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의 이빨

2012년 5월 31일

뱀의 이빨 – 우리가 ‘남에게 덤비는’ 뱀의 이빨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는, 누군가의 발뒤꿈치로 짓밟혀보기 전에는 알지 못한다. 여성이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누군가가 발뒤꿈치로 우리의 애인이나 우리의 자식을 짓밝기 전까지는.” 즉 우리의 성격은 체험한 것보다는, 어떤 체험의 부족에 의해서 더 분명하게 규정된다.
–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정, 친구, 거울

2012년 5월 29일

순간 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맺고 있는 우정의 유일한 의미를 깨달았어. 우정이란 기억력의 원활한 작용을 위해 인간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이야. 과거를 기억하고 그것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마도 흔히 말하듯 자아의 총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거야. 자아가 위축되지 않고 그 부피를 간직하기 위해서는 화분에 물을 주듯 추억에 물을 주어야만 하며 이 물주기가 과거의 증인, 말하자면 친구들과 규칙적인 접촉을 요구하는 거야. 그들은 우리의 거울이야. 우리의 기억인 셈이지. 우리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란 우리가 자아를 비춰볼 수 있도록 그들이 이따금 거울의 윤을 내주는 것일 뿐이야. – “정체성”, 밀란 쿤데라

못생긴 남자

2012년 5월 28일

풀리지 않는 의문 하나. 뭔가를 깨닫는 게 기분 좋은 일일까? “못생긴 남자” 에서 레떼는 놀랍지만 유쾌하지 않은 깨달음을 얻는다. 자신이 정말 못생겼다는 것. 여태까지 일에 충실하며 잘 살아왔건만 사장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어떻게 네 얼굴로 제품을 홍보하려는 거지? 아내, 동료들도 확인해준다. 넌 못생겼어. 자아를 아슬아슬하게 버텨주던 확신의 축 하나가 크게 흔들거린다.

그의 해결책은? 성형수술. 유능한 의사의 도움으로 레떼는 새로 태어난다. 사람들에게 인기폭발! 여기저기 세미나에 불러 다니고 재벌 회장의 유혹까지 받는다. 그는 사람들의 간사한 반응에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중독되어간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알고 보니 의사가 찍어내듯 성형수술을 해준 것이다. 다들 잘생겨졌네. 나는 누구지? 정체성도 잃어버리고 회사에서 해고되고 아내는 자신을 닮은 남자와 함께 떠나버린다.

“못생긴 남자”는 한 시간 내내 무언가를 소비해야만 바뀐다고 믿는 물신주의와 타인의 반응에 집착하는 심리를 차갑게 헤집는다. 잘생긴 얼굴로 바꾼다고 자신이 변화하고 출세하는 건가? 다들 똑같은 얼굴.. 똑같은 폰을 들고 있는 거랑 무슨 차이지? 소비를 통해 타인과 다름을 뽐내려 하지만 결국 해고당하는 신세들인데. 아이고. 볼 때 정신 없이 웃긴 했지만 천천히 씹어보니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리게 하는 무시무시한 작품이었다.

6월 3일까지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됩니다. 관심 있는 분은 함 보시길~

설치된 그림자

2012년 5월 24일

사물에 종속되어야 할 그림자가 사물의 형태에서 멋어나 자유롭고 동등하게 활동한다는 것은 현대사회의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기분좋은 시각적 개그가 아닐까? 빛이 깃들지 않다는 것, 말그대로 그림자에 빛을 비추어 봄으로써 새로운 시각 조형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설치된 그림자”, 후쿠다 시게오

http://youtu.be/1XfbiziIHmk

차별받은 식탁

2012년 5월 22일

영화 “스키야키” 의 한 장면. 감방에서 죄수들끼리 자신이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을 말로 그려내는 경연대회를 연다. 듣는 이로 하여금 침을 꼴깍거리게 하면 성공! 푸딩, 라멘, 조개구이 등등 평범해 보이는 음식들이 각각의 개인사와 맞물려 먹었던 그 순간이 아련하게 기억된다. 그런 음식들을 ‘컴포트 푸드 Comfort Food’(1) 라 한다. 다들 있지 않은가. 특별한 추억이 있는 주전부리들, 어머니가 해주던 요리, 입에 들어가면서 따뜻했던 과거가 재생되고 몸도 편안해지는 음식들..

만약 ‘컴포트 푸드’가 한 집단 혹은 계층에서 공유된다면? 그 집단을 벗어나면 접하기 어려운 음식이 존재한다면? “차별받은 식탁”에선 그런 음식을 ‘소울 푸드 Soul Food’ 라 칭한다. 저자는 어려서부터 아부라카스(소 창자 튀김)를 즐겨먹었는데 알고 보니 아부라카스는 일본의 최하층 천민의 음식이었다. 남의 소를 잡아주는 입장이면서 ‘못 먹을’ 부위밖에 받지 못하고 결국 고육지책으로 ‘먹고 살기 위해’ 창조해낸 요리였다.

다른 나라의 차별받는 사람들이 서로 엇비슷한 소울푸드를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저자는 외국으로 눈을 돌린다. 소울 푸드의 원조인 미국 흑인 노예의 음식들.. 지금은 대중화된 프라이드 치킨도 소울 푸드였다. 백인 농장주가 내다버린 닭 날개나 발, 목 등을 먹기 쉽게 튀겨서 먹은 게 시초다. 튀기면 뼈째 먹을 수 있고 조리도 번거롭지 않거니와 배도 더 든든해지니까. 브라질의 국민적 요리인 ‘페이조아다’도 흑인 노예가 먹던 요리다. 이 또한 버리는 부위인 돼지 내장, 귀, 코, 발 등을 콩과 함께 삶아 만든 것이다.

가장 인상깊었던 에피소드. 네팔에 아직도 존재하는 카스트 계급 중 최하층(불가촉천민)을 사르키라고 부르는데 그들도 소울푸드를 가지고 있다. 금기로 여겨지는 소고기 요리. 저자는 마을을 찾아가 사르키들과 스키야키(일본식 소고기 전골)를 함께 먹는다. 처음엔 그를 퉁명스럽게 대했던 사르키 중 한 명이 그와 헤어지면서 털어놓는다. “저희 집에 와주어서 정말 기뻤어요. 지금까지 일부러 저희 집을 찾아와준 사람도 없었고, 함께 소고기를 먹어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어요.”

곱창에 소주 한 잔해야지? 술 먹었으니 감자탕 먹자. 무심코 던지고 받는 ‘밥 한 번 같이 먹자’ 를 되새긴다. 우리한테도 소울 푸드가 있을까? 일단 무거운 주제를 정감넘치게, 눈물겹게 그려낸 저자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어느 소설(2)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마무리하고 싶다. “문제는 먹는 것도, 사는 것도 아니고 그 이유를 아는 것이다.”

 

인용(1) 나는 왜 과식하는가 – 브라이언 완싱크
인용(2) 맛 – 뮈리엘 바르베리

ps. 서울 음식을 다룬 황교익 씨의 칼럼도 읽어보시길.
http://goo.gl/fyppL

발리. 1

2012년 5월 21일

새벽에 도착하여 잠을 청하는데 어떤 악기소리가 들리는거야. 흐음. 이 산골에서 누가 호주 원주민 악기를 연주하다니. 디저리두였던가. 단조로운 음률에 나른해진다. 근데 관사 안에서 나는 것같아 오싹해졌다만. 모르것다. 잠이나 자자. 밖에 나가는 것도 그렇고. 멧돼지가 더 무섭거든. 창 밖이 밝아지자마자 소리의 근원을 찾아갔다. 역시 관사 안이었다. 누구야! 문을 열어보니.

기름 보일러 소리였다. 아. 드디어 미쳐가는구나..

오월愛

2012년 5월 16일

-기억되다. 5.18 30주년 기념행사. 누군가 ‘임을 위한 행진곡’를 부르다 제지당한다.

-잊는다. 30년동안 그 날을 잊지 못하지만 물어보면 손사래를 친다. 쓸데없는 일이라고.

-잊다. 불안정한 상태로 평상시엔 괜찮다가도 군복을 보면 심장이 떨린다. 잠을 자지 못한다.

-잊히다. 전남도청 별관 철거에 대한 논쟁에서 그들은 주인도 아니고 객도 아니었다.

 

-기억하다. 행방불명된 아들의 마지막 인사를. 자신을 집에 데려다 준 학생의 얼굴을.

-잊어라! 다 끝난 야그인데 왜 자꾸 들쳐내는 거지? 돈으로 보상받았잖아.

-기록되다. 그들은 폭도였다. 지금은 유공자이다.

-기념하다. 국가의 이름으로 학살하고 국가의 이름으로 기념하는 5.18

-사라진다. 다들 세상을 떠난다. 이름없는 기억들은 묻혀진다.

 

-기억하라.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이란 바로 ‘망각’ 에 대한 ‘기억’ 의 투쟁이다.” 밀란 쿤데라

 

기억의 변주, 영화 “오월愛”

진화하는 도덕

2012년 5월 15일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 지적 설계론의 허구를 주장하는 과학계 명사들의 에세이들을 모아둔 책이다. 수긍 가는 글도 있긴 하지만 생각의 발목을 잡는 어떤 글을 보고 끄적거려본다.

‘우리의 도덕 감각 역시 진화한다.’ 과학이 우리에게 도덕원리를 제공할 수 없지만 종교도 마찬가지다. 도덕성의 이해는 비종교적인 도덕 추론, 즉 자연 선택설에서 찾아야 한다. 인간이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퍼뜨리고 다른 집단과 협력하기 위해선 친절, 사랑과 같은 도덕 감각을 갖고 있어야만 했다. 수천 년에 걸친 도덕적 진보는 사람들이 타인의 삶에 자신을 투영하여 공감의 범위를 넓히도록 장려하였고 이것과 맞물려 도덕 감각은 진화했다.. 여기까지 에세이의 내용이다.

개개인이 아닌 전체의 도덕 감각은 진화했을까? 글에서 종교의 만행으로 꼽는 돌던지기, 마녀사냥, 십자군, 종교재판 등등의 주체 혹은 공범은 국가 권력이었다. 종교가 없다고 개개인의 총합 이상인 국가의 폭력성이 덜어졌을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기술의 진보가 인간의 ‘진화된 도덕감각’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이젠 기술덕분에 더 쉽고 빠르게, 마음의 짐을 덜면서 사람을 죽일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예전에 써둔 글 참고 http://goo.gl/iprBm )

요즘따라 자꾸 인용하는 것 같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백치”에서 이렇게 냉소했다. ‘무신론자는 종교적인 사람이야. 무신론자는 무신론을 하나의 종교로 믿거든.’ 과학의 합리성을 지키는 건 중요하지만 사회적인 문제를 단일한 틀로만 보는 것도 그들이 그렇게 비판하는 ‘맹신’이 아닐까?..

종교 본능

2012년 5월 14일

인생의 목적은 뭐지? 왜 나한테 불운이 찾아온 걸까? 내세란 게 존재할까?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고? 몇 번은 해봤을 이런 고민들에게 종교는 절대자라는 답을 내려준다. 신이 그렇게 의도하셨으니까.

“종교 본능”에서 제시 베링은 다른 설명을 시도한다. 사람은 무리를 이루며 살아야 했고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수적이었다. 구성원이 뭘 원하는지 활발하게 인지하는 행동양식은 유인원에게는 없는 인간의 가장 큰 특성이 되었다. 이러한 관점을 ‘마음이론’ 이라 하는데 오늘날 마음이론이 우리의 진화한 사회적 뇌를 뒤덮어버리고 우리는 자신의 심적 상태에 해당되는 술어를, 실은 마음이 전혀 없는 사물에까지 과잉 적용한다.

이제 특정 물건이 어떤 자연선택적 과정으로부터 생겨났다고 유추하기보다는 마음 속에 미리 구상한 어떤 목적을 위해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목적기능론’의 선입관 때문에, 원래 있지도 않은 창조자의 마음이 나타나고 기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왜곡된다. 단지 인간의 인지작용(특히 마음이론)이 진화한 것일 뿐 인데 목적과 운명에 대한 환상, 그리고 저승에서의 메시지가 자연 현상의 발생 속에 새겨져 있다는 느낌, 우리의 정신적 삶이 신경학적 죽음 이후에도 살아남을 것이라는 직감이 생기게 되었다.

인간은 타인에 대한 의존 없이 생존이 어렵기 때문에 추방되는 것에 극도로 민감하다. 따라서 반사회적 행동을 삼가게 되었고 ‘누군가’ 쳐다보고 있을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내면의 목소리인 ‘양심’이 생기면서 초자연적 존재가 허구의 도덕적 감시자를 대신하였다. 결국 이 책에 따르면 신이라는 개념은 막대한 생존가치를 지닌 마음이론의 부산물, 즉 ‘적응적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적응 시스템의 산물인 신을 있는 그대로 봐라. 당신의 짧은 삶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는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렸다. 이런 충고를 무시하더라도 치러야 할 지옥은 없다. 단지 기회를 잃어버릴 뿐. 그리고 당신은 죽는다.. 글쎄다. 난 이 책에 대한 대답으로 소설 한 구절을 인용하고자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중 치혼 주교가 이랬지.

“노골적인 무신론이 종교에 무관심한 태도보다 훌륭하다. .. 철저한 무신론자는 가장 철저한 신자에 버금간다. .. 그러나 무관심한 사람에게 믿음이란 해로운 공포일 뿐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2012년 5월 10일

너무나 발칙한 제목이라 집어든 책이 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도대체 무슨 헛소리가 담겼을까 궁금해 하며 책장을 넘기다 보니 생각보다 묵직한 내용을 담고 있더라. 저자는 시작부터 읽기의 정의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독서는 고독한 행위로, 시작하는 즉시 독자는 책들에 대해 자신에게 말을 하기 시작한다. 지금 처한 상황과 여태까지 알고 있던 책(내면의 책)을 가지고 지금 읽는 책을 재구성한다. 우리가 읽었다고 생각하는 책은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책들과 무관한, 우리의 상상에 의해 다시 손질된 텍스트 조각들의 잡다한 축적에 불과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책들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저 생소한 지식이 아닌, 우리의 내적 일관성을 보증하는 데 쓰이는 ‘우리 자신들의 부분들’을 교환한다. 이제 책이 고정된 택스트가 아닌 유동적인 오브제임을 인정하고, ‘타자他者가 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유로운 담론의 일차적인 조건이 된다. 독자든 비독자든 이미 책들을 꾸며나가는 과정 속에 들어가 있으며, 진짜 문제는 거기서 빠져나오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런 과정의 폭과 역동성을 증가시키냐는 것이다. 중요한 건 담론의 순간이며 책은 그 구실이거나 수단일 뿐이다. 학교 교육이 선전하는 완전한 교양 같은 존재, 그 허구성을 짓밟고 자신의 야그를 해야, 우리 내면의 책들이 잠시나마 서로 연결될 기회를 얻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모르는 책 야그가 나왔을 때 방어하는 얄팍한 기술을 가르쳐주는 책이 아니었다. 저자는 많은 책 속에서 쫄지 않고 책을 가로지르는 담론으로 자기 발견을 하고 창조적인 과정으로 이끄는 독서의 방법을 강조한다. 교양에 대한 의무감을 벗어 던져 상상하고 네 자신에 대해 야그하라.. 발칙한 제목과 다르게 참으로 멋진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옥수수와 나

2012년 5월 8일

‘옥수수와 나’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자신이 옥수수라 믿는 광인의 등장, 그 광인의 환상에 가까운, 분명치 않은 서사.. 일단 광인의 야그부터 들어보자. 그는 글을 쓰지 않는 생활력없는 작가였지만 자신이 소속한 출판사 사장의 아내를 만나면서 갑작스런 창작의 충동에 빠진다. 그동안 마감에 쫓겨 겨우 글을 납품하던 그는 처음으로 자유롭게, 미친듯이 쓴다. 그리고 총을 든 분노한 사장이 등장한다. 사장은 작가의 소설을 쓰레기라 칭하면서 두 가지 선택지를 준다. 약을 먹고 죽든가, 총맞고 죽든가.

나는 지금까지의 야그를 광인의 환상으로 보려고 한다. 사장은 기법의 자동성과 장황함을 제거해 소설을 압축하라고 명령하는 또다른 자아일 수도 있다. 아니면 생살여탈권을 쥔 권력자, 그의 소설에 냉담한 세상으로 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광인은 ‘을’ 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는 의미 없는 몸부림을 친다. 자신이 이 야그에서 주인공임을 확인하려는 몸부림..

“나는 언제나 내 인생이라는 난해하고 음란하고 해체적인 책의 저자였어. 이렇다 할 줄거리도 없고 누구도 출판해주지 않을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지. 내가 종속변수라고? 천만의 말씀. 내가 바로 저자이고 일인칭 시점 화자이고 이야기의 종결자야.” 소심하게 약을 선택했건만 끝나지 않는다. 그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라 환상에 빠진 광인이었을 뿐이다. 그저 닭에게 쪼아댐을 당하는 옥수수였다.

‘옥수수와 나’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밀란 쿤데라의 말에 따르면 소설은 실제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을 탐색하는 것이다. 여기서 실존이란 실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어떤 가능성의 영역이다. 저자인 김영하가 그리는 세계는 ‘극단적인, 그러나 현실화되지 않은 가능성’ 이다. 그는 이런 가능성을 포착하여 독자에게 날선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당신 삶의 주인공이자 종결자인가요?

Home Within Home

2012년 5월 7일

계획없이 리움미술관에 들어가면서 약간 아찔했다. 아치형 문이 천장에 거꾸로 붙어있질 않나, 천으로 재현된 집들, 공중에 떠있는 한옥 낙하산. 괜히 여기 왔나? 더 놀라운 건 집요함이 느껴질 정도로 자세히 천과 철사로 구현된 어떤 집의 복도였다. 문고리, 전등, 스위치, 화재 경보기. 왜 이런 작품을 만들게 되었을까? 2층 가운데에 자리한 집 모형은 세밀함으로 사람을 압도했다. 방마다 있는 가구, 옷, 음식, 포스터 등등.. 정확한 비율로 축소되어 있어 흡사 소인국에서 소인들이 밥먹고 일하다 급히 나간 광경같았다. 어라? 웬 한옥이 집을 강타해서 옆이 무너져 있네?

이런 미궁 속에서 비디오 작품을 마주친다. 평면 스크린 가운데 ‘아치형 문’ 이 있다. 배경이 바뀌고.. 아. 저건 어떤 한옥집의 대문이었구나. 집에 따뜻한 햇살이 비친다. 옆에 조그만 안내 글을 보니 작가의 성북동 집이란다. 고개를 돌려보니 4개의 디스플레이가 있다. 서울과 뉴욕 사이에 다리를 건설한다는 엉뚱한 발상이 화면 위에서 그려진다. 인공거품으로 다리를 띄우고 그 중간에 집을 하나 세우는 거야. 바로 Perfect House. 완벽한 집이지.

작년에 평생 처음으로 자취를 시작했다. 여태까지 친숙한 성남의 집에서 벗어나 생소한 지역에 가야 했으니 컬쳐쇼크에 가까웠지. 막막함,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바람, 알아듣기 힘든 억양. 혹시 작가도?.. 다른 나라의 새로운 집에 살면서 느끼는 이질감, 이방인의 감정. 그는 서울 성북동의 아늑한 집을 떠올린다. 고향 집이 여기까지 날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집이 ‘한옥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다가 불시착해버린다. 쿵! 아냐. 차라리 서울과 뉴욕 사이에 다리 하나 세우자. 중간에 집 하나 만들고 편하게 이동하는 거지. 그러나 그는 이제 새로운 집에 익숙해져버렸다. 결국 예전 생활방식과 추억을 상징하는 성북동 집은 뉴욕의 집 안으로 흡수된다.

집 안의 집. 집이라는 개인적 공간이 바뀌면서 적응하는 과정을 예전 집과 지금 집이 합쳐지는 걸로 표현한 게 아닌가. 미술관에 툭툭 던져진 작품들을 내 맘대로 이어서 이야기를 만들다 보니 작가의 향수가 느껴지기도 하고. 아님 내가 향수에 빠진 건가? 하하.

Home Within Home – 서도호, 리움미술관에서.

컨텐츠 풍부한 남자.

2012년 5월 4일

목요일 저녁. 영양군 공보의 회식. 간신히 이어나가는 유쾌함 속에서 누군가 금기의 질문을 던진다. (추첨에서) 몇 번 뽑았어요? 시작되는 탄식과 공감의 눈빛. 휴. 여기에서 놀러 갈만한 곳 있나요? 피식하는 반응들. 없어요, 없어. 그는 발끈하며 열변을 토한다. 31번 국도를 타고 봉화군 재산면을 지나 안동으로 접근하면 농암종택이란 곳이 있어요. 낙동강 상류 지역중 정말 아름답죠. 하회마을 부근에 있는 병산서원도 좋습니다. 가을에 꼭 가보세요. 바다보고 싶시다고요? 읍내에서 동쪽으로 40km만 나가면 영덕이 나와요. 7번 국도 드라이빙 환상적이죠. 아차 주왕산을 빼놓을 뻔 했네요. 남쪽으로 진보면을 지나 청송읍 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영주 부석사도 가보세요. 먹는 거라면.. 안동초등학교 뒷 골목의 중앙 구 시장 찜닭 골목으로 가보세요. ‘유진’ 찜닭이 맛있어요. 차세울 데 없다고요? 안동 문화예술의전당에 무료로 주차할 수 있어요. 그래.. 봉정사! 서안동IC 지나서 있는 절인데 목련 꽃필 때 가야 해요. 어디까지 했더라. 문화예술의 전당 야그했나요? 매주 화요일마다 흥미로운 프로그램의 음악회가 열립니다. 수비면에서 울진 온정면으로 넘어갈 때 구주령이란 고개가 있어요. 날 좋을 때 차몰고 가세요. 산 들 위에 바다가 떠있는 걸 볼 수 있을 거에요. 좀만 더가면 백암온천 나오고 더가면 해안입니다. 영양의 일월산도 좋아요. 일월자생화공원은 지금이 한창일 때죠.

영양 사람이세요? 아뇨, 경기도에서 왔어요. 그럼 누구랑 그렇게 다니셨어요? 혼자.. 언제 그렇게 돌아다니셨어요? 시간날 때마다..

그는 영양군에 대한 컨텐츠가 넘치는 남자였다. 그리고 영양군에 정 들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