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1623, 할배.

2011년 9월 26일

객차를 지나가다 익숙한 얼굴을 본다. 그는 졸고 있다. 다행이야. 이러면서 지나친다. 그를 처음 만난 건 한 달 전, 이 무궁화호 1623열차 안에서였다. 부채를 흔들면서 맥주를 까는 나를 유심히 쳐다본다. 자넨 어디 가는가? 안동갑니다. 그 쪽 말투가 아닌데? 지방 보건소에서 근무해요. 의사? 한의사에요. 그 이후 계속 그의 야그가 시작된다. 괜찮다. 그는 야그하고 싶었고. 난 듣고 싶었으니까. 자신은 83세라고. 기차타고 울산가지. 어라? KTX타고 가시면 되잖아요. 할 일도 없는데 빨리 가서 뭐해. 주위에 사람도 없고. 이런저런 야그가 나오고. 자꾸 ‘우리’라는 범주에 날 끼어넣으면서 동의를 구한다. 잠자코 있는다. 묻지도 않았다. 근데. 자넨 여자친구 있나? 없습니다. 이런. 몇 살이라고 했지? 27이요. 빨리 결혼해. 아. 네. 난 여자친구가 있지. 아. 네. 전화 한번 해볼까? (세상에. 당신은 저에게 염장지른 사람 중에 가장 나이 많은 사람입니다.) … 대뜸 폰을 꺼내 전화한다. 음량을 줄이지 않아 신호음이 나에게까지 들려온다. 나다. 누구?.. 하이고. 이렇게 아무때나 전화하지 마이소. 끊는다~ 대화는 몇 초만에 일방적으로 끊겼다. 의도적이진 않았지만 그 걸 다 듣고 있던 나는 갑자기 무안해져 딴청을 피우고 있었고.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그러기를 몇 분. 그는 졸기 시작한다. 다행이야. 이러면서 책을 꺼내든다.

이상하게도. 계속 그림 하나가 생각난다. Harry Kent의 ‘Egon Schiele V’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회한에 잠긴 얼굴.. 그 할배를 또 보니. 눈에 그림이 아른거리네.

공감!?!!?

2011년 9월 16일

욕망의 근원적 질문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내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그들이 내 안에서 보는 것은 무엇이지? 나는 그들에게 무엇이지?” 다. –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기>, 슬라보예 지젝

거울에서 자신을 볼 때. 항상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어떻게 보일 것인가. 언제나 자신이 아는 것만큼 본다.  하지만 그건 타인의 시선에 기댄 것이다. 그만큼 위태롭다. 자꾸 공감을 얻으려 한다.

이야기를 지배하는 것은 목소리가 아닙니다. 귀입니다. – <보이지 않는 도시들>, 이탈로 칼비노.

페북이나 트위터.. SNS가 보급되다 보니 떠들 수 있는 매체는 많다. 허나 모든 게 휘발되어 버린다.  실제 대화에서든, 페북이든, 트위터이든.. 툭 던진 한 마디가 의미있으려면 공감, 좋아요, Retweet이 필요한 거다.

아아.. 누구든. 직접 여러 시간을 붙잡고 야그하는 것 만큼 소중한 건 없다.

제비.

2011년 9월 14일

보건소에서 내가 머무르는 사무실 문 바깥쪽 위엔 제비집이 있다. 5월 초 쯤부터 새끼들 우는 소리로 좀 시끄럽기도 하고 어미 제비가 갑작스레 사무실로 들이닥쳐 헤매기도 하고. 잊을 만하면 문앞에 똥으로 테러하여 드나들 때 마다 조심조심하였다. 몇 주, 달이 지나 울음 소리가 점점 잦아진다. 그러다 지지난 주 쯤에 제비 5마리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 중 3마리는 날갯짓도 서투르며 자꾸 머리로 벽치기를 한다. 다 큰 건가. 추석이 지난 지금 둥지가 조용하다.

계절이 바뀌었다.

코미디 그리고 주성치.

2011년 9월 9일

운동하고 나서 맥주와 함께 ‘식신’을 본다. 이미 여러 번 본터라 대사만 들어도 무슨 장면인지 알 정도.

루저의 스토리에 주성치식 개그와 감성이 혼합되면 헤어나올 수 없는 유치함의 카타르시스가 완성된다.

오랜만에 그 ‘카타르시스’에 젖어 앉아 있다 보니 문득 주성치의 영화에 빠져들었던 옛날이 생각난다.

어찌하여.. 내 중독의 경향이 주성치와 무슨 인연으로.

대학에서 1년 꿇고 나서 휴학기간을 포함하여 ‘두번째’ 다니는 학년은 나에게 재앙이었다.

내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은 괜찮았지만 내 가슴 속은 무척이나 곯아져 있었지.

암울하게. 얼굴을 찌푸리고. 나 힘들어 하고 표현을 하는 거 나한테 참 어려운 일이다.

무표정, 단조로운 톤의 목소리. 게다가 내 특유의 폐쇄성.

그렇다고 우울한 영화, 음악을 듣고 보는 건 ‘밝음’을 지향하는 성격땜에 맞지 않는 일이고.

밝은 영화. 그러니까 웃긴 영화들을 보면 좀 나아질 줄 알고 선택한게 주성치의 영화들이었다.

슬랩스틱과 유치함으로 범벅된 그저 그런 영화들.. 이 결코 아니었다.

루저가 고생하여 말도 안되는 비약과 과장된 여정을 거쳐 성공하는 듯 싶으나 이도저도 아니게 된 상태..

웃음이라는 살로 살짝 가려진 상처들..

그 당시의 상황과 맞물려 뭔가 뒤틀린 개그는 날 열광시켰고. 주성치의 전 작품을 보게 되었다.

007, 레옹(원제:회혼야), 서유기 시리즈, 희극지왕, 파괴지왕, 식신, 구품지마관, 녹정기, 소림축구…

분명. 보편적인 정서는 아니다.

친구를 만나 영화 야그가 나오면 주성치 카드를 슬쩍 내밀었다가 다시 집어넣은 적도 많으니까.

 

아. 주성치영화로 같이 웃을 수 있는 누군가와 길게. 아주 길게 야그 하고 싶은 밤이다.

언어의 폭력

2011년 9월 3일

‘카르멘’ 을 보고. ‘보이체크’ 를 보고. 방금 ‘므첸스크의 멕베스 부인’ 을 보고나서.

‘죽도록 사랑한다.’ 라는 말의 무자비함을 느낀다.

좋든 싫든 간에 ‘죽음’ 의 대상에는 상대방도 포함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