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하이브리드트럭

2013년 3월 5일

발리를 산책하다가 ‘공업사, 빵꾸’ 간판이 달린 허름한 정비소 안을 들여다 보면 뼈대만 남은 트럭 옆에서 할배가 끊임없이 뭔가를 고치고 있다. 나는 그 분을 ‘내연 기관의 달인’이라 부른다. 뭐, 40년 넘게 바퀴 달린 걸 다 수리해 왔던 분이니 별명을 지어드려도 될 것 같다.

할배가 침 맞으러 오실 때마다 묻는다. 오늘은 뭘 자르시나요? 응? 가게 앞에 큰 전동톱이 있어서요. 아, 그거 누가 고쳐달라 맡긴 거야. 오늘은 자전거 고치시나 봐요? 응? 앞에 자전거가 있어서요. 아, 그거 내가 타고 다니는 건데. 가게에 무슨 일 있어요? 응? 경찰 오토바이가 서있어서요. 아, 요즘 수리하고 있는 거야. 이렇듯 그가 고치는 사물은 꽤 다양하다. 승용차, 경운기, 트럭, 수레, 자전거, 탈곡기 등등 심지어 개집까지. 그래도 내가 보기에 할배의 주특기는 트럭 수리이다. 발리에 처음 왔을 때 어떤 트럭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지. 앞에는 아시아자동차의 마크가, 뒤 쪽 화물칸에는 현대자동차가, 네 바퀴에는 기아 상표가 찍혀있고, 옆에는 소형 양수기가 달려있는, 진정 격렬한 하이브리드풍 트럭이랄까. 여튼 희안하고 전위적인 사물이 내 앞에서 경운기의 속도로 굴러가고 있었는데 바로 할배의 작품이었다. 40년 넘게 축적된 부품들을 맞지 않으면 자르고 용접하고 두드리고. 그렇게 탄생한 발리하이브리드트럭 1호, 2호, 3호.. 들이 영양군을 누비고 있다.

날이 따뜻해진 지금. 산책하다가 정비소 안을 들여다 본다. 뼈대만 있고 앞에 번호판이 간신히 붙어 있던 트럭이 제법 모습을 갖춰간다. 전조등이 달리고 이제 배터리를 달 차례인가 보다. 할배는 보이지 않네. 밥 먹으러 가셨나. 내가 발리를 먼저 떠날지, 저 발리하이브리드트럭 몇 호의 시동이 먼저 걸릴지 모르겠다만. 경운기의 영혼을 품에 안은 그 트럭 작품들을 잊지 못할 듯싶다.

20분

2013년 2월 6일

책을 읽는다. 똑똑. 계십니껴? 늘 하던 대로 침을 놔드리고. 20분 있다 빼드릴게요. 자리에 앉는 순간 2주 전 기억이. 할매에게 늘 하던 대로 침을 놔드리고. 이런저런 야그를 듣는다. 첫 째 딸은. 둘 째는. 셋 째는. 네네. 딴 생각도 약간. 총각 참 착하네, 임자 있나? 없죠, 하하. 꼭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아, 네. 서울에서 일하고. 어, 네? 예쁘고 25이라네. 네? 이번에 서울에서 볼 일 있는데 이야기해볼게. 감사합니다. 현재로. 타이머를 본다. 15분. 할매는 왜 아무 말도 없는 걸까? 잊어버리셨나? 책을 펼친다. 음. 타이머를 본다. 13분. 노화로 인한 망각을 되새기게 하는 건 실례야. 12분. 하지만 확인은 해봐야지. 10분. 그새 ‘변동사항’이 생겨서 할매도 말하기 그런 걸 거야. 8분. 25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 몇 년 째 25 이런 거. 5분. 할매가 한 번 해본 말일텐데 이리도 잡념이. 3분. 그래도 다시 한 번. 2분. 포기하면 편해. 1분. 허허. 벨이 울린다. 침 빼드릴게요. 할매는 인사를 하며 나간다. 침묵이 폭발하던 기나긴 20분은 지나고. 늘 하던 대로.. 책을 읽는다.

발리發里 귀환기.

2013년 1월 2일

버스 타고 영양읍 내에 도착하면 끝일 줄 알았다. 허나 여기 도로 사정은 더 안 좋더라. 그래도 발리까지 불과 20km 남겨두고, 그것도 새해 첫 날에 모텔에서 자긴 싫었다. 바퀴에 체인을 감는 중에 눈이 다시 내린다. 어쨌든 출발. 앞이 보이지 않는다. 마주친 노루들 조차도 균형잡기 힘들어 하는 빙판 위에서 경운기 속도로 운전한다. 차가 눈 속에 파묻히고 있다.

이제 발리까지 4km. 고개 하나를 넘어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는다. 차를 버리고 걸어가야겠어. 미안, 레조. 나중에 꼭 찾으러 올게. 북라이트를 가슴에 달고 걸으니 흡사 아이언맨 같다. 물론 아이언맨이라면 분당에서 발리까지 날아서 출퇴근하겠지. 모든 빛을 삼켜버리는 눈과 어둠을 만끽하며 비탈길을 오른다. 너무 조용해서 오싹하다. 아니면. 그냥 추운 건가?

가방에서 이과두주를 꺼내 마신다. 크리스마스 때 오지트래킹 하려고 준비한 걸 지금 쓰는구나.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이게 오지트래킹 아닌가? 걸은 지 한 시간이 넘어간다. 굽이굽이 길을 얼마나 올랐나 싶더니 익숙한 표지판이 나온다. <한티재 해발고도 430m> 저 멀리 불빛이 보인다. 가로등에 달린 고추가 보인다. 안녕, 발리.

발리發里 : 발리의 발發은 시작을 뜻하며, 고개를 넘자마자 보이는 수비면의 첫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쾌하지 않은 일들.

2013년 1월 1일

유쾌하지 않은 일들.

오지 않는 버스 기다리기. 읍내 근처에 버려둔 내 차 걱정하기. 기를 쓰고 발리를 나오려는 맹목적인 의지에 대한 두려움. 새해 첫날을 모텔에서 보내기. 내일은 영양으로 버스가 갈까 하는 염려. 걱정하는 어머니의 전화 받기. 찬바람과 함께 스며드는 외로움..

앗 버스가 온다!

도피.

아주 오랜만에 집의 침대에서 뒹굴며 낮잠을 청하다 아무런 내용 없는, 허나 기분 좋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나는 바닷가에 앉아 부리또를 먹으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만날 사람, 약속 없는 한적함을 즐기다 맥주를 다 마시는 순간 눈을 떴다. 맛, 냄새, 바람의 상쾌했던 느낌이 생생히 남아 있더라. 음, 부리또는 이태원 타코 칠리칠리에서 먹던 바로 그 맛이었고 맥주는 내 파트너 맥스, 바다는.. 해운대를 닮아 있었다. 갑작스레 경험의 꼴라주가 되버린 꿈 장면을 재현해보고 싶었다. 해운대에서 타코, 부리또 파는 데를 검색한다. 있구나! 해운대로 내려가는 열차 시간표와 숙소를 알아본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바다를 볼 수 있겠구나. 아아. 맥주에 빨대 꽂고 달맞이길을 걸을 내 모습. 흘러내리는 미소를 멈출 수가 없다.

지금 나는 안동으로 내려가는 무궁화호 열차 안에 있다. 지금 영양군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린 상태이다. 방금 같이 사는 의과 형으로부터 발리로 가는 길이 끊겼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일 어케 출근하지?

아이폰에 저장된 해운대 사진을 열어놓고 맥주를 까며 다시 환상으로 도피한다.

Cool犬

2012년 12월 12일

그래, Cool犬이라 부르자.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산책할 때마다 갑자기 어디에선가 따라 나서 같이 걷는 개가 있다. 한 바퀴 돌고 나면 그 개는 집으로 들어 가고 나는 산책을 마무리한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서 좀 이상한 일을 발견했다. 제 집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더니 볼 때마다 들어가는 집이 달랐다. 그렇다. 그 개는 떠돌이 개였다. 다만 여러 집에 들어가는 품새가 너무 당당해서 그리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먹이를 구걸하거나 꼬리도 흔들지 않는 떠돌이 개라니. 나는 그저 그 개의 점심 산책 동행자였다. 정말 쿨하지 않은가? 그래, 쿨견이라 부르자. 이제 기온이 점점 낮아지고 쿨견이 점심 산책을 빼먹는 경우가 잦아졌다. 허나 걱정을 할라치면 개는 나도 모르게 옆에 다가와 같이 산책을 시작하곤 했다. 폭설이 내리는 저녁이었다. 구멍 가게를 다녀오다 집 앞에서 쿨견과 마주친다. 몸을 덜덜 떨며 연신 재채기를 하고 있다. 나는 마당 창고 문을 열고 들어오라 손짓한다. 개는 망설이다가 돌아선다. 어이! 소리쳐 부르지만 개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튿날부터 쿨견이 보이지 않았다. 눈 위로 알 듯 말듯한 발자국들만 남아 있다. 나는 산책하다 괜스레 주위만 돌아볼 뿐이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눈이 슬슬 녹기 시작한다. 오늘도 걷는다. 기온이 좀 따뜻해져 걸을 만하다. 갑자기 옆에 기척이 있어 돌아보니 쿨견이 같이 걷고 있다. 비쩍 말랐지만 당당한 걸음으로 말이다. 살아 있구나! 개는 슬쩍 올려다보고 만다. 반응 참 무덤덤하네. 코스를 끝마쳐간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옆을 보니 어느새 개는 사라졌다. 작은 발자국만 남긴 채.. 역시 Cool犬이구나.

유물.

2012년 12월 3일

그 할배는 계속 그 곳에 있었다. 내가 아침, 점심마다 산책할 때 그는 같은 곳에 앉아서 허공을 바라보거나 때때로 주위를 조금 서성이다 숨이 부친 듯 다시 자리에 앉곤 했다. 그러기를 7개월. 내가 걸을 때마다 그 자리에는 할배가 꼭 있었고, 마치 없으면 어색할 것 같은 배경의 한 요소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지난 주부터 그가 그 곳에 없다. 추워서 그런가, 별일 없으신가? 여러 의문을 삼키며 지나쳐 갔다. 오늘, 웬 버스가 그 곳에 있다. 앞에는 ‘근조謹弔’ 스티커를 붙인 채로. 사람들이 떠들며 집에서 세간을 들어내고 짐을 꾸린다. 7개월 동안 그 곳이 그렇게 시끌벅적한 경우를 본 적은 처음이다. 한 남자가 안을 두리번거리다 자물쇠를 채운다. 산책 한 바퀴를 더 돌고 오니 버스는 떠났고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했던 마당은 말끔히 치워졌다. 그런데 이상하다. 허전하지 않다. 지나치며 다시 뒤를 돌아본다. 할배가 짚고 다니던 낡은 나무 막대기, 그가 항상 앉아있던 의자는 계속 그 곳에 있다.

잔혹한 출근.

2012년 9월 17일

어젯밤 운전하다 차 시동이 꺼져버렸다. 차를 산골짜기 어딘가 밀어넣고 걷다가 찾은 외딴 모텔에서 하룻밤.. 날 밝자마자 서비스센터로 차 견인. 부품있는 데로 다른 곳 찾아다니다가 포기. 출근을 해야 한다! 영주에서 기차타고 안동가서 버스타고 영양에서 갈아타면 발리.. “잔혹한 출근”이라는 어떤 영화 제목이 생각나는 월요일 아침이다.

일요일 저녁, 그들.

2012년 9월 3일

일요일 저녁 관사에 들어선다. 니 왜이리 일찍 왔노, 일없었나? 형은요? .. 이심전심, 염화미소, 아니 썩소. TV앞에 둘이 나란히 앉는다. 할 말이 없다. <같이하는 고독은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지옥이다>(1) 그가 냉장고를 연다. 야. 네? 이거 오래된 거지? 네? 오래 두면 상한데이. 빨리 묵자. 그가 가리키는 것은 지난 목요일에 사둔 병맥주였다. 형, 저 이번 주에 금주하려고요. 내 슬픈 이야기 들려줄게, 어느 집안 첫째 딸 이름이 금주고 둘째 딸은 금년인거라. 아아 그 두 명과는 절대 맺어질 수 없었더라. 그도 나도 슬펐다.. 그것은 바로 음주, <고독협동조합>(2)의 시작이었다.

(1)   어느 섬의 가능성, 미셸 우엘벡
(2)   스와보미르 므로제크의 단편집 “코끼리” 중 단편 이름.

그는…

2012년 7월 3일

그는 다정하다. 냉담한 나를 대신하여 다른 이들에게 말을 걸고 전화를 하며 문자를 보낸다. 그는 장난스럽다. 이른 새벽에 자는 나를 깨우고 낄낄대며 사라진다. 그는 술을 좋아한다. 이태원에서 그를 떨쳐내기 위해 여러 펍을 돌아다녀도 끝까지 따라다닌다. 그는 끈질기다. 괜찮다. 3시간 정도 걷다 보면 그도 지치니까. 그는 충동적이다. 그가 대책 없이 지른 일들을 수습하느라 진땀 뺀 적이 있었지. 그는 까칠하다. 내 취미를 비웃으며 TV좀 보라며, 주위를 돌아보라며 긁어댄다. 괜찮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마냥 익숙해졌으니까. 그렇다. 그와 나는 꽤 친하다. 그가 내 책을 읽기도 하고 같이 밥을 먹으며 야그하고 음악을 듣는다. 허나 가끔씩 그가 없다 해도 허전하진 않다.. 웬일인지 그가 며칠 동안 보이지 않는다. 늦은 밤 맥주 한 캔을 딴다. 어디선가 그가 나타나 다가온다. 난 중얼거린다. 또 왔구나. 그는 웃는다. 언제나 곁에 있었어, 내 이야기가 곧 네 이야기이니까. 그렇다. 그는 외로움이다.

취야.

2012년 6월 21일

갑자기 술을 마시고 싶었다. 같이 사는 의과 형을 유혹했건만 이 분 단호하다. 7월 바닷가 출격을 목표로 다이어트하시는 중이라서. 그 심정 뼈저리게 아는 처지라. 단념하고 하이트 캔을 깐다. 물론 형 앞에서. 넘어올 것 같다. 칼로리를 묻는다. 131칼로리이에요. 시원하게 한 잔 하시죠. 맥주캔을 흔든다. 그 흔들리는 눈빛을 보았다. 이러는 내가 싫다. 그 심정 뼈저리게 아는 처지라. 그래서 냉장고에서 갓 꺼낸 캔을 개봉한다. 아니 왜 벌써 까노. 그냥. 제가 마시려구요. 잘 빠진 산토리 프리미엄 몰츠 유리잔을 씻어서 무심히 내놓는다. 니가 마실끼가. 네. 하지만 형이 드신다면. 아니다. 정말 멋진 분이다. 응원해야지. 그 심정 뼈저리게 아는 처지라. TV에선 6.25특집으로 미국기자가 해병대 정신을 칭찬한 내용을 반복한다. 전쟁이란 건 참 복잡하고 비참한 일인데. 왜 자꾸 한 명의 외국 기자 야그를 되풀이하는 거지? 형. 벌써 6.25네요. 그러게. 일년의 반이 지나갔어요. 좀있으면 그 날, 12월 24일이 오겠죠? 휴. 남은 6개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어야 할텐데. 그 심정 뼈저리게 아는 처지라. 제가 그 날 발리를 지킬 테니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래요. 형. 드시죠. 한 잔만 마시면 괜찮겠지? 당연하죠. 전 살 빼고 술 마시기 시작했어요. 맥주가 떨어졌다. 저녁도 부실하게 먹었는데 막걸리나 마실까요? 제발. 날 유혹하지 말아다오. 한. 잔. 만 드세요. 나 잔다. 방 안으로 들어가신다. 멋진 분이야. 그 심정 잘 알죠. 근데 전 술을 마시고 싶었거든요..

휴. 대전에서 본 이응노의 “취야”. 저 그림처럼 술마시며 오랫동안 야그할 수 있었으면.

무슨 커피가 제일 맛있을까.

2012년 6월 14일

찬장을 연다. 뭐 마시지. 케냐 피베리? 여러 종류의 커피들 중 고민하다 피식. 고딩 때는 캔커피 한 잔이면 충분했지. 설탕 중독이었을 거야. 멕시코 알투라? 몇 년 전부터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고 생산지 따지며 커피를 마시게 되었어.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급기야 생두를 사서 볶기도 하고. 수북히 쌓인 커피 껍질을 치우면서 후회하기도 하고. 이디오피아 시다모? 더치 커피를 만들기 위해 페트병 두 개를 연결해서 물방울 떨어지는 속도 가지고 고민했지. 인도네시아 블루문? 쓸데없는 자부심. 내 커피가 제일 맛있어. 내가 볶고 갈아서 내린 커피. 나만의 커피. 과테말라 SHB? 지구 건너편에서 사람들이 저임금으로 죽어라 따고 껍질 벗기고 해서 생산된 커피. 반半 노예들이 생산한 커피. 브라질 산토스? 뭔 상관이야. 사치 좀 부리면 안되나. 있어 보이잖아. 커피 마시면서 아는 척 좀 하고. 다만 아는 척에서 끝낼 줄 몰라 문제라는 거. 콜림비아 수프리모? 무슨 커피가 제일 맛있을까. 이 원두는 어쩌구 저 원두는 저쩌구. 예멘 모카? 에스프레소나 마시자. 밤 중에 홀로 한 잔 들이키며 깨닫는다. 그래. 누군가와 수다 떨면서 마시는 커피가 젤 맛있는 거야. 하하.

발리. 1

2012년 5월 21일

새벽에 도착하여 잠을 청하는데 어떤 악기소리가 들리는거야. 흐음. 이 산골에서 누가 호주 원주민 악기를 연주하다니. 디저리두였던가. 단조로운 음률에 나른해진다. 근데 관사 안에서 나는 것같아 오싹해졌다만. 모르것다. 잠이나 자자. 밖에 나가는 것도 그렇고. 멧돼지가 더 무섭거든. 창 밖이 밝아지자마자 소리의 근원을 찾아갔다. 역시 관사 안이었다. 누구야! 문을 열어보니.

기름 보일러 소리였다. 아. 드디어 미쳐가는구나..

컨텐츠 풍부한 남자.

2012년 5월 4일

목요일 저녁. 영양군 공보의 회식. 간신히 이어나가는 유쾌함 속에서 누군가 금기의 질문을 던진다. (추첨에서) 몇 번 뽑았어요? 시작되는 탄식과 공감의 눈빛. 휴. 여기에서 놀러 갈만한 곳 있나요? 피식하는 반응들. 없어요, 없어. 그는 발끈하며 열변을 토한다. 31번 국도를 타고 봉화군 재산면을 지나 안동으로 접근하면 농암종택이란 곳이 있어요. 낙동강 상류 지역중 정말 아름답죠. 하회마을 부근에 있는 병산서원도 좋습니다. 가을에 꼭 가보세요. 바다보고 싶시다고요? 읍내에서 동쪽으로 40km만 나가면 영덕이 나와요. 7번 국도 드라이빙 환상적이죠. 아차 주왕산을 빼놓을 뻔 했네요. 남쪽으로 진보면을 지나 청송읍 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영주 부석사도 가보세요. 먹는 거라면.. 안동초등학교 뒷 골목의 중앙 구 시장 찜닭 골목으로 가보세요. ‘유진’ 찜닭이 맛있어요. 차세울 데 없다고요? 안동 문화예술의전당에 무료로 주차할 수 있어요. 그래.. 봉정사! 서안동IC 지나서 있는 절인데 목련 꽃필 때 가야 해요. 어디까지 했더라. 문화예술의 전당 야그했나요? 매주 화요일마다 흥미로운 프로그램의 음악회가 열립니다. 수비면에서 울진 온정면으로 넘어갈 때 구주령이란 고개가 있어요. 날 좋을 때 차몰고 가세요. 산 들 위에 바다가 떠있는 걸 볼 수 있을 거에요. 좀만 더가면 백암온천 나오고 더가면 해안입니다. 영양의 일월산도 좋아요. 일월자생화공원은 지금이 한창일 때죠.

영양 사람이세요? 아뇨, 경기도에서 왔어요. 그럼 누구랑 그렇게 다니셨어요? 혼자.. 언제 그렇게 돌아다니셨어요? 시간날 때마다..

그는 영양군에 대한 컨텐츠가 넘치는 남자였다. 그리고 영양군에 정 들어버렸다.

조금 다른 일요일

2012년 4월 22일

그 남자의 일요일. 평상시와 달랐다. 오전 11시 40분 안동행 버스를 탄다. 일요일인데! 이사를 해야 하니 어쩔 순 없지만 이 시간에 출발해야 하다니. 꾸릿한 날의 괜한 울적함을 맥주 한 캔을 까며 달랜다.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졸다가 커튼 바깥이 아주 밝아진다. UFO 납치인가! 불행히도 아니다. 구름이 갈라진 틈으로 햇빛이 푸른 잎새가 돋아나는 나무들을 달군다. 매일 막차를 타면서 지나친, 어둠에 묻힌 경치였구나.

안동이다. 차를 몰고 영양으로 들어간다. 바닥엔 꽃잎이 흥건하지만 아직도 많은 꽃들이 무사하다. 그저 흐뭇하다. 1년 전엔 이런 근사함을 몰랐다. 영양이 어딘지도 몰랐다. 나는 어디 여긴 누구. 이젠 목적지가 바뀌었다. 영양군 수비면. 전설에 의하면 이 곳을 십승지라 부른다. 전란이 발생하여도 수비에 들어가면 생명을 도모할 수 있으리. 그럴만하군. 안동, 영주에서 80km정도 떨어져 있고 길도 험하다. 뭐 어때. 생명을 도모할 수 있다잖아.

이제 숙소. 짐을 푼다. 배경음악으론 다이아나 크롤의 Pick yourself up. 지친 이를 격려하는 가사이지만. 짐을 pick up하라는 소리 같다. 큭. 신문지에 싸여진 그릇, 아니 맥주잔을 정리한다. 맥주가 아닌 물 마시고 싶다. 구멍가게에 들어간다. 물건을 뒤적여서 생수 묶음을 찾아낸다. 유통기한은 충분하다. 할머니가 나오셔서 날 바라본다. 나도 할머니를 본다. 흥정의 기본. 먼저 말하는 이가 진다. 가격을 봐야겠네. 네 보세요. 하나에 300원이라 치고 30개니 그냥 만 원내! 4×5.. 스무 개인데요? 육천원 드릴게요. 너무 싸다. 7천원 내! 아, 네.

두근두근. 1년동안 나와 동거할 의과 형이 온다. 너 뭐 좋아해? 나 TV 보는거 좋아해. 축구보세요? 프리미어리그보지. 저두요. 술마시냐? 소주만 빼고 다 마셔요. 맥주를 사.. 좋아해요. 냉장고 보니까 MAX가 많던데 나도 MAX좋아해. MAX없음 하이트D마셔요. 나도 그런데. 대화가 끊긴다. 어색하다. 베일리즈를 살짝 탄 라떼를 대령한다. 축구보자. 맨유와 에버튼 경기. 두 팀 다 정줄 놓고. 스코어는 4:4. 졸립다. 낼 보자~ 네. 맥주 한 캔을 까며 쳇 베이커의 The thrill is gone을 듣는다..

오후 11시. 지금 쯤이면 동서울터미널에서 막차를 탈 시간인데. 내일부터 새로운 근무처와 숙소. 허나 The thrill is gone. 평상시와 조금 다른 그 남자의 일요일은 끝나간다.