬 라”를 읽으면서였다. 국가가 개인의 환상을 실현하기 시작한다면? 냉전 시대에 소련은 자동 기계를 달에 착륙시킬 계획을 세운다. 여기서부터가 재미있다. 사실은 자동이 아닌, 각 분리 로켓마다 사람이 타고 있고 원격 운전 장치도 사람이 자전거를 돌리는 거라면? 각각의 운전자들은 영웅이 되기를 강요당하면서 훈련을 받는다. 물론 극비리에.

주인공 오몬은 이 지상에서의 평화와 자유를 얻을 수 없기에 저 달로 도피하기 위해 훈련을 견뎌낸다. 달로 가는 도중 분리된 로켓들에 있던 이들의 비명도 견뎌내면서. 달에 도착하여 깡통 안에서 허리를 굽힌 채로 자전거를 돌린다. 최후의 순간. 지구에선 과학기술의 위대한 발전을 찬양하는 행진곡이 흘러나온다.

여태까지도 충분히 그로테스크하건만. 작가 빅또르 뻴레빈은 마지막에 하나의 장치를 넣어 소설 전체를 꼬아 버린다. 교향곡마냥 소설 전체에 흩뿌려 놓은 동기들이 모여 영화 매트릭스 같은 혼돈을 만든다. 음모론에 기반하여 희한한 상상력으로 러시아 환상문학의 대선배인 고골, 불가코프에 범접하게 쓰여진 작품이랄까.

책을 읽고 “달나라 여행”을 다시 본다. AIR의 몽환적인 음악과 더불어 아련한 추억 같은 영상.. 소설에서 그려진 냉전시대의 살벌한 기술 경쟁에 비하면야 참으로 순진한 거지. 환상은 환상으로 끝났어야 하는데..

브루크너 교향곡 8번

2012년 6월 12일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은 길단 말이야. 긴 게 문제는 아니지. 와 닿지 않아서 그런 거야. 들어봐. 튼실한 베이스를 기반으로 한음씩 쌓아 올리잖아. 거대한 건축물처럼. 이 사람 곡들을 때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라는 찬송가 가사가 생각나네. 헐, 카톨릭 신자였잖아. 알아,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헬름 협곡의 성 떠올려봐. 간달프를 위시한 먼치킨들이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그 곳. 허나 우루크하이는커녕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는 그런 분위기. 신비스러우면서도 고독하지. 제발 그런 덕후스러운 설명은 하지 말아줘. 그래.. 사실 브루크너는 끝까지 독신이었어. 젊을 때는 가난해서, 정신차리고 보니 너무 늙어서. 감정이입 하는 거야? 아니. 장대한 아다지오 악장 동안 주위를 둘러본다. 오페라 하우스.. 여긴 2005년에 개장했어. 밥 먹을 돈 긁어 모아 동생 명의로 청소년 할인 받아 뻔질나게 드나들었지. 그런데 왜 그리 살이 쪘을까? 그러게. 벌써 2012년.. 음악 들으면서 세월을 느끼다니. 방금 바그너가 들렸어. 브루크너는 열렬한 바그너 추종자였으니까. 심지어 교향곡 7번엔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는 악장을 넣기도 했지. 마지막 악장이네. 곡에 흩뿌려놨던 동기들이 모두 집결하면서 구축된 압도적인 클라이맥스가 들을만해. 오호. 성채 완공식인가? 일단 밝잖아. 그는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였어. 오르간 같은 오케스트라의 음향으로 빚어진 자신만의 성채를 봉헌하는 순간이야. 박수를 뒤로 하고 나온다. 와 닿지 않아. 진짜?.. 폰을 꺼내보니 ‘술마시자’. 가야지. 자아부터 수습하고. 7시 반이네.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은 참 길단 말이야.

지금은 졸음 운전 주의 시간대입니다. 안전 운행하세요

2012년 6월 6일

지금은 졸음 운전 주의 시간대입니다. 안전 운행하세요~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집어삼키며 중얼거린다. 그래. 이 시간에 누가 운전을 하겠니. 앞과 뒤엔 아무도 없이. 그저 달린다. 이제 영양을 지나 봉화로 진입하는 구간. 40km 넘게 꼬불꼬불 산길이지. 어라? 노루가 내 앞을 막아 선다. 놀랄 거 없어. 이쯤 되면 도로가 거대한 생태전시장으로 바뀌니까. 가볍게 경적을 울린다. 노루가 놀랐는지 지그재그로 뛰기 시작한다. 내가 뱀이냐?.. 하이빔 헤드라이트를 켠다. 깜박깜박. 반응이 없네. 하긴 달이 너무나 밝으니까. 노루의 궁둥이를 보면서 시속 15km로, 그래, 경운기의 속도로 운전한다. 길바닥 위에선 뭔가 꼼지작거리고. 이리 생동감 넘치는 국도 위에서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이런 날씬 언제나 언제나 있었지만//멍하니 걷는 구름과//공기도 없는 하늘은//언제나 언제나 OK OK//떠올라 나와 산책하지 않겠어요//Baby Baby 공중에 Baby Baby//떠올라 나와 산책하지 않겠어요? 같이 ‘산책’하던 노루는 어느 절벽으로 숨어든다. 뭔가 아쉽다. 내 속을 모르는 건지 아는 건지. 지금은 졸음 운전 주의 시간대입니다. 안전 운행하세요.

사물들..

2012년 6월 5일

그들은 삶을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사방에서 삶을 누리는 것과 소유하는 것을 혼동했다. 그들은 시간의 여유를 갖고 싶고, 세상과 거리를 두고 싶어 했지만, 그들에게 무엇 하나 가져다 주지 않은 세월은 마냥 흐르기만 했다. 결국, 다른 이들이 삶의 단 하나의 성취로 부를 꼽게 되었을 때, 그들은 돈 한 푼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자신들이 가장 불행한 것은 아니라고 자위했다. 아마 옳은 말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타인의 불행을 지워버림으로써 본인의 불행을 확대해 보여 주기 마련이다. 그들은 별 볼 일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의미에서 세월이 그들 편인 것은 사실이었다. 감정을 자극하는 이미지의 세상이 온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보잘것없는 위안이었다. .. 그들의 삶은 마치 고요한 권태처럼 아주 길어진 습관 같았다. 아무것도 없지 않은 삶.

– “사물들”, 조르주 페렉

농담

2012년 6월 3일

오늘은 또 어디 나가니? 글쎄. 영화 한 편 보고 걷다 오겠죠. 또? 너 그러다 영화 한 편 찍겠구나. 주말에만 집에 오는데 좀 쉬고 저녁은 집에서 먹어라. 밤엔 들어올게요. 저녁 약속 있어? 농담이었다. 여자랑 먹을 수도 있겠죠. 뭐.. 어머니가 한숨을 푹 쉬면서 내 어깨를 잡고. ‘다행이다.’ ‘다행이야.’ ‘다행이야…’ ‘돈 필요해?’ 순간 민망해서 허둥지둥 집을 나섰다. 농담이에요.. 말하지도 못하고. 지금 발리로 복귀하는 버스 안에서 내 머릿속을 긁어대는 질문. 내가 뭔가 잘못 해왔던건가?

채찍.

짐승은 스스로 주인이 되기 위해 주인에게서 억지로 채찍을 빼앗아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주인의 채찍 끈에서 생긴 새로운 매듭에서 만들어진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 카프카

당신의 계급 사다리는 안전합니까?

2012년 6월 2일

예전에 “행복을 찾아서” 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찢어지게 가난한 주인공(윌 스미스)이 외판원에서 증권사 인턴으로 취직하고 성공한 주식중개인이 된다는 성공스토리인데 어린 나이에 보면서 느낀 건. 성공하기 정말 힘들구나.. 영화에서 그려진 아메리칸 드림은 아직 존재할까? 뉴욕 타임스에서 펴낸 “당신의 계급 사다리는 안전합니까?”는 미국 내에서 계급간의 사회이동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대출을 통해 증가한 소비는 계급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지만 계급의 벽은 아직도 높다.

소비뿐인가. 비슷한 시점에 심장마비를 경험한 다른 계급의 사람들을 추적해본 결과 높은 계급일수록 더 건강한 식단을 제공받고 더 오래 살 가능성이 높아진다.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복음주의 공동체에 합류하여 이런저런 도움을 받는다. 직장을 잃은 고졸 출신들은 안정적이지 않은 직업에 뛰어들어 하층 계급으로의 추락을 강요당하고 대학중퇴자들은 젊은 나이에 직급의 상승이 막혀버렸다. 불법이민자들은 반복되는 비숙련 노동에 시달리며 고향에 송금하지만 그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머나먼 단어가 되었다. 하지만 매스컴은 계급 감각을 마비시킨다. 많은 잡지와 텔레비전 쇼는 부자들의 장난감과 토템을 찬양하며 감히 계급이라는 주제를 다루지 않는다. 성적 매력과 외모로 매겨지는 서열이 직업과 재산으로 매겨지는 옛 서열을 대체시키면서 명백히 드러난 것들을 상당부분 은폐한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이 책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서두에서 말한 “행복을 찾아서”의 흑인 여자 판이라고 해야 하나. 일단 젊은 나이에 아이가 다섯이고 첫째와 둘째는 감옥을 들락거린다. 변화를 결심한 여자. 피눈물나는 과정 끝에 간호대 학위를 취득하고 전보다 몇 배 많은 봉급을 받지만 언제 또다시 아래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떤다.. 아메리칸 드림은 아직도 멀어 보인다.

“당신의 계급 사다리는 안전합니까?”는 2005년 뉴욕타임스의 심층취재 기사들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은 불어닥친 금융위기, 양극화,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 들이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 나온 게 아니란 걸 알려준다. 복잡한 통계가 아닌 각 계급에 속한 사람들의 생생한 야그를 통해 계급 불평등 구조를 다루고 있어 눈에 쏙쏙 들어온다. 불평등 정도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한국의 문제도 다시 보게 되고.. 보면서 참 부럽더라. 국내 언론에서도 이런 치열한 기사가 나올 수 있을까? 일단 미국에 대한 환상을 깨버리고 한국의 불평등 문제를 환기시켜 준다는 점에서 아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