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히토 야마시타, 잡설

2012년 3월 27일

첫 곡을 연주할 때 그는 지쳐 보였다.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를 연주하는 동안 템포가 늘어지고 어지러운 듯 몸이 한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다음 곡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돈키호테”다. 40분 넘어가는, 만만치 않은 체력을 요구하는 곡인데 끝마칠 수 있을까? 걱정이네. 70대 후반이라는데 연주하다가 쓰러지지 않을까?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다시 걸어나와 의자에 앉아 눈을 질끈 감고 오케스트라와 대결을 시작한다. 선은 얇지만 끊어지지 않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첼로 수석.. 미국으로 망명했던 로스트로포비치의 위풍당당한 돈키호테가 겹친다. 지금 듣는 초라한 돈키호테와 너무 달라. 마지막 악장. “돈키호테의 죽음”. 아직도 눈을 감은 채로 애절하게 선율을 뽑아낸다. 자신을 돈키호테로 생각하는 게 아닐 정도로 절절했다. 음은 스러져가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디선가 박수가.. 천천히 갈채 소리가 커지고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드디어 눈을 뜬 그는 여러 번 인사를 하고 무대를 떠난다. 아. 난 방금 저 사람의 고백을 들었구나.

가즈히토 야마시타의 기타 연주를 듣다 10년 전인.. 고2때 서울시향의 연주회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불새”에서의 섬뜩한 속주, “전람회의 그림”에선 오케스트라에 비견될만한 웅대함으로 각인된 가즈히토 야마시타였지만 통영국제음악제에선 달랐다. 애틋한 류트의 단선율에 최소한의 반주만 덧붙인 “콤포스텔라의 노래” 부터 파블로 카잘스가 빙의된 듯한 격렬한 바흐 무반주첼로 모음곡까지.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나 봐. 기타를 품에 안고 자신의 야그를 천천히 들려주고 있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마틴 그루빙거의 곡예에 가까운 마림바 연주에 매혹되었지만 카즈히토 야마시타는 화려한 것이 음악의 모든 게 아니라고 기타로 가르쳐줬다.

언어가 아닌 음으로 누군가의 고백을 듣는 것. TIMF에서의 마지막 연주회에서 마주치다니. 10년 전 기억과 겹치면서 오래도록 그 음향과 분위기를 되새김질할 것같다.

밀란 쿤데라의 향수에 대한 정의.

2012년 3월 22일

그리스어로 귀환은 <노스토스 nostos>이다. 그리어스로 <알고스 algos>는 괴로움을 뜻한다. 노스토스와 알고스의 합성어인 <노스탈지> 즉 향수란 돌아가고자 하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 .. 체코인들도 그리스어에서 취한 ‘<노스탈지 nostalgie>란 단어 이외에 <스테스크 stesk>라는 그들만의 명사와 동사를 갖고 있다. 체코어로 표현된 가장 감동적인 사랑의 문장은 ‘나는 너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인데, 이는 ‘나는 너의 부재로 인한 고통을 견딜 수 없다’는 뜻이다. .. 어원상으로 볼 때 향수는 무지의 상태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나타난다. 너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네가 어찌되었는가를 알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 고통, 내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는 고통 말이다.

– “향수”, 밀란 쿤데라

 

뭔가를 하려고 했던 사람.

2012년 3월 21일

“난 꼬스짜한테 소설의 소재를 주고 싶어요. 제목은 「뭔가를 하려고 했던 사람」. 젊었을 때 난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했고. 멋지게 말하고 싶었지만 혐오스럽게 말하고.. 모든 게 다 이 모양이군요. 이걸 다 요약해 보면 땀까지 흐른다니까요. 결혼하고 싶었는데 못했고, 늘 도시에 살고 싶었는데 이렇게 인생을 시골에서 끝마치게 되고, 그게 다죠.” “예순 둘이나 드셔서 인생이 불만족스럽다고 하는 건 그리 관대하신 게 아닙니다.” “정말 꽉 막힌 사람이군. 난 살고 싶단 말이오!” “..자신의 죄를 두려워하고, 영생을 믿는 신자들만이 의식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우선, 믿음이 있는 분도 아닌데다, 둘째, 당신한테 무슨 죄가 있겠어요? 단지 법무부에서 25년간 근무한 게 단데요.” “(웃으며) 28년이오…”

-“갈매기” 4막 중 소린과 도른의 대화, 안톤 체호프.

아는 이의 한탄을 듣다 문득 떠오른 희곡의 구절. 글쎄다. 누가 「뭔가를 하려고 했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불명확한 선택지들에서 하나 골라잡고 갈 뿐인데. 그래도 계속 접어버린 선택지를 돌아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 쪽을 더 팠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미련들. 앞만 보고 살아라, 현재만 생각하라! 이렇게 쉽고 무책임하게 던질 수도 있겠다만. 체호프 말마따나 삶이라는 게 종이 위에서 철학자가 되긴 쉬워도 실제로는 너무나 어려운 일인 듯 싶다.

알콜성 간손상 그리고 영양군

제천에서 진료를 보니 도시랑 주량 자체가 다르더라구요. 전 적게 마셔요. 이러면서 한, 두 병은 기본… 지난 금요일 간계 강의 녹음을 듣다가 풉. 읍내를 벗어나 방문진료를 나가면 어르신들이 침 맞자마자 바로 술판을 벌인다. 둘, 셋, 넷, 아이쿠 반갑네. 다섯. 정도만 모여도 흥이 넘쳐난다. 처음엔 김치를 안주 삼아, 그사이 누군가 나물이며 고기를 가져온다. 음주. 그리고 가무. 마을회관에 완비된 가라오케 시스템이 가동된다. 이제 22명에게 침을 뿌리고 일어서는데. 선생도 마시게나. 아. 소주는 잘 못 마십니다. 맥주도 있다네. 설탕이 없어도 달디단 찐 햇감자에 맥주라. 마주치는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점점 노래의 비트가 강렬해진다. 살며시 키스해주며. 한 잔 하고픈 유혹을 간신히 물리치고 나니 피곤함과 함께 갈증이 찾아온다. 냉장고를 연다. 액체로 가득하지만. 마실 순 없는 그것들. 뭘 찾나? 목이 말라서요. 아이고, 수돗물 그냥 마시게. 잔치를 뒤로 하고 보건소로 돌아간다… 자 다음의 경우엔 식품에 가깝지만 간 손상을 유발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위 4개의 품목을 봐주세요… 오랜만에 강의 들어서 그런가. 알코올 한 단어로 딴 생각이라니.

사진은 영양군 마을회관의 흔한 냉장고 풍경..

지도와 영토

2012년 3월 19일

별일 없는 한 일요일 새벽 1시 쯤엔 중앙고속도로 단양IC를 지난다. 이제 익숙해졌지만 새벽 운전은 언제나 음울하다. 낼 제대로 일어날 수 있을까. 벌써 금요일 저녁 몇 시쯤 집에 도착할지 생각한다. 커피가 땡긴다. 출발하기 전에 레드불 한 캔 깠건만 진한 에스프레소에 비할 바 아니지. 아뿔싸. 눈이 내린다. 아니 비인가? 진눈깨비라 치자. 속도를 늦춘다. 앞도 뒤도 아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도로상에서 오르막길을 시속 80km로 달린다. 무심한 네비게이션은 계속 떠들어댄다. 조금 있으면 단양IC가 나옵니다. 주변의 관광지. 단양 적성비. 신라 시대의 에피소드부터 시작한다. 재밌네. 적석산성에 있다는군. 가보고 싶다. 흘끗 네비게이션 화면을 쳐다봤다. 큭. 진눈깨비가 차창을 두드리는 암흑의 세계에서 알록달록한 지도를 보다니.

제드는 그 패널 위에 게브빌러 산맥 근처를 촬영한 인공위성사진과 같은 지역의 미슐랭 지도 확대 사진을 나란히 붙여놓았다. 그 대조가 가히 충격이었다. 인공위성사진이 희미한 파란 얼룩이 흩뿌려진 어느 정도 균일한 초록색의 죽 한 사발에 불과해 보였다면, 지도는 지역구분선, 생동감 있는 길들, 지도의 시점, 숲, 호수, 언덕들의 그물망을 화려하게 펼쳐 보이고 있었다. 두 확대 사진 위에는 검은색 대문자로 전시회 제목이 쓰여 있었다. 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롭다. – “지도와 영토”, 미셸 우엘벡

중앙고속도로에서 소설 구절이 이해될 줄이야. 그러게. 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로웠다.

가야 한다.

2012년 3월 18일

3시 반까지 용산역에 가야 한다. 한남대교 근처에서 내려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이태원으로. 용산역까지 걷자구. 시간이 많이 남았네. 맥주 한 잔만 하자. 펍에 들어가 구석에 앉아 런던프라이드를 마신다. 어라. 돌가루가 둥둥 떠다닌다. 후후 불어 천천히 마시라는 건가. 맥주잔에 비친 내 얼굴을 보니 허연 돌조각들이 붙어있다. 화장실에 가서 급히 얼굴을 씻어내고 썬크림을 바른다. 내 피부는 소중하니까. 맥주 한 모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펍에 들어오기 전에 비명소리가 들렸었지. 내 앞에 뭔가 둔탁하게 떨어졌었고. 위를 쳐다보니 아저씨가 당황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뒤를 돌아 보니 사람들이 굳어 있었어. 맥주 두 모금. 걷고 있었다. 내 앞에 커플 두 쌍이 학익진을 펼쳤다. 럭비의 스크럼을 뚫는 기세로 달려간다. 바로 앞에 대리석 장식이 떨어진다. 세 모금째. 왜 그렇게 달렸죠? 글쎄요. 만날 사람이 있었나요? 아뇨. 그러면? 아마 목이 말라서겠죠. 큭. 네 모금.. 다 마셨네. 아직도 목이 마르다. 한 잔 더 할까. 아니야. 3시 반까지 용산역에 가야 한다.

수사학이냐 내용이냐.

2012년 3월 15일

19세기 사회 혁명은 과거로부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시詩를 꽃피워야 한다. 혁명은 과거에 대한 모든 미신에서 벗어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임무를 개시할 수 있다. 예전에 일어난 혁명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내용을 감추기 위해 역사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19세기의 혁명은 죽은 자들일랑 그들의 무덤으로 고이 보내주고 자신만의 고유한 목표를 실현해야 한다. 과거엔 수사학이 내용을 능가했다면, 이제는 내용이 수사학을 능가해야 한다.

–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칼 마르크스

 

3월 14일이 칼 마르크스의 서거일이라는 훈이의 제보에 낚여 책을 뒤적거리다가 발견한 구절. 여기서 마르크스는 종교적으로 역사를 감내할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역사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전에 읽은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 http://0.mk/00a1e )에 대한 대답 아닐까. 다만 인간이 기억과 망각을 자유자재로 하지 못한다는 게 너무나 큰 장애물. -_-;;

Intouchables, 2011

2012년 3월 14일

영화를 보다보면 이 영화가 지금의 현실을 폭로하는지 아니면 은폐하는지 따져 보게 된다. 아차, 적당히 드러내면서 심각함은 가리는 포장이라는 중간의 단계도 있지. 오늘 보게 된 “언터처블” 은 현실을 절묘하게 ‘포장’ 한 영화라 할 수 있겠다.

등장인물 “필립”은 심심하면 그림 사는데 몇만 유로를 쓰고 생일 파티에 실내악단을 부르며 집은 미술 작품으로 가득하고 남들이 잡일을 다 해주는 현대판 귀족이다. 반면 “드리스”의 상황은 비참하다. 감옥에서 출소한지 몇 주 되지 않은데다 남동생은 수상쩍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고 어머니는 새벽마다 빌딩 청소를 하러 나가시며 그 자신은 거리에서 빈둥댄다. 여기에 필립의 전신마비와 드리스의 당당함이라는 설정을 넣어보자. 필립은 남의 도움 없이는 침대에서 일어날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없다. 드리스는 면접에 지원하여 필립을 도와주게 되면서 그 둘 사이의 우정이 서서히 싹트게 된다.

딴지를 걸면.. 드리스는 무식하고 무례한 세네갈계 흑인이다. 세상에. 이렇게 노골적인 고정관념을 내세우다니. 하지만 그는 ‘비굴하진’ 않다. 필립에게 자신의 뜻을 감추지 않고 표현하며 필립과 함께 간 오페라 공연을 맘놓고 비웃어댄다. 얼마나 통쾌한가. 게다가 필립은 우유부단한 면이 있어 드리스에게 감정적으로 많이 의존한다. 한 쪽은 전용기로 여행을 다니고 다른 한 쪽은 제대로 샤워도 할 수 없을 만큼 좁은 집에 살지만 이 극단의 차이는 우정으로 아름답게 가려진다.

그럼 드리스는 이 빈곤을 벗어났을까? 영화만 놓고 보면 알 수 없다. 오히려 ‘주인님’ 의 차로 질주하며 속도를 즐기고 전용기를 타서 함께 여행을 가는 등 동화된 모습을 제시한다. 평생 수발을 거들면서 아름다운 우정을 뽐내는데도 한계가 있는지 딱 여기서 영화가 마무리된다. “실화” 임을 강조하면서 실제 인물들의 모습까지 보여준다. 하긴 있을법하지 않은, ‘기적’과 같은 일을 계속 포장하려다 보니 부담을 느꼈겠지.

“언터처블” 은 불편한 폭로와 달콤한 은폐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탄다. 현실을 약간 노출하지만 이들의 진짜 결말을 보여주지 않고 우정으로 따뜻하게 끝마치니.. 하하. 영화관을 나올 때는 훈훈하지만 걸으면서 곱씹으면 찜찜한 구석이 많고 인터넷에서 평점을 확인하면 생각보다 너무 높고 칭찬 일색이라 당황스런, 나에겐 꽤나 묘한 영화로 기억될 것같다.

아지즈 네신.

2012년 3월 7일

터키의 작가 아지즈 네신은 자신의 풍자관을 “풍자는 세계를 웃음거리가 되는 것으로부터 구제해줍니다.” 라는 한마디로 정리한 적이 있었다. 그의 글을 보면 조금씩 이해된다. 읽을 때는 웃음이 나오지만 그 안에 날카로운 사회비판이 담겨있어 뒷맛은 씁쓸하다. 사회 자체가 진짜 웃음거리가 되어버리는 비극이 생기기 전에 독자가 이 세상이 제대로 된 건지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힘, 그게 바로 아지즈 네신의 매력이다. 그는 날선 글들을 쓰다가 내란 선동이나 좌익 활동이란 죄목으로 약 250번의 재판을 받았고 5년 6개월 간의 수감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꺾이지 않았던,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

아지즈 네신은 유배기간 동안의 회고록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고, 사랑하고, 웃는 것. 삶의 진실이란 이것이 전부가 아닐까요? 인간에게 있어 이것 이외는 모두 거짓말입니다.” 이 말이 글에 그대로 녹아서 그런지, 20세기 중후반의 터키 풍자 문학임에도 지금까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공감을 주고 있다.

“개가 남긴 한마디”, “당나귀는 당나귀답게” 의 귀여운 표지에 방심하지 말자. 아지즈 네신의 삐딱한 시선이 작은 우화들에 녹아 들어서 쉴 새 없이 잔펀치를 날린다. 이제 “일단, 웃고나서 혁명” 을 펼치면 좀더 노골적이다. 인간의 권력에의 욕망, 정치인의 부패, 무책임한 공무원들, 외국인들에 대한 가식.. 이런 글을 쓰다 여러 번 유배를 당하고. 유배지 부르사에서의 일을 기록한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 아는 사람들은 피하고 가족들과 떨어져 외롭고 식사할 돈도 없는 암울한 상황이지만 여전히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다. ‘절망은 인간을 절대 무너지지 않는 가장 견고한 마지막 지점까지 인도해간다.’ “생사불명 야샤르”는 공무원의 실수로 출생신고가 누락된 ‘야샤르’의 기구한 삶을 다룬 장편소설이다. 권리를 요구할 땐 죽었다고 하고 세금을 내거나 군대 갈 땐 살아있다고 하는 국가에 실컷 골탕 먹는 야샤르. 웃음 뒤에 슬픔이 배어 나오는 묘한 작품으로 아지즈 네신의 작품 중 정수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그가 풍자 소설만 쓴 건 아니다. 자신의 불우했던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왜들 그렇게 눈치가 없으세요?”, 칼날을 거두고 사랑에 관하여 쓴, 시에 가까운 동화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 를 읽으면 아지즈 네신이 얼마나 다채로운 면모를 지닌 작가였는지를 알 수 있다.

지난 여름에 작품 이름이 특이해 한 권을 집어들었다가 이렇게 거의 모든 작품을 읽고 빠져든 작가.. 단지 책 나눔을 위한 소개 글을 쓰려 한 건데 어째 글이 길어졌다. 하하.

수집..

2012년 3월 6일

책을 정리하다가, 무작정 쌓아둔 줄 알았던 책들의 순서를 살펴 보니 그 자체로도 하나의 줄거리가 완성된다. 가족을 잃은 상실감을 다룬 소설들, 이집트 현대문학,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 다이어트, 아지즈 네신의 터키 풍자 문학, 조지 오웰의 르포, 시점의 변화를 시도한 소설들, 파시즘, 필립K딕의 SF소설, 카프카, 제인 오스틴, 안톤 체호프.. 책꽂이 위에서 하나의 세계가 정렬되어 있는 셈이다. 아니면 내가 세계를 이해하려는 방식일지도? 아지즈 네신의 작품을 하나 꺼내 읽는다. 책나눔을 위해 정리한 것 중 그저 한 권을 뽑은 건데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낄낄거리던 차에 발터 벤야민의 예리한 지적이 생각난다.

“수집가는 그 물건이 자신의 내면 깊숙이 황홀감을 일으킬 때 그것을 자기 세계 안에 포함시킨다. 그 안에서 그 물건은 최후의 전율, 그것을 획득했을 때 느낀 그 전율 상태 그대로 굳어 있으며, 그 물건은 영원히 황홀함으로 충만하다. 누군가 기억했던 것, 의식하는 모든 것이 수집품의 주춧돌이자 얼개요 징두리에 자물쇠가 된다. 시대, 풍경, 솜씨,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어준 주인들, 수집가의 눈, 이 모든 것에 한데 녹아 그 심장부에 수집품 하나하나의 운명을 담고 있는 마법의 백과사전이 된다.” – ‘나의 서재공개’, 발터 벤야민

책만 그런가. 이젠 소유은 자아의식과 세상의 의미를 구축하는 열쇠가 되버렸다. 아. 이넘의 집착.. 발터 벤야민이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물건들이 수집가 안에 사는 것이 아니다. 바로 수집가, 그 사람이 물건을 통해서, 그 물건들 안에 사는 것이다.”

겐나디 로체스트벤스키, 서울시향, 쇼스타코비치.

2012년 3월 4일

러시아 음악을 듣다 보면 알게 되는 이름들이 있다.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 겐나디 로체스트벤스키.. 소비에트 시절부터 활동하던 전설적인 지휘자들이다. 중2 때부터 클래식을 접하고 중3때 차이코프스키에 빠졌으니. 그 때부터 이들에 대한 애착이 시작되었으리라. 므라빈스키는 내가 음악을 알기 오래 전에 돌아가셨지만 남은 사람들은 꼭 실제 연주를 들어볼거야! 다짐을 했으나 여전히 들을 기회는 없었고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다. 맘이 급해졌다. 스베틀라노프, 루돌프 바르샤이..

연초에 공연 프로그램을 훑어봤다. 겐나디 로체스트벤스키란 이름이 있는거 아닌가! 하지만 수요일 공연이다. 음. 영양군에서 서울 예술의 전당까지. 공연 바로 전 주까지 고민하다 예매를 했다. 자리가 없어서 3층으로. 휴가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지. 이제 좀 있음 공연이 시작된다. 당신을 보러 왔습니다. 그가 걸어 나왔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8번. 실연으로 듣기 힘들고 유쾌한 곡도 아니다. 강박적인 리듬과 광포한 음향 사이에서 악기 하나하나가 자신의 야그를 하다 사라진다. 화려한 팡파레 없이 알 듯 말듯한 미소를 지으며 곡이 끝나버리지만. 난 지금 이 순간 로체스트벤스키의 지휘로 이 곡을 듣고 있다는 게 너무나 즐거웠다.

그의 비팅은 간략했다. 음반에서만 듣던 톡톡 튀는 리듬이 저 지휘에서 나온 거였구나. 공연 내내 온 정신을 집중하여 지켜봤다. 남김없이 머리에 각인하려는 듯이, 나중에 희미하게 기억될 걸 알면서도.. 연주가 끝났다. 이럴수가. 이렇게 빨리 끝나다니. 난 저 할배를 이대로 보내기 싫어. 계속 박수를 쳤건만 몇 번의 커튼콜 이후 오케스트라 전원이 퇴장했다.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를 보는 건 이번이 마지막 아닐까? 마지막.. 이렇게 주말까지 머릿속에서 연주회의 음향이 휘휘 돌고 있는 걸 방치하고 있었는데 벌써 일요일 밤이네. 하하. 영양군까지 내려가는 3시간 동안 겐나디 로체스트벤스키의 차이코프스키나 들으면서 운전해야겠어..

진실을 말하는 광대

2012년 3월 1일

진실은 비참하고 재미없는 것이라 여기저기서 나오는 소식들에 질려 귀를 막아버린다.. 다시 귀를 열면 피곤해진다. 듣는 것도 그런데 사실을 계속 폭로하고 말하려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까? 그럼에도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독설을 날리는 사람이 있다. 베페 그릴로.. 그는 잘 나가던 이탈리아 TV쇼의 코미디언이었지만 총리를 조롱한 게 화근이 되어 방송에서 퇴출되었다. 그 일로 새로운 힘을 얻었는지 판을 더 크게 만들었다.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제보받은 정보를 통해 부정부패와 싸움 한 판 뜨기 시작한다.

..오늘날 최고의 정치가는 정당에서 최고의 당원이라는 뜻으로 변질되었다. 녹색 성장이라는 말 아래 원전 확대를 은근슬쩍 끼워 넣는다. 국민의 의사 수렴 없이 대규모 개발 공사를 펼친다. 정부에 불리한 기사들은 금방 삭제되고 국민들은 외국 언론에서 자기 나라 소식을 듣는다. 고용 유연화를 위해 비정규직 자리를 양산한다..

베페 그릴로가 “진실을 말하는 광대” 에서 털어놓는 이탈리아 야그임에도 뭔가 익숙하다. 책을 읽으면서 한국의 상황이랑 겹쳐지기도 하고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고 방송계에서 퇴출된 이들도 생각났다. 뭐, 베페 그릴로가 새로운 야그를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책 내용보단 일을 밀고 나가는 방식에 더 감명을 받았다. 블로그상에서 공론화 시키고 익명의 방문자들과 함께 논의하며 일년에 100회 이상 거리 공연을 펼친다. 이탈리아 언론은 침묵하고 관련 기사는 검열되지만 그 ‘검열’ 이 베페 그릴로에게 열정을 불어 넣는다.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실타래처럼 엉켜진 현실에 맞서 웃음과 풍자로 전투를 치뤄내는 그에게 찬사를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