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에 볼 공연들

2016년 10월 7일

10월달 볼 공연들.
원래 달마다 두세 편씩 공연을 챙겨 보는데 이번 달엔 여러 페스티벌이 겹쳐서 몰아 보게 되었다. 부산국제영화제랑 광주비엔날레를 포기하고 남은 돈으로 공연이나 보자.

썬샤인의 전사들 –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김은성 작가의 신작.

산허구리 – 백성희장민호극장
국립극단의 고전극 공연으로 고선웅 연출이라 일단 예매했다.

타이거 릴리스 & 리퍼블리크 씨어터〈햄릿〉 – LG아트센터
오래 전부터 타이거 릴리스의 음악이 궁금했는데 마침 음악극으로 내한해서 예매.

더 파워 – 명동예술극장
국립극단의 공연으로 작년엔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올해 보면 좀더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 재관람을 시도해본다. 거기다 정승길 씨가 나오니 봐야지.

SPAF 복화술사의 학교 –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SPAF 여보세요 –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판소리만들기 자의 신작.

SPAF “Speak Low if You Speak Love” –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MOT – 군포시문화예술회관 철쭉홀
일단 예매는 해뒀지만 공연보고나서 어딜 가지 못하는 군포시라, 고민 중. 역시 이태원이나 홍대 그리고 대학로에서 공연을 봐야해.

비포 & 애프터 –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크리에이티브 바키의 재공연.

2016.06.30 MoMA

2016년 7월 4일

2016.06.30 MoMA

MoMA의 전시들이 생각보다 보수적이라 놀랐다. 회화만이 미술인가? Modern Art를 모아놓은 Museum이라는데 정작 Modern함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의 작품에선 거의 미국 화가들의 작품이라 오만함마저 느껴졌다. 뭐, 미국이 세계 미술 시장을 선도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 허나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도 날리는 작가들을 주목하지 않는 편협함이 아쉬웠네.

폭스파인더

2015년 11월 19일


간만에 자극을 주는 연극 하나를 봤다. “폭스 파인더”. 알 수 없는 외부의 위협에 맞서 내부를 단결시키는 내용은 따지고 보면 흔한 편이다. 조지 오웰의 “1984”도 그렇고 멀리 가지 않더라도 샤말란 감독의 “빌리지”가 떠올랐다.

연극 “폭스파인더”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여우라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나라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요원들이 여우를 찾기 위해 의심되는 농가로 파견된다. 나이 어린 윌리엄 요원은 시골의 한 농가에서 여우의 존재를 찾으려 하고 사무엘, 주디스 부부는 혹시라도 자신들의 농지가 회수당할까 노심초사한다.

여우에 관한 이야기는 극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다. 사람들은 여우를 본 적은 없으나 두려워 하고, 윌리엄 요원은 의심스러우면 무고한 이를 즉각 여우에 대한 협력자로 몰아 붙인다. 실상, 여우가 없다고 입증하는 게 더 쉽겠지만 그 행위 자체는 금지되어 있다. 여우라는 거대한 적 앞에 대항할 시점에 어느 누가 의문을 던지겠는가?

연극을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맹신자들”이 생각났다. 에릭 호퍼가 맹신과 광기에 대해 남긴 여러 개의 아포리즘을 묶은 책으로 아직까지도 예리한 통찰이 느껴진다. 몇 구절을 인용해보겠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2015년 11월 5일


두 가지의 이야기가 있다. 아마 한 이야기만 보여 줬으면 그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듯 다른 두 이야기를 병치시킬 때 사람들은 그 두 개의 야그에서 다른 점을 찾아내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낸다. 이 이야기에서 이랬던 게 저기에선 달리 해서 이렇게 전개가 달라졌겠지, 이러면서 말이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홍상수 감독의 전작에 나온 대사를 떠올렸다.

컵 하나 실수로 깨는 것도 수많은 우연의 연속으로 이뤄지는데, 사람들은 그 우연들 중에서 몇 개만을 집어내어 생각의 라인을 만들어내지.. -영화 “북촌방향” 중에서

어떠한 ‘티핑 포인트’ 덕분에 이야기의 전개와 결말이 상이해졌을 거라 판단함은 꽤나 재미있는 일이다. 허나 여기에서 사고의 허점이 종종 발견된다. 감독이 보여준 두 개의 이야기는 같은 장소와 같은 등장 인물이 나오나 다른 이야기이다. 인물의 성격도 일관되지 못하고 심지어 두 번째 이야기는 여러 장면이 생략된다. 우린 모두 설명의 공백을 질색하기에 앞선 이야기를 바탕삼아 두 번째 이야기를 구성해낼테고, 간간히 충돌되는 장면에선 유쾌한 이질감이 느껴지기에 웃고 넘어간다.

여기서 픽션의 함정이 있다. 감독의 시점에서 판결을 내리고 바라보는 것에 불과하나 보고 듣는 이는 신이 나서 판결에 동참한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이런 순간을 비틀면서 관객의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전작 “북촌방향”에서 느껴졌던 저예산 평행우주 SF영화까진 아니더라도 반복되는 일상의 편린을 통해 무심코 행하고 뱉었던 언행을 다시금 환기시킨다는 면에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여전히 불편하면서도 재미있다.

Democracy…

2015년 9월 21일


Democracy De’mock’racy Democ..

#danperjovschi #댄퍼잡스키 #토탈미술관

투시, 르네 마그리뜨.

2015년 9월 11일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읽다 보면 흥미로운 시각을 접할 수 있다. 유화라는 건 단지 고정된 물체를 그린 게 아니라 자신의 소유물을 다시금 확인하고 안전하게 박제해놓은 일종의 인증샷이란다. 결국 유럽의 유화 문화란 세상을 향해 난 창이라기보단 벽 안에 소중하게 박아놓은 금고에 가깝다는 게, 존 버거의 견해이다.

그의 책을 언급하는 이유는, 르네 마그리뜨의 그림을 보고 퍼뜩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림에선 어떤 남자가 달걀을 보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마 마그리뜨겠지? 그런데 해괴하게도 캔버스 안에는 새가 그려져 있다. 그림의 이름 ” Clairvoyance(투시)”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마그리뜨는 보이는 대상들이 가려 버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그려 왔다. 알 하나에서도 어떤 가능성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린 게 아닐까? 가시적인 사물에 멈추지 않고 언제나 그 너머의 가능성을 바라 보는 것. 앞서 말한 존 버거의 해석 그리고 여태까지의 유화 전통을 유쾌하게 엎어 버리는 그림 아닐까 싶다.

Clairvoyance(투시), Rene Magritte.

자유의 문턱에서 _ 르네 마그리뜨

2015년 9월 1일


비행기 뜨기 전에 오늘 본 것 중 인상적인 그림을 더 하나 꼽아 본다. 르네 마그리뜨. “Au seuil de la liberte”

한국식 번역으론 “자유의 문턱에서”?

벽으로 둘러친 방 안에 대포가 있다. 좀 있음 발포할 듯하다. 대체 뭘 위해? 유혹적인 내용으로 가득찬 닫힌 방 안에서 편하게 지내면 안 되나? 르네 마그리뜨는 그림으로 단호하게 대답한다. 안 된다고. 어서 포를 쏴서 부숴버리고 참세상을 보자고.

볼 때마다 참으로 감동적인 작품이다.

르네 마그리뜨전 – 교토시미술관

피터의 상상초월 작업실

2015년 8월 29일

EIDF2015 피터의 상상초월 작업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드는 의문중 하나는, 카메라를 통해 보여지는 장면들이 과연 진실인가? 감독이 보고 있는 시각에 촬영된 사람의 견해도 반영되어 있는지, 혹은 감독의 개입으로 인해 등장 인물의 삶이 달라진 것이 뭔래 그러한 것 마냥 포장되었는 지 등등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된다. 눈 앞에서 펼쳐지는 영상은 근거 없는 신뢰감을 심어줄 수 있으며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많은 다큐멘터리들은 극적인 서사를 위해 포장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사람은 끝내 재능을 펼쳐 유명하게 되었다,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 이렇게 말이다. 희열 넘치는 결말을 보여 줄 수 있으니 참 근사한 방법이긴 하다만 질문을 던지게 된다. 과연 이건 진짜인가? 아쉽게도 진실은 지루하고 비참할 텐데 아름답고 훈훈한 결말은 현실에서 얼마나 많이 찾아볼 수 있을까?

서두가 길었다. EBS국제 다큐영화제에서 “피터의 상상초월 작업실”을 보며 든 생각들이라. 물론 이 다큐는 포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몰입해서 본 것 같다. 아무리 봐도 저장강박에 시달리는 아웃사이더 예술사 피터. 감독은 분명 무명의 화가가 전시회를 열어서 유명해지거나 아님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는 영상을 찍고 싶었을 거다. 웬걸, 다큐의 중간부터 휴먼드라마의 도식이 깨진다.

피터에겐 어두운 과거가 있었고, 아니 역겨운 과거가 있었다. 감독조차 촬영을 포기할까 고민할 정도로. 그리고 전시회조차 그닥 성공적이지 않다. 피터는 여전히 궁핍한 생활에 시달리고 혼자 힘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다. 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이 시점에서 “피터의 상상초월 작업실”는 여타 휴먼드라마와 다른 궤도를 탄다. 포장과 미화 없이 현실과 과거를 대면한다.

꼭꼭 숨겨두고픈 기억을 꺼내는 과정 자체가 고통스럽고 심지어 폭력적이겠지만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피터는 그 관문을 회피하여 삶은 엉망이 되었다. 본인이 당당해질 때까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과거가 들춰진다. 결과는? 글쎄다, 비극인지 희극인지 잘 모르겠다. 가장 중요한 건 원제 “Almost There”이 암시하는 것처럼 거의 다 끝난 삶이라도 해방구가 있으며 삶은 어떻게라도 이어진다는 게 아닐까?

언제나 EIDF를 보며 뭔가 건지겠지 하며 기대를 하곤 하는데 이 작품이 눈에 띄더라. Almost There. 그렇다. 거의 막장까지 간 것 같아도 아직 끝은 아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Time is Time is…

2014년 11월 19일

옛 서울역에서 본 무용 공연.

타조소년들

2014년 11월 18일

“로스는 로스로 가야지” 농담처럼 연극이 시작된다. 사고로 죽은 친구 로스를 같은 이름의 도시로 한 번 데려가야 하지 않겠냐며 세 명의 친구가 유골함을 가지고 여행을 시작한다.

어리다. 나이에 대한 지칭 혹은 미성숙한 상태를 은연중에 낮춰 부르는 단어, 단순하게 한 가지만 생각하며 무작정 행동으로 옮겨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면책권, 자신이 뭔가를 모르고 있음을 모르는 상태, 나중에 나이가 들어 ‘순수했었지’라고 회상할 수 있는 시절, 하지만 그 순수함이라는 게 거칠고 폭력적인 혼란에 불과했음을 간단하게 은폐하는 형용사.

세 명의 친구들은 어렸다. 하지만 친구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하나씩 알아 가며 자신들이 타조소년들이었음을 깨닫는다. 덤불 속에 머리를 박고 있으면 모든 게 멀어지고 안전한 줄 아는 그 타조 말이다.

결국 ‘어리다’를 뒤흔드는 건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게 되는 것’ 아닐까? 그 앎에 맞닥뜨리고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 다음과 같은 말을 쓸 수 있을 듯 하다. 나이가 들다, 노회하다, 늙다, 성숙하다, 그리고 여전히 어리다.

극은 왁자지껄하고 분주하게 막을 내리지만 뭔가 텁텁한 게 남더라. 극장을 나오면서 자문한다.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게 될 때, 난 여전히 어린가?

<타조 소년들>, 국립극단
소극장 판 (2014.11.15~11.30)
칼 밀러 극본, 토니 그래함 연출

우리는 영원한 챔피언

2014년 11월 12일

밀란 쿤데라의 말마따나 오래된 친구는 과거 우리의 거울이자 기억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만나 근황을 털어놓다 이내 옛날 일을 회상하며 웃고 떠들고. 결국 옛친구를 만나는 건 예전 나를 비추던 거울을 이따금 윤을 내고 관리하는 거 아닐까?(1)

며칠 전 연극 “우리는 영원한 챔피언”을 보고 든 생각들이라. 극에선 중년의 옛 고등학교 농구부 친구들이 모여 찬란했던 과거를 회상한다. 우승컵 앞에서 그들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이야기를 되풀이한다. 서로를 이용하기 위해 정치적인 음모가 난무하는 가운데 그들을 묶어주는 건 우승컵이라는 과거의 유산이었다.

우승컵이 상징하는 것은 과거 뿐만이 아니라 극의 인물들이 여태 살아오면서 가져왔던 가치관이다. 이기고 얻으면 모든 게 좋다는, 승리 제일주의의 기념품. 노인이 된 농구 코치는 그들이 분열될 때마다 우승컵을 가리키며 우리는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며 연설을 늘어놓는다. 사람들은 마법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을 괴롭히는 것은 높디 높은 목표를 추앙하는 가치관과 현실과의 간극이다. 자신들에게 맞지 않는 외피를 품고 살아 오다 아직 살 날도 많이 남은 40대에서야, 지금까지의 삶이 허구였으며 무너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다시 시작할 계기도 의지도 없다.(2)

왜 그럴까? 극은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등장인물들의 어린 시절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모두 아버지의 부재를 암시한다. 부모와 적절한 관계를 맺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은 농구 코치를 ‘대리’ 아버지로 삼는다.(3) 코치는 ‘대리’ 아버지로서 그들에게 외형에만 집착하는 성공제일주의를 주입하고 조정한다. 그럼 코치는 본받을 만한 인물인가? 아니다. 그 또한 대공황에 쓰러져 버린 아버지 대신 루즈벨트 전 대통령을 영웅시하고 반 유대주의 매카시즘 등 여러 편견에 찌든 사람이었다. 자신의 편견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투영하고 제자들은 그 가치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셈이다.(4)

어떤 가치관이 체화된 이후 처절한 자기 반성 혹은 방황의 시기를 겪지 않고 묻어 두다가 큰 위기가 닥쳤을 때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할까? 극의 내용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을 향해 달려 가는 것이 우선이고 거기서 낙오된 이들은 바로 죽음까지 내몰린다. 성공한 이들도 편한가? 아니다, 낙오되지 않도록 계속 노력해야 하고 채찍질을 해야 한다.(5) ‘프로’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모두가 피곤하고 지치며 삶의 의미는 사라진다.

연극 “우리는 영원한 챔피언”은 그저 무너져가는 자아를 대충 봉합하고 지나치는 사람들을 예리하게 그려낼 뿐이다. 작가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주입되어 왔던 세상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자신을 감싸고 있던 알을 깨고 나와 정체성을 형성하라.

(1) <정체성>, 밀란 쿤데라
(2)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저)에서 자기밀도, 역할밀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살아오는 동안 성찰이 부족한 상태에서(자기밀도 저하)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하다(역할밀도) 위기가 오면 그만큼 극복하기 힘들다.
(3)(4)<남자의 탄생>, <애완의 시대>에서 일부 내용 인용
(5)<거대한 사기극> (이원석 저)에 의하면 이런 자기 계발의 풍조는 윤리적 패러다임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녀

2014년 11월 3일

바다에 가 보면 어떨까, 싶을 때가 있다. 자유와 일탈을 꿈꾸며 기분 전환이랄까 작은 도피처라도 되는 마냥, 바다를 보며 바람을 맞으며 외친다. 시원하다.

바다가 터전인 사람들이 바다를 파도를 볼 때 어케 생각할까. 지겨울까, 아님 세월호처럼 인명을 꿀떡 삼키는 바다를 보면서 절망할까. 문득. 서늘하다.

“해녀”에는 바다, 그 곳에서 살고 있는 해녀들의 소리가 담겨있다. 귀를 먹먹히 때리는 바람소리, 비애를 퉁치며 넘어가는 민요 ‘이어도사나’. 그리고 해녀들이 바다에 깊숙히 들어갔다 가쁘게 내쉬는 ‘숨비소리’. 이 모든 게 어우러져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물흐물해진다. 화면이지만, 바다를 보다 익숙치 않은 느낌이 든다. 오싹하다.

미카일 카리키스의 <해녀>를 보고.

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4
<귀신, 간첩, 할머니> (2014.9.2~11.23)
서울시립미술관

그, 것

2014년 10월 28일

물건을 버리지 않고 모아두기. 그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쓸모없는 거라도 버리기가 힘들다. 아마 그것들을 습득했던 순간의 황홀함이라던가 특별했던 기억이 아로새겨져 있는 것 같으니까.

연극 “그,것”에서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이 나온다. 조용한 전당포에 물건들을 찾으러 오지만 결코 뭔가에 쓰려고 그러는 건 아니다. 희미해지는 추억의 실마리라도 붙잡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다.

극은 그들에게 간명하게 알려준다. “산다는 것은 사라진다.” 살아진다, 사라진다. 어떤 사물이 불멸의 징표가 될 수 없음을, 찰나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으면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물론 여전히 어렵긴 하다. 벤야민의 표현을 빌려 보면, 물건들이 수집가 안에 사는 것이 아니고 바로 수집가, 그 사람이 물건들을 통해서, 그 물건들 안에 사는 것이니까.

<그, 것 _ 물질과 사람 마주보다>
프로젝트박스 시야 (2014.10.17~11.02)

로풍찬 유랑극장

2014년 10월 23일

누가 나에게 왜 연극을 보러 다니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거다. “신기해서” 원 엉뚱한 답일지도 모르겠다만 진짜 그렇다. 몇 안 되는 소품, 조명, 배우만으로 보는 이를 몰입하게 만드는 게 너무 신기하지 않은가? 영화처럼 편집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지나치면 돌이킬 수 없는 휘발성 그리고 즉흥성도 매력적이지.

웬 연극 예찬이냐 하면, “로풍찬 유랑극장”을 보면서 연극의 매력을 되새기게 되어서. 이 작품의 배경은 여수순천사건과 6.25전쟁 틈새에 좌우 이념 대립이 극심하여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보성의 어느 시골 마을이다. 이 무시무시한 분위기 속에 유랑극단이 나타나 로미오와 줄리엣을 상연하겠단다. 옆에선 총소리가 나고 시체가 굴러다니는데 연극 공연을 하겠다니.

마을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유랑극단은 극을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진정한 연극예찬이 시작된다. 마을 사람들은 극에 홀딱 빠져 당시 끔찍한 상황을 잊고 울고 웃으며 하나가 된다. 스무 명 넘게 나오는 원작을 네 명이 돌려 막는 허술한 공연임에도, 연극은 관객들과 배우를 어딘가 존재할 다른 세상과 잠시나마 이어준다.

“극장 안에는 극장 밖에 꺼진 밝은 세상이 있다네.
극장 안에는 극장 밖에 꺼진 밝은 세상이 있다네.” – 극중 대사

희망을 고대하는 관객과 극에 몸을 던질 배우들만 있으면 비록 환상이라 할지라도 환희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고 그 값어치는 어마어마하지 않을까? 뭐, 지치고 고달픈데 그런 걸 보고 듣고 할 여유가 있겠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겠지. “로풍찬 유랑극단”은 명료하게 대답한다. “연극은 사람이 왜 먹고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거다. 쌀보다 훨씬 진귀한 거다.”

근사한 연극 예찬인 “로풍찬 유랑극장”을 보고 나오면서 중얼거렸다. 그래, 이 맛에 연극 보는 거지. 극단 달나라 동백꽃의 레퍼토리로 정착되어 다음에도, 여러 번 볼 수 있었음 한다.

<로풍찬 유랑극장>, 김은성 작, 부새롬 연출, 극단 달나라 동백꽃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2014.10.23~11.02)

프랭크

2014년 10월 22일

가면을 쓰면 편안하다. 내 표정, 속마음이나 약점을 감출 수 있잖아. 이게 꼭 나쁜 건 아니다. 비록 얇고 허술한 가림막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안정감을 부여하니까. 영화 “프랭크”에서 프랭크가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것도 그런 맥락 아닐까?

가면을 바라 보면 불안하다. 그 안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니까. 거칠거나 부드러운 말투로 이야기하지. 가면을 벗어, 솔직해져봐. 허나 우리는 대개 심리적인 가면을 쓰고 다니면서도 그 존재를 잊어 버린 채 서로에게 요구한다. 가면을 벗어.

영화 속에서 존은 지루한 일상을 탈출하여 프랭크가 이끄는 밴드에 합류한다. 장기간의 합숙동안 존은 프랭크의 재능에 감명 받고 점차 그를 닮아 가려 한다. 하지만 존에게는 없고 프랭크에게 있는 것은 바로 재능이었으니 존은 곧 한계에 다다른다.

존은 유명해지고 싶었고 트위터나 유투브에 밴드의 일상을 중계한다. 조회 수, 팔로워 수에 집착하며 자신의 욕망을 밴드의 욕망이라 여기면서 일을 추진한다. 밴드 구성원들간의 파열음은 커져만 가고 영화는 점차 그 흔한 로드무비의 결말인 성공, 훈훈함과는 멀어진다.

가면을 쓰지 않은 존보다 프랭크가 훨씬 솔직담백한 게 아주 역설적이었다. 앞서 말했 듯이 사람들은 각자 나름의 가면을 쓰고 다니는데 프랭크는 당당하게 물리적인 가면을 썼던 것이고, 존 또한 심리적인 가면을 썼음에도 비겁하게 그 자신을 부정했던 셈이다.

그저 음악 영화인 줄 알고 본 건데, 귀에 남는 음악은 별로 없었던 영화 “프랭크”. 오히려 인간의 가식, 광기, 욕망에 대한 찝찝한 몽상만 얻고 영화관을 나섰다.

우표, 역사를 부치다

2014년 10월 20일

“우표, 역사를 부치다”를 읽으면서 여태 지나친 우표의 의미에 생각해보게 된다. 우표는 한 국가가 우편 서비스를 제공할 정도의 체계를 갖췄으며 서비스의 수요가 있음을 입증하는, 과시의 산물이다. 또한 국제 우편의 경우 많은 이들의 손을 타는 만큼 대외 선전용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로서 우표가 활용되기도 한다. 이렇게 저자는 우표를 통해 치열했던 세계사 그리고 복잡한 지정학적 의미를 지닌 한반도 이야기를 풀어낸다.

검열 표시로 뒤덮인 군사 우편, 왕의 초상을 급히 지우고 그대로 쓰는 혁명 정부의 우표, 전시戰時에 상대방 국가를 조롱하는 그림이 인쇄된 엽서들, 급격한 인플레이션 덕분에 자꾸 가격을 수정한 우표, 우편을 전달하는 본연의 목적은 사라졌으나 독립의 염원이 담긴 망명 정부의 우표..

수십 년 전의 사람들이 보내고 받은 우편물이라도 배경을 알고 다시 보면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더라. 그들이 살았던 세계의 상황, 혹은 보낼 당시의 급박함 등이 참 생생하게 다가온다. 매일 보는 사물에서 또다른 면모를 발견한다는 게, 바로 방향 없는 독서의 장점 아닐까? “우표, 역사를 부치다” 또한 그 성공적인 케이스에 넣어둬야 할 듯하다. 어린 시절에 우표를 수집했던 기억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읽어보라 추천하고픈 책이다.

Face to Face

2014년 7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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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씩 방 안에 앉아 질문을 받는다. 질문이 끝나면 이 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인적사항, 시민단체 가입 여부 등등을 묻고 마지막에는 촬영에 대한 동의를 구한다. 나는 거절했다. 이제 일어나 돌아다니면 된다. 아까 자유롭게 돌아다니라 했잖아. 묘하다. 옛 서울역의 문은 닫혀있고 창문 바깥에선 누군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문화역서울284에서의 공연”공간을 깨우다- Face to Face”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20세기 초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을 이 공간의 속성만 따지고 보자면 개방 그 자체라 할 수 있겠다만, 공연은 폐쇄를 지향한다. 사방이 막혀 있는 옛 서울역이라.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1층, 2층을 돌아다니는 것뿐이다. 여기저기 CCTV와 감시요원이 우리를 지켜본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를 외치며 여행을 다니고 그 순간을 찍어 SNS에 올리지만, 자유는 본질적으로 불안하다. 무정부 상태의 자유, 우범 지대에서의 자유는 어떤가? 차라리 CCTV가 설치된 밤거리를 ‘자유’롭게 걷는 게 훨씬 편안하지 않은가? 어쩌면 나에게 허용된 자유는 단 하나, 지갑을 꺼낼 자유일지도 모르겠어. 노래를 흥얼거리며 옛 서울역을 둘러본다.

대한민국은 자유국가 / 민주국가 평등국가라고 말하지만 / 우리는 맘대로 웃고 / 행동하며 소리칠 수도 없는걸 / 자신은 자유롭다 생각하겠지만 / 아빠의 허락 속의 자유일 껄 / 권력자는 제도를 조종하고 / 그 제도는 우릴 억압하지 – <좆 같은 세상 갈아 엎어요>, 김태춘

서울역 앞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정치적인 거리이다. 누군가 자신의 뜻을 피력하기 위해 피켓을 들고 집회를 연다. 경찰들은 감시 혹은 보호를 하기 위해 그 주위를 둘러싼다. 그런 유구한 역사를 반영한 걸까, 2층에 닫힌 방 안에선 으스스한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맞고 문을 두드린다. 여기서 가까운 남영동 대공분실을 재현한 건가?

2층의 홀에는 아까 우리를 감시하던 보안 요원들이 조각상처럼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감시의 주체가 감시의 대상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시간이 지나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들 제자리로 돌아간다. 1층의 복도로 들어갈 때 놀랐다. 내가 조각상 포즈를 취한 요원들을 보는 게 찍힌 장면이 재생되고 있는 거 아닌가? 내가 엿보고 있다고 생각할 때조차 누군가 나를 엿보고 있었다.

공연에 앞서 질문을 받았던 방 안에 들어가고선 기절초풍했다. 촬영에 대한 동의를 구할 때 거절했건만 내 모습이 노트북에서 떠있었다. 내가 거절이라는 선택의 자유를 누린다 느낄 때도, 김태춘의 노랫말처럼 ‘아빠의 허락 속의 자유’였다.

‘장소 특정적 공연’이란 걸 처음 접해봤는데 이런저런 생각 거리를 던져 주었다. 연출가 트리스탄 샵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형태의 공연이란다. 개방적 공간인 서울역을 폐쇄된 정보 기관으로 바꿔버린 그의 발상은 꽤 참신했다. 수많은 창을 가진 건물을 닫아버리니 열린 것 같으면서도 내가 숨을 곳은 없는, 불안을 주는 공간으로 재탄생한 옛 서울역. 완성된 형태의 공연은 어떨까 궁금하다.

아트플랫폼2 – 공간을 깨우다  <Face to Face>
문화역서울 284, 트리스탄 샵스 연출 (2014.7.19)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 미네티

2014년 7월 20일

바람아 불어라, 너의 뺨이 터지도록! 세차게 불어라!
-<리어왕> 중 3막 2장, W.셰익스피어

어느 호텔에 도착한 노인. 자신을 배우라 소개하며 그 도시의 시립극단 관계자를 기다리겠다고 한다. 마지막 공연으로 “리어왕”에 출연하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극단 관계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노인은 주위 사람들의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기다린다.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 미네티”의 시작이다. 오지 않는 이를 기다리는 고독함, 그리고 옛 전성기의 흔적조차 찾기 힘든 초라한 행색. 실제로 주인공 미네티는 리어 왕의 처지와 비슷한 셈이다. 그래도 그는 물러서지 않는다. 폭풍우가 불 때마다 그는 리어왕의 대사를 읊조린다. “바람아 불어라, 너의 뺨이 터지도록! 세차게 불어라!”

저 대사는 운명과의 전쟁에 앞서 내놓는 당당한 출사표일 수도 있고, 아니면 혹독하게 무너지는 자아의 마지막 외침일 수도 있다. 글쎄다, 미네티가 저 대사를 말할 때 무슨 심정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둘 다 아닐까? 그리고 주목할 점은 바로 가면의 존재이다. 화가 앙소르가 만들어줬다던 리어왕 가면을 가방에 넣어두고 항상 곁에 놔두긴 하지만 꺼내진 않는다.

극에서 주위 사람들은 자유자재로 가면을 벗었다 쓰면서 미네티를 놀린다. 왜 그도 남들처럼 가면을 쓰고 행렬에 동참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본 모습을 끝까지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니었을까? 그는 미네티이면서도 곧 리어 왕이었다. 아마 미네티의 마지막 목표는 “리어왕” 출연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다른 이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올곧게 진심을 다해 살아내기’이었을지도.

사실 이 공연은 특별했다. 여든의 노배우 오순택님이 미네티를 연기하고 그의 제자들이 교대로 출연하는 ‘헌정 공연’이었다. 근사했다. 연극의 등장인물과 실제 인물이 이리도 비슷하다니.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 미네티”의 결말은 비참했지만, 막이 내리고 나서 돌아온 현실은 훈훈했다. 공연 자체도 훌륭했지만 이렇게 외적인 요소로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은 드물 듯하다.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 미네티>, 충무아트홀 블랙
토마스 베른하르트 작, 이윤택 연출, 연희단거리패 제작
(2014.7.12~19)

배수의 고도

2014년 7월 8일

세월호 참사는 한국에 내재되어 있던 부패와 모순 등을 한 번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반복되었던 인재이면서도 어설픈 미봉책만 세우다 언젠가 잊혀질까 봐 우려가 되기도 하지. 게다가 이런 일이 있음으로 큰 불만이 쌓이고 그 에너지가 정치적 변화로 이어졌으면 좋으련만, 도무지 바뀔 낌새가 없는 정당들의 정쟁에 가려지고 있다.

지난 주말에 “배수의 고도”라는 연극을 봤다.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한국의 세월호 참사와 겹쳐 보이는 부분이 참 많았다. 일단 대지진 직후의 혼란과 갈등을 다룬 1부는 제쳐두고, 약 10년이 지난 후부터 시작하는 2부는 기시감마저 느껴졌다. 원전 반대를 내세운 야당이 정권을 잡았으나 경제 침체 때문에 공약을 뒤집고 원전 건설로 선회한다.

“배수의 고도”가 탁월했던 점은 진영 논리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목소리를 통렬하게 전달해주는 데에 있다. 전력 부족으로 기업들은 빠져나가니 혜택을 줘야겠고, 재생 에너지로는 충당이 안되니 결국 일본 정부는 경제 성장이란 기치 아래 원전을 다시 건설하려 한다. 방사능에 피폭된 이들의 극렬한 반대, 원전을 유치하려는 지방 현 의원의 찬성 등등 여러 의견들을 병치시키면서도 극은 단호하게 사람이라는, 생명의 가치를 내세운다.

사람을 생각하고, 안전을 우선시하면 좋은데 말이야, 그럼 돈이 많이 든다는 거지. 산업 경쟁력도 떨어질 테니, 반대파의 목소리를 묵살하고 원래 하던 대로 하자. 세월호 참사뿐 아니라 밀양 송전탑, 원전 건설 강행 등 많은 걸 생각나게 했다. 진정 대안은 없는 건가? 여태 뒤척였던 대안 경제 서적을 떠올리면서도 정작 정치적인 세력화에 실패하고 거대 양당들에 의해 흐지부지되는 거, 이조차도 익숙한 거라 힘이 빠졌다.

“배수의 고도”의 결말에는 대안 제시는 없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활극이 펼쳐진다. 하긴 그런 게 쉬운 일이 아니지 싶으면서도 약간 아쉽긴 하였다. 허나 작가는 여태 반복된 비극의 고리를 굉장히 예리하게 파헤쳐내는 통찰력을 보여줬다. 이런 작품을 거의 마지막 공연에서야 접하게 되다니 좀 아쉽군. 끝나고 일어날 때 자리를 뜨기 어렵게 만드는 극을 아주 좋아하는데 “배수의 고도” 또한 그 범주의 작품 중에서도 순위권에 넣어놓고 싶다.

u003C배수의 고도>, 나카츠루 아키히토 작, 김재엽 연출
(2014.6.10~7.5),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병실에서의 죽음

2014년 7월 3일

“녀석이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정말로 혼자라고 느낄 때가 언제인지 알아? 수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있을 때지, 하고 나는 대답했다. 녀석이 하는 이야기의 맥락을 제대로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게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어야 했다. 우리가 정말로 혼자라고 느낄 때는 죽는 순간이었다. ..” – <치과의사>, 로베르토 볼라뇨

병원 당직을 서면서 가족 없는 임종을 몇 번 지켜봤다. 심박수 그래프가 평평해지고 동공 반사는 없고 경동맥은 뛰지 않는다. 사망 시간을 기록해두고 가족을 기다린다. 다양하다. 헐레벌떡 달려오거나 아님 30분 있다 슬슬 오거나. 아무개 씨께서는 몇 시 몇 분에 사망하셨습니다. 체호프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살아서 혼자였던 것처럼 관 속에서도 혼자일 것이다.” 물론 체호프가 젊었을 때 편지에 끼적인 말이다. 큭. 그도 죽기 직전에 결혼했었지.

뭉크의 “병실에서의 죽음”을 보고 나서 드는 이런저런 생각들. 니체는 이렇게 야그했었다. “나를 죽이지 못한 모든 것들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 뭐, 허세에 가까운 말이지. 니체의 최후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오지 않을 텐데. 고통 앞에서 버티는 이는 아무도 없다. 통증, 죽음 앞에서 강한 척하는 이가 있을까?

뭉크, 영혼의 시 (2014.7.3~10.12)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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